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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유록 Apr 11. 2022

내 나이 서른일곱, 시급제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내 동료는 스물한 살

우리 집 에이아이(하우스메이트 1)는 영화감독 출신이다. 남해로 내려와서 청년단체를 만들고 남해에 청년들이 더 드나들 수 있도록 나아가 정착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다. 나도 2020년에 에이아이가 만든 단체가 기획한 한 달 살기 프로그램에 지원해 남해 땅을 처음 밟았다. 지금은 문화기획자로 활동하고 있지만, 종합예술인 영화를 만들던 사람이라 그런지 많은 변수에 대해서 생각하고 판을 잘 짠다. 사람이 참 건조해 보이지만, 유기묘를 거두어 십 년 넘게 키우는 의외성이 있는 친구다. 무언갈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인스타그램 인기 게시물을 보고 있을 때가 많으니 속지는 말자. 에이아이에게 물었다.




"에이아이, 니 생각엔 거장의 다른 점은 뭐인 것 같아? 대단한 감독들 있잖아, 그분들은 뭐가 다른 것 같아?"




에이아이는 뚜룻뚜룻 데이터를 돌려 답을 찾았다.



응, 거장들은 서사를 차곡차곡 쌓아가지.
한 번에 보여주려고 하지 않아.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독이 만든
세계에 빠져버리는 거야.
설령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세계일지라도,
그 쌓아간 서사가
너무나 디테일하기 때문이지.






*아래 문단에 약간의 영화 '색, 계'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색, 계'에서는 같은 장면이 두 번 반복된다. 왕치아즈(탕웨이 분)가 카페에서 전화를 받는 장면이 영화 첫 도입부에 한 번, 영화 후반부에서 또 한 번. 처음 그 장면을 볼 때 우리는 왕치아즈가 누군지, 어떤 인물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시선은 허공을 향하고 있다. 그가 조금 긴장한 것 같기도 하고 얼이 빠진 것 같기도 하다. 그저 잠시 딴생각을 하며 오빠와 통화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그리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없다. 이제 이안 감독은 차곡차곡 서사를 쌓아 올린다. 그리고는 관객을 같은 장면으로 다시 한번 초대한다. 이제 우리는 왕치아즈를 알고, 그가 어떤 마음인지 짐작할 수 있다. 욕망인지 사랑인지 모를 상대(양조위 분)를 죽음으로 이르게 하려고 하는 중이다. 3년 간이나 죽이려고 했던 상대였는데 왕치아즈는 망설인다. 우리는 그가 왜 망설이는지도 이제 알고 있다. 감독이 쌓아 올린 디테일을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처럼 따라가며 왕치아즈의 감정이 사랑일지 욕망 일지 함께 고민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당초 그 사이의 경계를 나눌 수 있을까? 관객들은 의문을 품는다. 그렇게 이 영화의 메시지가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같은 장면을 보지만 처음과는 전혀 다른 감정을 품게 되는 영화적인 경험과 함께. 감독은 이렇게 승리를 쟁취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색,계 스틸컷








남해에 내려온   달이 지났고, 주말마다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카페를 차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서른일곱이란 나이에 시간당 임금을 받으며 커피를 내리기로 했다. 출근을 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화장실 청소다.  동료는 스물한 살이다. 화장실을 청소를 하면 덕을 쌓는 것이라며 정신승리를 했지만, 스물한  동료가 설거지는 쌓아두지 말고 그때그때 해야 한다고 했을 때는 당장 앞치마를 벗고 나가고 싶었다.  마인드가 세월과 함께 덕지덕지 묻은 건지 '경험이 많아도 내가 훨씬 많아, 내가  생각하면서 하고 있어.'라는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것이다. 이런 생각 자체가 부끄러웠다.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서른이 넘어 하는 것은 생각보다  스스로에게 부끄러울 일을 많이 만든다. 서른이 넘었다고 모두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릴   장래희망이 시간제 카페 아르바이트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사를 차근차근 쌓아 올리지 못했고, 변신로봇이 되길 꿈꾼 것이 사실이다.  가지 주문만 외우면  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알았던 순진하고 안일했던 나는 다시 시간여행이라도   이십  초반에 하던 일을 다시 하고 있다.  인생에도 영화 '색계'에서처럼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었고,  감정과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 비록  인생은 편집이 안되어서 10년이 넘는 세월이 롱테이크(편집 없이 하나의 숏트를 길게 촬영하는 ) 지나갔지만.







기억나는 순간부터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렸다. 초등학생 때부터는 일기장에 시를 썼다. 창작을 하고 싶은 마음은 이렇게 오래전부터 신호를 보냈는데, 늘 내가 보내는 답신은 '안정'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자, 좋은 대학에 들어가자,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자, 먼저 돈부터 벌자. 그러는 동안 예술작품을 보면 꼭 질투가 따라붙었다. 질투는 억눌린 욕망의 다른 얼굴이다. 그래도 먼저 경제적으로 안정되길 바랐다. 안정이 되고 나면, 그때부터는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을 거야. 다른 사람 눈에도 번듯하게 살면서 하고 싶은 것도 하는 삶으로 펑하고 변할 거야. 공수표를 날리며 마음에 빚을 졌다.






20대 때 카페 알바를 하던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나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았다. 청춘의 도전은 아름다우니까, 하지만 자주 슬펐다. 창작을 하며 먹고살고 싶은 나의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너무 컸는데 감정을 다룰 줄 몰라서 감정을 받아들이고 그 간극을 메우기보다는 회피했다. 지금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에게도 부끄러울 때가 많지만 슬프지는 않다. 부끄럽고 더럽고 치사하고 괴로울 때도 있지만 예전처럼 우울하지 않다. 간극을 메우기 위해 이렇게 글을 쓸 시간과 에너지가 있으니까. 애초에 회사를 다니며 병행하려 했지만 어려웠고, 재택근무로 전공인 영어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글을 쓰려고 시도해봤지만, 정신노동인 글을 매일 쓰면서 또 언어와 관련된 일을 못하겠더라. 창작자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싶지만, 그런 일을 기획하고 꾸며나갈 에너지가 현재로선 없다. 뭐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을 것처럼 그럴싸하게 말했지만, 결국엔 못한다, 둘 다 할 능력이 없다. 그래도 남해에 새로 생긴 복합 문화공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으로 나름 절충안을 찾았다.




 꾸준히 운동도 하고 마음도 솔직하게 들여다보며 글을 쓰다 슬슬 에너지가 붙으면 또 다른 퀘스트를 깰 수 있겠지. 지금 나는 이 방법 말고는 모르겠고 이것밖에 못하겠다! 그러니 '나는 이것보다는 더 그럴싸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데...'라는 오만방자함을 잘 다루며 설거지도 제때제때 하려고 하고, 화장실 청소도 깨끗하게 한다.








매일 한 편씩 차곡차곡 글을 쓰며 창작자로서 서사를 쌓아가고 있다. 거장들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지는 못하더라도 나 자신에게라도 진한 울림을 줄 수 있는 삶을 살려면, 지금 차곡차곡 글을 쓰면서 스스로에게 솔직해져야 한다. 예전 내 삶은 거장의 그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고, 거의 전래동화에 가까웠다. '갑자기 그게 된다고? 갑자기 그걸 못 하겠다고?' 식의, 말도 안 되는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를 오갔다.





 글이나 창작물로 당장 수입을 벌어들이지 못할 확률이 높고 애당초 써 놓은 것도 없으니 글을 써야 한다. 글을 쓰며 병행할 능력이 있는 일은 현재 카페 알바뿐이니 이 일을 하면서 그에 맞게 생활을 영위하려 한다. 내가 확실히 믿는 것은 먹고사는 일은 숭고한 일이고, 일할 수 있으면 일해야 한다는 것이니. 능력과 주제에 맞게. 그래서 이번 주말에도 아르바이트를 한다.(손목이 좀 덜 아픈 일을 하고 싶긴 하다.) 남해는 인력이 부족해 이렇게 삼십 대 후반도 아르바이트로 써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가끔 서럽고 초라해져도 느끼는 감정들을 하나하나 붙잡아 소중히 받아 적어 글이 되길 바라는 수밖에. 글을 쓰면 어떤 경험도 다 글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힘들어도 야릇한 쾌감이 느껴진다. (이렇게 콘셉트가 나를 집어삼키게 되는 것일까!)






남해에 내려와 한 달 동안 지난 4년 간 써왔던 일기장을 들추어 보았다. 이것저것이 되어보려고 아등바등했던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을 써서 교집합을 찾기도 했다. 좋아하는 일로 먹고살 수 있는 좋아하는 일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내가 어디에 서 있는 지를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목적지를 바라보며 저쯤이면 갈 수도 있겠는데 난 왜 못 가고 있지? 하며 괴로워했다. 실제로 주변에서 너는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고, 재주가 많다는 이야기를 해주니 뭔가 더 억울했다. 가끔 보이는 재주가 능력치가 아니라 그것을 실현해내는 실행력, 지속하는 끈기, 체력 등 오만가지를 더하고 빼야 하는데 그런 것들을 스을쩍 뒤로 빼놓고 언뜻 비치는 재주만 손으로 세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서 있는 지점이 지금보다는 훨씬 내 이상향에 가까운 줄 착각하며 살았던 것이지. 지금 내 지점은 하루에 브런치에 글 한 편씩 쓸 수 있는 창의력과 지구력, 주말엔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고 돌아와도 글을 쓸 수 있는 체력, 딱 그 지점이다. 지금 나는 한 여름 차가운 물로 하는 세수처럼 시원하고 명쾌하다.






은지와 서윤은 여학생들의
아기자기한 배려보다는
서로에게 건네는 다정한 하대와
면박을 좋아했다.
그리고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본인들이 또래보다 똑똑하다 자부했다.
그 나이대 젊은이가 자주 하는 오해 중 하나.
혹은 대부분의 인간이 죽을 때까지 하는
착각 중 하나를
그들도 하고 있는 셈이었다.
- 김애란, <비행운> 중







 명쾌해질 때마다 김애란 작가님의 글귀를 마음에 새긴다. 인간은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제일 잘 속이는 존재이고, 내가 지금 좀 깨달은 것 같다는 생각은 거의 99% 착각임을 잊을 뻔했다. 너무나도 쉽게 붕붕 뜨는 두 다리를 굳건히 땅에 붙이고, 엉덩이도 딱 붙이고 한 글자씩 쓰는 것이다. 진짜 자신이 무지한 것을 알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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