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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유록 Apr 08. 2022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있이

색채심리상담을 받았다

 남해에서 지내고 있는 셰어하우스에 심리상담을 공부하신 분들이 오셨다. 우리 셰어하우스가 게스트하우스로 운영될 때 오셨다가 좋았던 기억을 가득 안고 가신 분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 새로 사업체를 오픈하시고 워크숍 겸 여행 겸 해서 남해를 다시 찾고 싶었는데 가장 먼저 떠오른 공간이 우리 셰어하우스였다고. 같이 사는 에이아이(하우스메이트다)는 예전에 오셨을 때 그분들이 색채심리상담을 간단하게 해 주셨는데 너무 정확해서 깜짝 놀랐었다고 했다. 무슨 점쟁이를 묘사하듯 아주 용하다며 엄지를 추켜세우니 기대를 또 안 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나 자신보다 알다가도 모르겠고, 관심이 가는 것이 또 있을까. 나로 삼십 년 넘게 살아왔지만 나로 사는 것이 아직도 서툰 나는 언제나 심리 상담에 관심이 많다. 오은영 박사님은 내게 거의 신적인 존재로 박사님이 나오시는 방송은 꼭 챙겨 보고 있다.




밝은 표정의 두 여자분이 도착했다. 친구들은 나가고 없어 혼자 그분들을 맞았다. 전날에 에이아이가 만들어둔 프랑스식 가정요리 포테를 대접해 점수를 좀 얻은 것 같았다.(고맙다 에이아이) 함께 맥주를 마시며 인사를 나누다 보니 전공이며 관심사며 비슷한 것이 너무 많아서 내적 친밀감이 또 빠르게 상승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사람의 세계는 어떤 곳인지 빠르게 놀러 가서 그 사람의 세상을 구석구석 둘러보고 싶다. 위아 더 월드!





 물개처럼 박수를 치고 소름을 연신 외치며 너무너무 비슷한 점이 많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공감대를 양껏 쌓아 올린 식사 뒤 조심스럽게 예전에 에이아이가 선생님들께 색채 심리 상담을 받고 엄청 좋았다는 이야기를 하더라는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업으로 하시는 일을 사적으로 부탁드리는 것이 맞는 것인지 게다가 놀러 오신 것이니 더욱 조심스러웠다. 투명한 눈(두 분 중 한 분이다) 께서는 해보고 싶으시냐며 흔쾌히 감정 컬러 상담 용지를 출력하셨다. 프린터기를 빠져나온 하얀 종이에는 기분 좋을 때, 기분 나쁠 때, 일이 잘 풀릴 때, 엄마를 떠올리면 등 다양한 경우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색을 칠해야 하는 빈칸이 가득했다.   



"마음대로, 하고 싶은 방식으로 색칠하시면 돼요."




 각 경우마다 아래로 3칸이 줄지어 있었다. 3칸씩 다 칠해도 되고 모든 것은 내 선택이었다. 72색 색연필을 꺼내 들고 처음부터 칠하기 시작했다. 기분 좋을 때는 연어 색깔을 꽉꽉 채워 칠하고, 나쁠 때는 회색을 칠하고. 나란 인간은 너무 전형적인가. 정해진 칸에 꽉 맞게 다 칠할 필요는 없는데 내가 너무 꽉꽉 채워서 칠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모양을 만들어 칠하기도 했다. 어떤가 나를 알 수 있겠는가. 의심은 많지만 인생이 답답해 점집에 온 사람처럼 '이래도 맞춘다면 인정해주겠어.'라는 이상한 호기를 은근히 마음에 품고 색을 칠해 나갔다. 투명한 눈은 그저 묵묵히 바라보셨다. 다했다고 하니 왜 그렇게 칠했는지 이야기해달라고 하셨다. 아, 이것은 심리상담이지. 내 이야기를 먼저 하는 곳. 심리 상담에 대한 인식이 한참이나 뒤쳐지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각각의 경우마다 왜 그 색을 칠했고, 왜 그런 모양으로 칠했는지 기억이 나는 데까지 열심히 말씀드렸다. 화가 날 때는 속에선 화가 나더라도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멋지다고 생각해 중심부는 빨갛게 칠한 뒤 그것을 진한 파란색을 둘러쌌다고. 그리고 내게 지금 필요한 색은 호수나 깊은 바다처럼 아주 아주 지인한 파란 색인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이밖에도 행복할 때 떠오른 색, 우울할 때 떠오른 색 등 왜 그렇게 색칠했는지 하나하나 말씀드렸다. 투명한 눈은 한참 동안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셨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투명한 눈은 조심스럽게 말을 시작하셨다. 그림에 나타난 내 전반적인 성향과 부모님과의 관계, 특징적인 부분에 대해서 따뜻한 목소리로 짚어주셨다. 나의 특징은 부정적인 감정을 잘 표현할 줄 모른다는 것. 화가 날 때를 묘사한 파란색으로 감싼 붉은색 칸을 가리키시며 화가 났을 때 이렇게 감정을 누르면 아프다고, 부정적인 감정을 누르려하는 성향에 대해 걱정을 표하셨다. 예전에 재미로 했던 그림 심리에서도 가족을 그릴 때 얼굴에 코를 그리지 않았다. 코를 그리지 않는 것은 분노를 나타내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했다. 분노가 수용되지 않는 양육된 사람의 그림에서 코가 없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난다고. 최근에 오은영 박사님의 방송을 보면서도 내가 부정적인 감정 표현에 굉장히 서툴다는 것을 깨달았었는데, 이것이 색깔 표현에서도 드러나는구나. 맞아요! 맞아요! 를 외치는 모양이 꼭 점집에 온 사람 같기도 했다. 어느새 돌아와 지켜보던 에이아이는 거봐 용하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용한 상담사분은 더 깊이 나를 이해하시기 위해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셨다. 나는 사정없이 무너졌다. 공감과 정서적 지지가 필요한 나에겐 어려웠던 두 분. 나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강하게 키우기 위해서 내가 약해질 때 내 감정을 받아주지 않으셨다. 이제는 왜 그러셨는지 이해하지만 어린 당시에 맺혔던 섭섭한 마음은 마음속 깊숙이 숨어 있었다. 개학 전날 산처럼 쌓인 밀린 일기처럼. 투명한 눈은 미워하고 속상해하는 마음은 나쁜 것도 아니고 약한 것도 아니라고 말씀해주셨다. 내가 미워할 만하니까 미운 마음이 생겼던 것이고, 속상할 만하니까 속상했던 거라고. 자연스러운 마음이라고.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고.



'하지만 내가 정말 부모님을 미워하는 마음을 잠시라도 품어도 될까요. 너무 사랑하고 나를 위해 한평생 희생해주셨는데...'

 



 부모님의 인생 성적표는 나와 언니였다. 없는 살림에 우리 둘을 먹이고 입히고 번듯하게 가르치셨다. 부모님의 노동을 먹고 우리는 무럭무럭 자랐다. 사실 마음을 나눌 틈이 없었다. 나이를 먹으며 부모님을 이해하는 폭은 넓어졌지만 어릴 때부터 조금씩 쌓여간 서운한 감정은 묻어두기만 해서 화석처럼 쌓여 있었다. 그런 마음을 품는 것 자체가 죄스러워서 제때 청소하지 못한 감정들이었다. 투명한 눈은 부정적인 감정에는 무조건 죄의식을 느끼며 누르려고만 하는 습관을 바꿔나가는 것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하는 열쇠라고 알려주셨다. 그렇게 누르면 펑 터져버릴 수 있다고. 즐겁고 신나는 감정처럼 화나고 미워하는 감정도 자연스러운 것이니 쌓아두지만 말고 잘 표현하는 연습을 하자고 하셨다. 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를 거부해서 어떤 감정인지도 잘 모르기 때문에 안 좋은 감정이 느껴지면 잠시 멈추고 그 상황에서 나온 뒤 어떤 감정이었는지 돌이켜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우울감이었구나, 분노였구나, 질투심이었구나.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고 그런 마음이 드는 자신을 인정해주는 것. 그럴만했다고 그래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자기 사랑의 시작이라고.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이고 내 마음의 어두운 부분을 부정하기만 하면 온전히 자신을 사랑할 수 없으니까.





 구렁이처럼 똘똘 몸을 틀고 감겨있던 묵은 감정들이 스르르 몸을 틀었다. 너도 인정해줄게. 그래 그럴만했어.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내 마음을 부정할 수는 없어. 고3 때부터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던 소화불량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해방감. 내 장기를 다 꺼내어 깨끗이 씻어 다시 넣은 느낌이었다.







행복할 때를 표현한 색은 중심부는 노란색으로 칠하고 그 주변을 초록색으로 둘렀다. 그런데 나를 떠올릴 때 떠오르는 색이 노란색이었고, 편안할 때를 떠올리며 칠한 색이 초록색이었다. 일부러 생각을 하고 칠한 색이 아닌데, 다 칠하고 전체를 보니 일관성이 있어 신기할 따름이었다. 내가 가장 행복할 때는 편안한 상태에서 나를 자유롭게 표현할 때라고 각 경우의 공통점을 찾아 이번엔 정말 용한 점쟁이처럼 알려주셨다.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했던 나는 배시시 웃으며 맞네요.. 맞네요.. 를 또 연발했다. 그럼 나는 맞는 방향으로 왔구나. 좋아하는 남해에서 글로 나를 표현하고 있으니.




안도했다.




투명한 눈은 나를 꼭 안아주었다. 온전한 내 모습으로 진정한 행복을 느끼길 바란다며. 응원한다는 편지도 예쁘게 적어주셨다. 투명한 눈과 귀여운 고양이(다른 한분이다)와는 다음날 하루를 같이 여행하며 남해 이곳저곳을 돌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남해 바다가 눈이 부시다 못해 시렸다. 마음을 나누고 나니 함께 보낸 물리적 시간을 뛰어넘어 더 귀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두 분이 떠날 땐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아니 사실 펑펑 울었다. 너무 감사해서. 인생의 각도를 틀어주셔서.





목적지는 완전히 다른 곳이 될 것 같다.





노란색과 초록색이 가득한 곳.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도

백만 송이 꽃은 핀다.





남해는 유채가 한창입니다. 놀러오세요. 사진은 남해 두모마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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