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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일이 없어서 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 가봤습니다

프리랜서 방송인. 프리랜서(Freelancer)라, 이름처럼 참 자유로운 직업 같다.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 매일 출근하지 않아도 되니 쳇바퀴 같은 삶에 휘둘리지 않아도 되고, 출연료가 올라가고 일이 많아지면 그 달 수입이 갑자기 웬만한 월급쟁이보다 늘어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일은 나 스스로가 가장 살아있다고 느끼게 하는 천직이다.


그런데 말이 좋아 프리랜서 방송인이지 일이 없으면 그저 백수나 다름없는 것이 이 직업이다. 내가 이번달에 천만 원을 벌었다고 해도 다음 달 수입이 0원일 수도 있는 것이 이 직업의 생리다.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 내가 이 직업이 자유로운 듯 보여도 참 무섭다고 느낀 부분은, 내가 일을 못해도 혼낼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나의 퍼포먼스가 부족하거나 관계자의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굳이 나에게 쓴소리 해가며 지적해 주는 사람은 없다. 웃는 얼굴로 작별 인사하고 다음에 안 쓰면 땡이니까.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싶어도 누군가 선택해주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고, 돈을 벌 수 없고, 그러다가 내 능력을 의심하고,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 다른 길을 기웃거리다가, 이러다간 죽을 것 같다 하면 또 어디서 일이 굴러들어 와서 또 이 일을 하게 되는 반복이다. 일이 많이 들어오는 달에는 "이제 좀 잘되려나" 싶어서 기대에 살짝 붕뜨다가, 갑자기 일이 뚝 끊기면 "내가 늙었나, 외모가 문제가 있나, 실력이 문제가 있나, 재능이 없나, 잘못된 길에 들어섰나" 등등 무한 자기 검열의 늪에 빠져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일이 없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대표는 나에게 대놓고 "ㅇㅇ씨를 돈 주고 쓸 이유가 없다"라고 면전에 이야기하기도 했으니 업계의 입장에선 나의 포지션이 애매할지도 모른다. 그래, 내가 뭐 정우성, 차은우처럼 얼굴 천재도 아니고 팬덤을 가진 유튜버나 인플루언서도 아니다 보니 참으로 어정쩡한 무명이긴 하다.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어떤 선배 누나의 말처럼 그냥 내 때가 오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네가 실력이 없고,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그냥 아다리가 안 맞는 거야". 

힘들 때마다 이 선배의 말이 참 많이 기억났다. 아다리, 고급스럽게 말하면 타이밍, 우리말로 하면 나의 '때' 과연 오기나 하는 걸까. 


올해 초에는 정말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나를 써주는 사람이 없어서 방송일을 때려치우고 정규직에 들어갔다. 미국 입시학원에 부원장 자리로 입사를 했다. 나는 친한 사람이 아닌 이상 전화를 받는 것도, 거는 것도 공포감을 갖는 콜포비아 (Call Phobia)라서 처음에는 학부모들에게 전화를 걸 때 공황장애가 오는 것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버텼다. 방송을 하던 가락이 있으니 설명회를 실컷 해서 부잣집 마나님들의 지갑을 열어 기록적인 매출을 올렸는데, 정계약을 앞두고 사장이 말 바꾸기를 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나를 아르바이트로 뽑았고 공고에 적혀 있던 임금도 줄 수 없으며 대한민국 고용주라면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하는 4대 보험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참고 버티려고 했지만 결국 대판 싸우고 때려치울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고민과 정보 탐색 후에 나라에서 지원하는 고용노동복지센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용기를 내어 상담을 받아보았다. 나를 담당하는 주무관이 배정이 되면 나의 신상정보와 상담을 바탕으로 적절한 일자리를 추천해 주고, 입사 지원 시에 필요한 자소서나 면접 컨설팅과 같은 서비스를 무료로 진행해 준다. 우리나라의 복지 제도가 생각보다 선진화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나의 담당 주무관이 추천한 공공기관에 입사 지원을 해서 서류를 통과했고 내 생각에 면접도 막힘 없이 술술 잘 보았지만 결국에는 낙방하고 말았다.


그제야 담당 주무관은 이런 말을 했다.

"학벌은 높고, 경력은 짧고, 나이는 많으니 웬만한 기업에서 쓰고 싶어 하지 않죠"


집이 망하고도 11년을 고군분투해서 얻은 나의 졸업장이 현재 상황에서는 취업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 불가항력적인 사건들을 겪으며 남들보다 졸업이 늦어져 업무 경력이 짧다는 점도 오히려 핸디캡이 된다니 허탈하고 착잡했다. 나라고 늦게 졸업하고 싶었을까. 그래도 대학 졸업장이 있어야 입사 지원이라도 하는 세상이니 안간힘을 쓰고 졸업장을 땄는데 이제 와서 뭐 어쩌라는 건가 싶었다. 이럴 거면 왜 그리 애를 써가며 대학을 졸업하려 했을까. 그냥 기술이나 배울걸. 오만가지 생각과 후회를 하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고용노동복지센터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는 유야무야 끝이 났다. 안정적인 수입을 위해서 어떻게든 정규직에 들어가려 했지만 결국에 다시 프리랜서 방송인의 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또 정말 죽을 만하니 생각지 못한 일이 들어와서 어려운 고비를 넘고 넘어 올해의 마지막까지 근근이 버텨 살아남았다. 올해를 보내는 나의 마지막 소회를 밝혀보자면 끝없는 부침 속에서도 그래도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빚지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진행자뿐만 아니라 지면 광고 모델로도 확장을 해보았다는 점 이 두 가지이다. 열두 달을 빼곡히 다 보내면서 나쁜 年이었다고 싸잡아서 매도하고 싶진 않으니까. 2024년에는 제발 모든 게 아다리가 맞아서 나도 조금 숨통 트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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