내향인의 세상은 현관 안쪽과 바깥으로 나뉜다.
현관 안쪽은 MBTI I인 내가 I로 살아도 아무도 참견하지 않는 평온한 공간.
현관 밖의 세상은 MBTI I에 한자 석 삼 (三)을 붙여 어설픈 가짜 E가 되어 맞서야 하는 세상.
가짜 E라도 되려면 3(三)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1. 낯가림에 냅다 도망치고 싶어도 활짝 웃기
2. 진심 딱히 궁금한 게 없지만 머리를 쥐어 짜내 뭐라도 안부 묻기
3. 딱히 할 말이 없으니 '네네, 맞아요' 추임새라도 넣어서 상대방이 알아서 떠들게 하기
가짜 E가 되어 사회에 나가도 내가 I인 것을 귀신같이 냄새 맡는 꼰대들은 나의 어설픈 E스러움에 태클을 걸 때가 있다. 제 아무리 살갑게 대하고 예의 있게 굴어도 타고난 E들이 가진 넙죽넙죽과 서글서글함이 없다고 딴지를 건다. 사람은 좋아 보이는데 차마 술 한잔 하자고 하기엔 접근성이 떨어진다고 하는 사람이나, 예의는 있지만 어딘가 싹싹하지 않아서 싫다는 사람까지. 지랄도 총천연색이다.
이래서 집 밖을 나가는 게 싫다.
현관문을 나서면 언제나 사람들이 있고,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은 대부분 내게 업무의 일환이다.
지하철에서 누군가 내게 성큼성큼 걸어오면 가슴이 철렁한다. 순간 제발 나에게 길을 묻지 않고 지나가길 신에게 기도한다. 그러다 막상 누가 진짜로 내게 길을 물어오면 세상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 준다.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는 순간 나는 금세 표정을 잃어버리고, 전원이 꺼져가는 휴대폰처럼 힘없이 끔뻑거린다.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어와도 이토록 에너지가 누수되는데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는 오죽 피곤할까. 이 사람들과는 그 더럽고 치사한 돈과 이해관계로 얽혀있는데. 그렇다고 피가 섞인 가족을 대하는 게 편할까. 가족 개개인간의 얽히고설킨 미묘하고 복잡한 관계를 모른 체하고 일상적인 관계인 척하는 게 뭐 그리 좋을까.
누구 말처럼 아무리 I여도 어떻게든 E처럼 보여야 더 잘 먹고 잘 살지도 모르겠다. 천 번 만 번 맞는 말씀이다. 완벽한 프로 E로 위장하지 못해 내가 이거밖에 못 사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사람 고생, 돈 고생에 매일매일이 육탄전 같으니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게 내 최선이다.
내가 일을 따려고 아무리 사람 좋은 척 억지로 술을 마시고 다녀도, 꼰대짓 하는 연장자에게 한 번 더 납작 엎드려 '넵넵이'가 된다 하더라도 애초에 극내향인인 내가 그들이 원하는 서글서글한 E청년처럼 될 수가 없다. 타고나길 본질이 다르다. 사람은 결국 생겨먹은 대로 살게 되어있으니까. 결국에 E 같은 맛이 없어서 내가 이 사회에서 팔리지 않고 도태된다면 그땐 나는 또 어떻게든 살 궁리를 하겠지.
내향인은 스스로 파고드는 부류의 사람이다. 누가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아도 늘 스스로를 검열하고 안으로 파고들다 곪아 터질 때까지 고민하고 자책한다. 내가 I라서 누군가의 인생에 피해를 끼친 게 아니라면 모두 조용히 했으면 좋겠다. 고물가 시대에 사치 하나 안 해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카드 값과 월세 생각만 해도 매달 충분히 벼랑 끝에 서있는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