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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국 생활 부적응자였다

by 유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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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이고 이민이고 나는 해외 생활과 전혀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미국에서 유학했고 심지어 이민을 목표로 네덜란드로 떠난 적도 있지만, 근근이 먹고 살지언정 우리나라에서 사는 것이 가장 나답게 사는 방법이었다. 심지어 미국은 열일곱에 처음 갔으니 꽤 어린 나이에 떠나 남의 나라 생활에 적응하기 쉬었을 법도 한데, 그 나라에서 대학을 졸업장을 따고 돌아오는 순간까지 줄곧 미국생활 부적응자로 살았다.


내가 만난 미국 사람들은 대개 친절하고 다정했다. 타인의 시선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 같지만 보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다.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에게도 'I like your outfit (너 옷 잘 어울린다)'라는 말을 건네는 사람도 종종 있고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스몰 토크를 건네는 경우도 허다했다.


혹자는 이런 점이 미국 생활이 주는 여유와 따뜻함이라고 했다. 그러나 초면이건 구면이건 누굴 만나도 낯을 심하게 가리는 내게 그들의 관심은 감사하고도 부담스러웠다. 미국에서 처음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내게 관심을 가져줬고 나를 알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줬지만 역시나 감사하고 부담스러워 매번 어설픈 옅은 미소를 띤 채로 도망 다니기 바빴다.


내가 만난 미국 사람들은 함께하기를 참 좋아했다. 함께 공부하고, 함께 운동팀에서 운동을 하고, 함께 주말을 같이 보내는 것이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처음에는 나도 그들의 입맛을 맞추려 외향인인척 빙의를 하며 나를 바꾸려 안간힘을 썼다. 그들의 입맛을 맞추기에는 내가 가진 내적 에너지가 이미 엥꼬가 나서 비상등이 깜빡거리는 수준이 되었고, 결국 나는 이 모든 활동에서 '함께'를 제외하고 살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아닌 나로 누구와 '함께'하기보다 스스로 고립을 택하고 외롭게 살기 시작했다.


미국 버전의 나를 재창조해서 그 나라에서 생존하는 방법이 제일 좋았겠지만 타고나기가 극도로 내성적이고 다른 문화를 수용하는 것에 완고했던 내게는 그저 힘들기만 했다. 시간이 흐르면 어느 정도 외국 생활에 익숙해지고 동화된다고 하던데 그 나라의 모든 풍경이 더욱 생경해져만 갔다. 나의 정신 건강을 생각한다면 유학을 때려치우고 한국에 돌아가는 편이 나았겠지만, 유학을 가는 것은 애초에 나의 간절한 꿈이어서 포기할 수가 없었다. 유학이라는 단어의 본질처럼 미국의 교육 체제 안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열망이 컸기에 내 성격과 상극인 나라에서 스스로 고립을 택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버텼다.


낯선 언어, 낯선 사람, 낯선 문화 속에서 나는 줄곧 혼란스러웠다. 지독히 외로웠다. 애초부터 이방인으로 그 땅에 발을 딛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는 히키코모리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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