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에이아이(하우스메이트 1)가 식단 조절을 시작할 것이라며 닭가슴살과 각종 야채 등을 장바구니에 담아왔다.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라며 메리골드(하우스메이트 2)와 나는 환호했는데 (가스 라이팅인가) 우리 모두 다 같이 하루에 한 끼라도 건강하게 균형 잡힌 식사를 해보자며 에이아이와 의기투합했다. 그런데 에이아이가 갑자기 머리 털나고 처음 보는 물건을 찬장에서 주섬 주섬 꺼내는 것이다.
"저건 또 뭐야, 에이아이?" (이런 일이 많았음.)
"응~ 닭가슴 수비드(밀폐된 비닐봉지에 담긴 음식물을 미지근한 물속에 오랫동안 데우는 조리법, 위키백과) 하는 기계야."
에이아이는 '인생은 장비빨'을 주창하는 맥시멀 리스트이다. 번거로운 일을 최대한 줄이며 인생을 편안하고 즐겁게 살아가고자 하는 게으른 듯 보이지만 상당히 부지런한 편이다. 하지만 수비드 기계까지 일반 가정에 있다고? 그와 같이 지낸 지 50여 일이 흘렀는데 아직도 놀랄 것이 남았다니... 양파 같은 에이아이 같으니.
"너는 정말 뭐든지 제대로 하는구나."
진심으로 존경을 섞어 말했다. 나는 오히려 불편한 것을 참고 지내는 편에 가까웠다. 새로운 물건을 사기보다는 있는 것을 활용해서 최대한 버티려고 하는 편인데 그런 나의 눈에 에이아이의 라이프스타일은 매우 신선했다. 일단 이곳 거실 벽 사방엔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다. 이 스피커로 거의 하루 종일 잔잔한 재즈음악을 틀어 둔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했던 에이아이의 경험에 따르면 완전한 적막 상태일 때보다 잔잔한 음악 같은 적절한 소음이 섞여 있을 때 타인의 소음이 서로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다고 한다. 음악을 즐기긴 하지만 이렇게 하루 종일 음악을 공기처럼 틀어두며 생활하는 것은 처음이라 소리가 방해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지금까지는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우리끼리 치고받고 싸우지 않은 것을 보면 이 재즈음악 백색소음이 효과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밖에도 한쪽 벽을 밝히는 빨갛고 파란 조명(공연을 할지도 몰라 설치했다는데 실제로 사람들이 와서 공연도 했다.) 등 오만가지 희한한 장비들이 다 있는데, 마치 도라에몽 앞 주머니 같은 공간이다.
수비드 기계에 닭가슴살을 넣어두고 에이아이는 영상을 보고 있었다. 무엇을 보느냐고 메리골드가 물었다.
"응~ 캠핑 갔을 때 텐트를 다 설치해 두고 나서 심심한 이유는 그때 할 것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더라고. 그래서 이때 훈제육을 준비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어떻게 하는지 찾아보고 있어."
'재미..'
거실에서 들려오는 에이아이와 메리골드의 대화를 들으며 에이아이와 내가 왜 다른 소비관과 라이프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었다. 에이아이는 장기적으로 자신을 더 재미있게 하는 방법을 미리 골몰하며 살아가는 사람이고, 나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감내하고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편에 가깝다. 다가오는 인생을 온몸으로 맞으며 러키박스를 열어보듯 순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안에 재미가 있다면 즐겼고 '노잼, 꽝'이 나오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며 다음 기회를 노렸다. 한편 에이아이는 어떤 일을 하는 과정이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한데, 예를 들어 일을 할 때도 에이아이는 그 일을 하는 활동 자체도 즐겁도록 시스템과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니 집에 그 뭐야, 영화에서 천재들이 막 유리창에 뭘 매직으로 쓰듯이 쓸 수 있는 투명 칠판까지 있는 거겠지... 최대한 일상을 편리하고 재미있게 편성하고 그 과정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이 있다면 마음 편하게 구매하는 것이다. 가치를 교환할 줄 아는 똑똑한 에이아이는 겉보기엔 굉장히 무미건조해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열심히 시스템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었다. '캠핑 가서 심심해지면 훈제육을 만들자.'와 같은 시스템을 일상 곳곳에 만들면서 말이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사면서 말이다. 예전에 즐겨보던 미드 '빅뱅이론'의 주인공 캐릭터 '쉘던'이 떠올랐다. MIT 박사인 그는 겉으로 보기엔 늘 비슷한 하루하루를 사는 것처럼 보여도 그의 일상엔 규칙적인 자신만의 즐거움이 있었다. 어떤 요일은 매주 비디오를 빌려 보며 무비 나잇을 즐기고 어떤 요일은 피자를 사다 피자 나잇을 즐기는 식이다. 좋아하는 만화책 신권이 나오면 줄을 서서 사던 쉘던. 자신이 만든 시스템 안에서 쉘던을 평화롭고 행복했다.
어린 시절 바쁜 엄마는 작은 항아리에 돈을 넣어두고 일하러 나가시곤 했다. 언니와 나는 돈이 필요하면 돈 항아리에서 돈을 꺼내 필요한 학교 준비물을 샀다. 그래서인지 생활을 계획성 있게 운영하는 습관을 만들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한평생 자영업을 하시던 부모님의 수입은 들쑥날쑥해서 우리 가족은 돈이 있어도 아꼈고, 없어도 아꼈다. 밤마다 지친 엄마의 앞치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 함께 세었다. 돈이 많은 날은 기뻐했고, 돈이 없는 날은 속상해하던 기억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돈을 세느라 꼬릿한 향이 나는 작은 손들에게 돈이란 엄마의 엄청난 희생이고 사랑이었다. 그런 돈을 감히 쓸 수 없어서 우리는 추우면 보일러를 켜기보단 옷을 껴입었고, 방을 나설 때마다 전등불은 어김없이 탁탁 껐다. 우리 가족은 한 팀이 되어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려고 노력했다. 돈은 우리에게 가치를 교환하는 수단이라기보다는 덮어놓고 아껴야 하는 것에 가까웠다.
요즘 매일같이 글을 쓰지만, 하루에 몇 시간 동안 쓸지 어떻게 쓸 것인지와 같이 이 과정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다. '하루에 한 편은 쓰자.'라는 타이트하면서도 러프한 계획을 세워놓고 하루 종일 글만 쓰는 날도 많았다. 오히려 나는 여러 가지 변주 속에서 즐겁게 사는 듯 보이지만 일상 자체를 즐기기보다는 그때그때 일을 해치우면서 결과를 얻으려고 하는 편에 가까웠다. 하루 온종일 앉아서 허리가 아프도록 글을 쓴 날일지라도 한 편 썼으면 되었다며 그저 다음날로 넘어가버렸다. '과정이 어떻더라도 한 편 썼으니까'하는 식이었다. 이 순간들은 한 편의 책을 펴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인생은 진행형인데 왜 자꾸 완료형으로 살려고 하는 걸까. 글을 쓰는 과정이 재미있긴 하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은 늘 따라다녔다. '이 정도 하면 되는 것인가? 어느 정도 와있는 것일까?' 막연해서 그저 쓰고 또 썼다. 남해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그렇게 흘러갔다. 성취하고 싶은 결과만을 위해서 모래알 같이 수많은 순간들을 손바닥에서 흘려버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는 과정의 즐거움을 잘근잘근 꼭꼭 씹어 느끼고, 한 편을 다 못 쓰더라도 정해진 시간만큼만 쓰기로 했다. 다른 책을 읽어보며 내 식대로 필사하는 시간도 꾸준히 갖고, 지난 글을 다시 읽어보며 마음에 드는 문장을 골라 인스타그램에도 공유하자 마음먹었다. 남해에서의 일상도 더 신나게 즐기면서 말이다. 에이아이의 '훈제육 만들기' 계획에서 영감을 받아 일상을 더 재미있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하니 남해바다 갯벌의 조개 숨구멍처럼 수많은 재미 구멍이 하나둘씩 드러났다. '실내가 아닌 옥상에서 새소리 들으며 아침 요가 하기', '근처 마을 산책하며 영상으로 남기기', '유튜브로 춤 배우기',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랑 틈틈이 수다 떨기', '블루투스 마이크 사서 노래 부르기'(남해는 층간 소음 걱정이 없다), '남해 노을 찍기', '그림일기 그리기' 등, 지금 이 순간 남해에서 글을 쓰면서도 즐길 수 있는 재미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블루투스 마이크를 사야겠다.
이제는 추억 속으로 사라진 '개그콘서트'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한평생 일만 하던 두 여자분이 정작 삶을 즐길 여유가 생겼을 때 제대로 삶을 즐기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개그 코너를 본 적이 있다. 한평생 열심히 일하다 경제적 여유가 생겨 모피코트에 화려한 장신구를 두르고 고깃집에 손님으로 간 그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숯을 갈고 고기를 구우려고 한다. 그러다 번뜩 정신이 들어 서로에게 "누려~"라고 말하곤 웃어넘기는 것이다. 너무 오랫동안 순간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온 그들은 정작 누릴 수 있을 정도의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생겨도 누리는 방법을 몰라 뚝딱거렸다. 그들이 악착같이 모은 돈은 분명 가족들을 먹이고 입히며 가치 있게 쓰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자신을 위해서도 쓸 수 있게 되었지만, 그 가치를 어떻게 교환해야 할지 몰라 다른 사람이 정해놓은 가격을 지표 삼아 비싼 물건이 큰 기쁨을 줄 것이라고 짐작하고야 마는 것이다.
오랜만에 남해에 비가 내렸다. 읍내에 나갈 일이 있어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비가 그쳤다. 읍내에서 집까지 버스로만 40분이 걸린다. 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창 밖을 바라보니 비가 갠 화창한 4월의 남해가 푸르디푸르고 감사할 정도로 눈부셨다. 해안 도로를 굽이쳐 달리는 남해의 버스는 믿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끝도 없이 상영해주었다. 나는 순간의 안쪽에 있었다. 내 손에 쥔 순간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유유히 바라보았다. 버스에서 내려 마을로 걸어가는데 해가 산에 걸려 물기 어린 우리 마을을 보듬고 있었다. 아침에 나갈 때 뵀던 할머니분들이 정자에 나란히 앉아계셨다.
"이제 오이나? 왜 이렇게 오래 있었나?"
"읍에 갔다 왔어요~ 오늘 남해 군수님한테 남해 잘 홍보하라고 이런 것도 받았어요~"
남해 SNS 알리미단 기자가 되어 기자증과 위촉장을 바리바리 싸들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위촉장을 열어 할머니들께 보이며 재롱을 부렸다. 언제나 나를 반갑게 맞아주시는 동네 어르신들께 오늘 있었던 일들을 종알 종알 이야기하며 일상을 나누고 싶었다.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하면 좋아."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시느라 버스정류장에서 자주 마주치던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산 뒤로 넘어가는 햇살이 마지막 붉은빛을 비추며 할머니들을 감싸고 있었다. 얼굴에 깊게 파인 주름에 길게 그림자가 졌다. 밭일을 하시느라 까맣게 그을린 피부가 할머니께서 살아오셨을 날들을 말해주고 있었다.
'최선을 다 할게요.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사랑하고 즐기고 해처럼 환하게 살다가 예쁘게 져물게요. 우리도 여기서 좋은 추억 많이 쌓아요.'
마음으로 답했다.
가까이 있는 것을 더 아끼고, 매 순간 사라지는 것을 사랑하며, 지나온 삶을 아름답게 추억하는 자기 사랑. 그 사랑이 가슴에 와닿으면, 내일의 기억을 위해 오늘의 자기와 자기 삶을 기록할 수 있다. - <윤미네 집>, 전몽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