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힘든 당신에게
남해에 내려와서 첫 비가 내린 날, 남해 청년단체 중 한 곳의 대표님이 셰어하우스를 찾으셨다. 한창 남해에서 여러 가지 공간을 만들고 있는 중이신데 공사 특성상 비가 오면 할 수 없기 때문에 저녁을 드시러 오시라고 꼬셔보았다. 작년에 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눈 경험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아서 남해에 다시 내려온 뒤 꼭 한번 뵙고 싶었다. 여러 경험을 통해 원하는 것을 찾고 실천해나가는 속이 단단한 분 같았다. 대표님은 미끼를 덥석 물고 저녁을 드시러 오시기로 했다. 셰어하우스 친구들과도 인연이 있으셔서 흔쾌히 번개에 동참하신 듯했다. 우린 삼천포에서 회를 떠 오고 가리비와 피자까지 준비해 귀한 손님을 맞았다.
대표님은 소유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다. 사랑하는 남해가 사라지지 않기 위해 청년을 위한 주거 공간을 많이 만들고 싶으시다고. 청년들이 자기 공간을 소유할 수 있도록 돕고 싶으신 것 같았다. 어떤 집을 소유하고 싶으냐고 물으셨다. 어떤 집을.. 소유? 서울에서는 예산에 맞춰 제일 괜찮은 집을 빌리는 것이 국룰인데. 되도록 월세가 아닌 전세로. 그래서 내 마음에 쏙 드는 집을 소유하는 것은 먼 나라 이웃나라처럼 가깝고도 멀게만 느껴졌다. 땅처럼 웃으시던 대표님은 이제 한번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지역에서는 열심히 노력하면 가능한 일이니까.
대표님이 떠나신 후 횟집에서 서비스로 주신 멍게를 발견해 소주를 깠 아니 열었다. 멍게는 핑계고 소유에 대해 생각하니 속이 쓰려서! 벌써 삼십 대 후반인데 소유가 없어! 시드머니도 없어! 망했어! 같이 사는 친구들을 불러 지금 아무도 읽지 않을지도 모를 글을 쓸 때가 아니라 얼른 일을 해서 돈을 모아야겠다며 긴급 가족회의를 시작했다. 하지만 글을 쓰고 창작이 하고 싶어서 남해로 내려왔는데 이렇게 금방 다시 예전에 하던 일로 돌아가기엔 왠지 억울했다.
"우리 나이(30대 후반임)에 새로운 것을 시작해서 돈을 버는 단계로까지 가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 잘하는 것에 하고 싶은 것을 더해보는 건 어떨까?"
전략가인 에이아이는(하우스메이트다) 지혜를 나누었다. 그래, 그럼 전공인 영어를 활용해 창작을 하자. 영어에 관한 전자책도 쓰고 유튜브도 하고 아이들도 가르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거야!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전공인 영어로 남해에서 돈을 벌 구상을 해보았다. 계획은 완벽해 보였다. 그래 이제 실천뿐이야! 돈을 눈덩이처럼 벌겠어! 욕망이 불꽃처럼 일렁였다. 이제 실행만 하면 되는데...
자꾸만 다른 일로 도망쳤다. 완벽한 계획을 무시하고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바글바글 볶았다. 남해에서 만난 친구들과 모여 떠들고 놀았다. 다음날 (또!) 다른 친구와 독일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나는 안 되겠다며 나도 돈을 열심히 벌면서 시드머니도 모으고 집도 사야 할 것 같은데 자꾸 도망친다며 하소연했다. 이거 봐 지금도 이렇게 놀고만 있잖아! 나는 망했어! 그 친구는 좋아하는 음악을 오래도록 하고 남해에 내려와 즐겁게 놀다가 이제는 남해 지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카페도 운영하고 공연도 하고 멋지기만 친구였다. 친구는 말했다.
"나는 작년에 아무것도 안 하고 놀기만 해서 올해는 일만 하려고. 올해는 공연을 슬슬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창작은 안 하고 카페일이랑 공연만 하려고. 표현만."
"어떻게 그렇게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취사선택할 수 있어! 난 그게 잘 안돼!!! 다 하고 싶어."
"음... 20대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이랑 나를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많이 괴롭게 했던 것 같아. 그러면서 발전도 했지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거든. 더 잘하고 싶어서 노력하다가 어느 순간 포기해야 하는 지점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렇구나.. 멋지다... 나는 다른 사람이랑 나를 잘 비교하지 않았던 것 같아. 나보다 무언갈 잘하는 사람을 보면 멋지다. 배워야겠다. 저런 사람이랑 일해서 좋다. 어떻게 저렇게 잘하지? 이런 생각들이 들어. 그래서 그런지 포기하는 지점도 거의 없었던 것 같아. 같이 하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잠잠히 듣던 친구는 답했다.
"나는 계속 이렇게 나처럼 살 수 있을 것 같거든, 내 생각엔 너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너대로 너처럼 계속 살 수 있을 것 같아. 멀리서 보면 너나 나나 다 삼십 대 중후반에 남해로 내려온 사람들이야. 오십 보 백보. 거기서 거기. 그 안에서 너무 달라지려고 네가 아닌 사람이 되려고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너는 계속 너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멀리서 보면 우리 모두 우주의 먼지 뭐 그런 거야? 근데.. 오빠가 보기에 나 다운 건 뭐야?"
나 다운 것이라는 것. 나는 나로만 살아서 가끔은 잘 모르겠는 그것. 이래서 친구가 필요한 건가 보다.
"계속 새로운 것을 하고 싶어 하는 거. 사람들의 영향도 많이 받고, 뭐든 하려고 하고 배우려고 하고. 넌 계속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네가 사람들을 만나서 영향을 받고 깨닫고 그러는 게 참 신기한 것 같아. 나는 잘 안 그렇거든."
창작을 하고 싶었지만 두려웠던 나는 자주 안정적인 일로 도피하곤 했다. 하지만 늘 새로운 것을 배우고 새로운 곳에 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며 새로운 것을 느끼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늦게나마 여러 시도를 하며 첫 번째 도미노를 이리저리 세워보았다. 다른 방향으로 보고 있는 첫 번째 도미노만 가득하니 매번 힘에 부치고 여러 도미노를 촤르르르 쓰러뜨리는 보람도 느끼지 못한다. 그래도 이제 여러 첫 번째 도미노가 쌓인 작은 마을? 정도는 생겨서 우리 '마을 신기하죠?' 저 진짜 이상해요.' 하면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소유보다 경험이 우선이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글을 쓰고 싶다. 실패는 부끄러워도 실패를 도전한 것은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고 정지음 작가는 책 '젊은 ADHD의 슬픔'에서 말했다. 이제 새로운 일을 하는 데 주저함도 없고 새로운 일을 하면서 깨닫는 것도 오늘 다르고 내일 또 다르다. 사람은 또 어찌나 좋아하는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매력에 정신을 못 차리며 좋아하고 영향을 받는다. 지금도 남해 한 달 살이 때 만났던 친구의 게스트하우스에서 하우스메이트로 지내며 꿈꾸던 삶을 경험하고 있고, 파리에서도 현지인의 집에서 3개월 간 지내며 인생 최고의 경험을 했다. 어디서든 친구를 만들어 그들과 삶을 공유해나가는 것이 좋다. 하지만 파리에서 홈스테이를 할 때도 현재 남해에서 셰어를 하면서도 집주인인 친구가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하는 신세인 것은 사실이다. (돈은 당연히 지불하고 있다. 친구야 그러지 마.)
남해의 주거비용은 서울의 말도 안 되게 치솟은 그것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꿈꿔볼 수 있는 금액이다. 빈손으로 내려와도 몇 년 간 열심히 돈을 모으면 집 한 채 소유할 꿈을 꿀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맞아. 그런 곳에 내가 지금 있지. 그것도 행복하게. 그런 대안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가능해 보이는 계획 앞에 서면 덜 작아져서 좋으니까. 나오는 것은 먼지뿐인 주머니 사정에도 소유를 꿈꿔볼 수 있는 곳. 그런 곳에 와 있다. 좋아하는 일에 잘할 수 있는 일을 더해 열심히 돈을 벌어 내 공간을 마련할 엄두가 나는 곳.
하지만 지금은 좀 더 짐을 줄이기로 했다. 가벼운 몸으로 더 다양한 것을 경험하고 더 많은 사람과 생각을 나누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지금의 '나대로' 살기로. 선입견이 별로 없고 스펀지처럼 환경을 빨아들이는 내 모습으로 남해를 빨아들이기로. 지금은 좋아하는 글을 쓰며 이야기를 소유한 사람이 먼저 되기로. 작년에 열심히 일한 덕분에 친구들과 서로 가진 것을 나누고 함께 경험하며 충만해질 수 있으니까. 대신 순간을 흘려보내지 않고 더 열심히 글로 집을 짓기로 했다.
내 경험을 이렇게 글로 남겨 여러 이유로 시작 앞에서 주저하거나 여건상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들려줘야지. 첫 번째 도미노만 쌓은 좀 특이한 사람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첫 번째 도미노 쌓기를 도와줄 수 있도록! 혹은 한 길로 쭈욱 도미노를 쌓아온 사람들에게 오만방자한 삽질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줄 수 있도록!
오늘도 삽질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