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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유록 Apr 12. 2022

거꾸로 보는 연애사

연애세포 퇴화의 갈림길에서

 오래간만에 하우스메이트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 어떠냐며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한참을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물음표가 나에게도 날아왔다.




"유록은 요즘 고민 없어? 요즘 어때?"







"... 내 요즘 고민은... 연애세포가 급격하게 사라지는 것 같다는 거야. 연애는 어떻게 하는 거지?? '인간에게 정말 꼬리가 있었나' 하는 의심을 품으며 내 궁둥이의 꼬리뼈를 더듬어보듯이 내게도 정말 연애 세포라는 것이 있었나 하며 일기장을 들춰보면 분명히 남자랑 사랑하고 울고 웃었었거든. 근데 그때의 내가 마치 남 같아. 지금 남해에서는 새로운 사람을 못 만나기도 하고 앉아서 글을 쓰다보니 진짜 그쪽으론 지금 내 마음이 너무 가물었어. 오랜 가뭄에 말라비틀어진 농작물 같아."







인간에겐 원래 꼬리가 있었는데, 꼬리가 없어도 중심을 잘 잡을 수 있게 되면서 꼬리가 퇴화되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남자에게 잘 보이려 단장하지도 않고, 괜찮은 남자를 남자 친구 후보군에 올리고는 넌지시 유혹하며 플러팅하고 썸도 타는 즐거움을 찾고 있지 않은 나는 불행한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크고 작은 연애로 너덜거렸던 예전에 비해 꽤 잘 살고 있다. 연인관계라는 한꺼번에 가까워지고 한꺼번에 멀어지는 신묘한 인간관계를 겪으며 울고 웃는 삶의 희로애락을 통째로 날려 버리고 미니멀리스트 입문자처럼 후련해하고 있었다. 그런 감정의 큰 낙차로 가득한 삶보다는 하루하루 일상을 소소하게 살아가는 지금이 좋다며 나름의 균형을 맞춰 살고 있었는데 정말 꼬리처럼 붙어 있던 연애세포가 사라져 가는 것을 보니 이대로 영영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닌지 이제와 막연해지는 것이다. 설렘, 청춘, 연애. 이런 예쁜 말들이 언제부터 내 삶에서 이토록 멀어졌을까. 왜 멀어진 걸까.







라테 이야기를 하기는 싫지만, 복기를 해보자면 20대 때는 플러팅에 꽤 능해서 빈틈없이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졌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내 연애사는 공백이 가득해 읽을 것이 없고, 플러팅 기능은 업데이트가 되지 않아 멋진 남자를 봐도 제멋대로 뚝딱거리며 버그를 일으킨다. 괜스레 더 '와하하하'하고 크게 웃으며 '나를 여자로 보지 말고 한 인간으로만 보세요! 왜냐하면 나는 지금 내 삶이 좋거든요, 그러니 제가 먼저 깐 것입니다. 우하하'라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자꾸 보낸다. 남자들 입장에서는 안물, 안궁(안 물어봤고, 안 궁금하다)일지라도 말이다. 아무리 멋진 남자를 보더라도 자기 자신도 모르고 있지만 사실은 이성애자가 아닐 것이라는 망상도 하고, 결국엔 바람을 펴서 파탄이 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플러팅 기능의 버그가 아니었다. 새로운 ios에 플러팅 기능은 아이폰의 홈버튼처럼 영영 사라지려 하고 있었고, 방어기제가 나도 모르게 새로 추가된 것이다.





마음속 깊숙이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보낸다. 왜 연애세포도 플러팅 기능도 다 없애버리려고 하냐고. 진짜 지금 이대로가 더 좋은 거냐고. 그리고 방어기제 이건 또 뭐냐고. 합의한 업데이트가 맞는 거냐며 따져 묻는다.

 




"낭만적인 사랑 포비아(공포증) 증상으로 지속적인 오류를 일으켜 방어기제 탑재, 연애세포와 플러팅 기능 삭제 예정. 업데이트하시겠습니까?"




마음속에서 알람이 떴다.





이제와 부모님 탓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린 내가 가장 처음 맺은 애착관계이니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감수성은 예민하나 세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어린 나는 항상 바쁜 엄마와 표현에 서툰 아빠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래서 무언가를 잘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아무렇게나 믿어 버렸다. 사랑한다는 말은 잘해주시지 않으니, '내 딸, 잘했다. 정말 멋지다.' 이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이런저런 상장을 받아오면 입가가 슬쩍 올라가시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칭찬에도 야박하셔서 늦은 밤까지 공부를 해 전교 1등을 한 이제 갓 중학생이 된 딸에게 전 과목에서 몇 개를 틀렸냐고 물으셨다. 나중에 들어보니 나를 강하게 키우고 싶으셨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알 턱이 없던 어린 나는 구멍 난 가슴을 끌어안고 잠들어야 했다. 이에 반해 친구들은 비교적 적은 노력으로도 나를 좋아해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점차 친구들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상대방을 판단하는 기준은 오직 '나를 좋아해 주는가'. 나를 좋아해 주면 좋은 사람이고, 내게 무관심하면 천하에 다시없을 나쁜 사람이었다. 이성에 눈을 뜨고 나서 처음으로 이성의 관심과 애정을 느낀 후로는 드디어 이 구멍 난 갈증이 해결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스물한 살에 그 사람을 만났다. 우리 과 선배의 친구였다. 우연히 중간고사 기간 동안 함께 중앙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똑똑하고 여유로운 모습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함께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해서 밥도 먹고 술도 먹고 노래도 불러줬다. 집에 돌아와 달뜬 마음을 진정하려 창문을 열었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도 없이 집까지 돌아갈 그 사람이 걱정돼 전화를 걸었다. 집에 벌써 도착했다는 그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다. 쉼표가 많은 문장이었다. 더 빨리 표현하고 싶었는데 마음이 가빠서 자꾸만 숨이 찼다. 처음으로 누가 나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해서 사랑 앞에 용기 있게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밤이 늦었으니 내일 만나서 이야기 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정중한 거절인가 보다 하며 절망하는데도 잠은 오더라. 40분쯤 잤을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집 앞으로 나와보라고. 꽃 한 송이를 품에 넣은 그가 그곳에 있었다.







그는 '낭만적인 사랑의 정석'이라는 책에서 튀어나온 사람 같았다. 갑자기 길을 가다가 가방을 던지고 춥다며 나를 끌어안았고, 대학로에 연극을 보러 갔을 땐 가끔씩 불이 꺼질 때마다 뽀뽀를 해주었다. 너는 어느 별에서 왔느냐는 어디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이 할 법한 대사를 현실에서 들으니 그동안 눈물의 세월을 다 보상받는 것만 같았다. '이 사람이랑 결혼해야지.' 스물한 살의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7년을 기다려 드디어 세상에 나온 여름날 매미처럼 나는 왕성하게 그를 사랑했다. 그 사람이라는 나무에 붙어서 밤낮으로 크게 사랑을 울부짖었다. "나만 봐~~ 나만 봐~~"하고. 그 사람의 고막은 생각도 못 했던 스물한 살이었다.






기다린 시간에 비해 짧디 짧은 매미의 생처럼 내 사랑도 3개월 만에 파탄이 났다. 그 사람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느끼자 나는 눈물을 참지 못했고, 시시때때로 울다가 결국 차였다. 한 달을 매달려 보아도 이미 그는 나의 마음이 부담스러워질 데로 부담스러워진 상태였다. 내 감정에 취해 그 사람을 보지도 못했으면서 '그래서 그 둘은 영원히 행복했습니다.'로 이야기가 끝나길 바랐다. 내가 좋아하니까 너도 날 좋아해야지, 내 사랑을 받은 네가 감히 날 좋아하지 않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부정해봐도 남은 것은 술에 절여져 피클이 되어버린 간 뿐이었다. 열흘을 굶은 사람에게 이제 뜨끈한 밥을 매일 주겠다고 한 사람이 이제 다시 밥을 줄 수 없다고 하면 하늘은 무너진다. 로맨티시스트인 그 사람은 곧 따끈한 밥을 지어 또 다른 로맨스를 이어갔고, 나는 급하게 먹은 밥에 체해 오랫동안 아프고 아팠다.





스스로 밥을 지어먹을 수 없는 가난한 마음을 쥐고, 또 체할까 봐 무섭지만 너무 배가 고파서 남자의 사랑을 먹어치웠다. 그래서 내 20대 연애사는 틈도 없이 빼곡하지만, 내 허기를 메우느라 옆에 있는 사람을 착취하는 제국주의의 역사다. 나를 좋아해 줘서 만났고, 나를 처음처럼 좋아해 주지 않는 것 같으면 예전과 같은 상처를 또 받을 순 없기 때문에 내쪽에서 빠르게 손절했다. 만남도 욕망도 가득할 시기라 대체할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한 뼘만큼도 자라지 못하는 허기진 연애만 계속해서 되감기 했다. 특히 애인들이 자신의 불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싫었다. 언제나 그들은 산처럼 든든해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만 존재하길 바랐다. 애인을 '불안정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 내 불안을 위로해주고 사랑해주는 존재'로 정의하고 이중 잠금장치로 꽉 잠가버렸다. 그래서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애인에게 겉으로는 멋지다고 해주었지만, 함께 불안해져서 싫었다. 지나치게 솔직한 존재는 버거웠다. 나는 누군가를 알아가고 그 존재를 그대로 바라보려 하지 않고 내가 만든 애인을 찾고 있었다. 누구든 내 플러팅에 넘어오면 그 틀 안에 애인을 욱여넣었다.





그래서 애인들은 파랗게 질려서 떠났다.  





어떤 남자는 내게 선생님처럼 자꾸 가르친다며 떠났고, 왜 너는 너 먹고 싶은 것만 먹냐고 화를 내고 떠난 이도 있다. (미안) 그러다 서른이 넘어 기적처럼 피그말리온이 만든 조각상 같은 애인이 나타났는데, 봉사활동을 하다 만난 사람이었다. 오래간만에 좋은 일을 하러 가서 인지 좋은 사람을 보내주신 걸까. 그는 참 자상하고 귀여운 사람이었다. 날 만날 때마다 내 손에 자기 얼굴을 강아지처럼 비볐다. 정말 댕댕이처럼 조건 없는 한결같은 애정을 주었다. 갈팡질팡 늘 헷갈리는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겨주고 믿고 의지해주었다. 전에 나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왠지 안정감이 든다고 했다. 나로서 사는 게 나는 이토록 불안한데 이 사람은 어떻게 나에게서 그런 평안을 찾을까. 지금도 뒤를 돌아보면 그 사람이 손을 흔들고 있을 것만 같을 때가 있다. 내가 집에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집 앞에서 하염없이 손을 크게 흔들던 사람이라 자주 돌아보았었다. 그런 따뜻한 사랑을 받아 나도 좀 단단해 보였나 보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자기 때문에 단단해진 꽤 괜찮은 모습의 나를 보았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 나는 리코더가 갖고 싶었는데 하모니카를 사주시는 부모님에게 화가 난 어린아이처럼 어떤 것을 받아도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아서 잘 딱 깔끔하게 알아채지 못한다며 불만을 쌓아갔다. 마음이 너무 가난해서 무엇을 받아도 불만, 불만뿐이었다. 무엇이든 주려하는 그의 마음을 보지 못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모른다며 어리석은 사치를 부렸다. 그래서 헤어지자고 했고, 그는 우리 집 앞에서 헛구역질을 할 정도로 아파했다. 내 사랑이라고 먹은 것이 없어 헛구역질을 했으리라.








호강에 겨워 요강을 걷어차 버리는 내가 싫었다. 나도 스스로 따뜻한 밥을, 그러니까 사랑을 지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충분히 따뜻해서 다른 이의 짧은 온기에도 쉽게 반응하고 갈망하지 않도록. 그 찰나의 옅은 온기마저 사라졌을 때 절망하지 않도록. 그래서 누군가가 무엇을 주더라도, 그것이 리코더든 하모니카든 나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는데 받은 것이니 오로지 만족, 만족뿐이라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스스로 밥을 지어 보겠다고, 내 마음을 돌아봐주고, 내가 원하는 곳에 가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내 마음에도 사랑이 조금씩 고이기는 했나 보다. '왜 사랑받고 인정받으려고 하지?' 라며 책망하길 멈추고 '지금 사랑이, 인정이 받고 싶구나.' 하며 마음을 바라봐주었다. 누군가 생각을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생각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의 힘은 내게 필요한 생각만 머물게 할 것이라고. 어떤 감정이든 욕구든 판단하고 통제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았다. 마음을 데우는 군불이 조금씩 피어올랐다. 아직도 두렵지만, 잊고 지내던 연애세포의 안부를 물어본다.


"잘 지냈어? 이제 너 활동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상대의 다른 면을 계속해서 발견하고 탐구하고 찾아가면서 끊임없이 다른 존재로 드러나는 찬란한 그 사람을 매일 조금씩 더 사랑하고 싶다. 내 상상 속에만 있는 틀 안에 그 사람을 욱여넣지 않고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그 존재를 구석구석 사랑해주리라. 더 이상 사랑을 하다 사랑을 잃게 되는 것이 두렵다며 바보짓 안 할 테니 (노력할 테니) 내 마음속 소프트웨어 개발자에게 답한다.








그 업데이트 안 할래.
내 연애세포랑 플러팅 기능 정상화시켜줘.
방어기제 그거는 좀 없애주고.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 돌아왔다.










사진 taijidol@instagr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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