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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유록 May 05. 2022

유목민의 후예

다시 떠날 준비를 하는 당신에게

 남해로 온 뒤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하루에 일곱 시간에서 여덟 시간에 달하던 휴대폰 사용 시간이 요즘은 세 시간에도 못 미친다. 휴대폰으로 향하던 시선은 바다로 산으로 사람에게로 쏠렸다. 사랑을 담아. 남해는 지금 봄이 한창이다.




4월 중순, 남해 사람들은 슬슬 반팔 옷을 꺼내 입으며 여름을 준비하고 있다. 들판의 유채꽃은 절정을 지났지만 여전히 노란 꿀 내를 풍기며 지천에 펼쳐져 있다. 이제는 남해 멸치가 맛있을 철이라고 한다. 뒤뜰에 하나둘씩 새로 나기 시작한 채소들을 뜯으러 나가니 셰어하우스 아버지께서는 뒷마당에서 멸치를 다듬으시다 "오늘 멸치회 먹을 거다." 하셨다. 멸치라고는 멸치볶음밖에 먹어보지 못했던 나는 "멸치회요? 우와, 처음 먹어봐요~!" 하면서 아버지의 멸치 손질에 흥을 더했다. 뒤뜰에서는 지난겨울을 견딘 비트와 당귀가 힘차게 생명력을 과시했다. 끼니마다 조금씩 뜯어 소중히 먹는다. 약보다 귀한 것이라는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진한 향내가 가득했다. 보석보다 귀한 하루가 아무렇지 않게 이어지고 있었다.

 






남해로 내려와서 가장 좋은 점은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좀 더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철마다 어떤 꽃이 피고, 무슨 작물이 자라고, 지금 바다에서 자주 잡히는 것이 무엇인지 어설프게나마 알아가고 있다. 겨울을 견딘 초록과 올봄 새로 돋아난 초록의 차이점을 보는 눈도 점점 밝아왔다. 4월 말엔 등나무 꽃이 주렁주렁 열렸다. 잡초인 줄 알았던 우리 집 화단의 풀에서는 라일락이 피기 시작했다. 마음대로 뛰어나가서 꽃향기를 들이켠다. 아무리 들이켜도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향수가 길에 널려 있다. 올해는 아주 오랜만에 제비를 보았다. 어릴 때 집 처마에 둥지를 틀곤 하던 제비를 도시에서는 보지 못한 지 오래였다. 그동안 키가 훌쩍 커버려서인지 비가 내릴 때가 되어 낮게 나는 제비를 보니 너무나 작고 가녀려 보였다. 제비가 셰어하우스 앞 집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작년 겨울, 가평에서 직장생활을 끝내고 이제 남해로 갈 것이라고 했던 날에 친구 박하는 말했다.






"너는 유목민 같아."

"유목민?"

"우리들 중에 유목민이 남아 있는 것 같거든, 그런데 너는 확실히 유목민 같아."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문자가 생기기도 전에 우리는 모두 유목민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같은 곳을 우연히 다시 들른 유목민 조상님들이 예전에 먹고 툭 뱉었던 씨앗이 작물을 자라게 한 것을 보고 씨앗을 심기 시작했다고. 그렇게 조상님들은 한 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하셨고, 안정적으로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다 다 먹고도 남는 것이 생겼고 이 잉여농산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논의하다 역할이 생겨났고, 이후엔 계급이 생겨났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국사시간에 졸며 들었던 선사시대 이야기이다. 박하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본성은 유목민에 가까워서 아직 우리 곳곳엔 유목민들이 남아있다고 한다. 근데 그 유목민의 후예가 바로 나라나? 박하는 말을 이어갔다.






"예전에 우리 삼촌이 한평생 자식들을 위해 일만 하시다가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태국으로 여행을 가셨거든? 아마 삼촌의 첫 해외여행이었을 거야. 한 달만 계획하고 가셨던 여행이었는데 거진 일 년 만에 돌아오셨어. 근데 우리 삼촌이 여행 후에 완전히 다른 얼굴이 되어 돌아왔단 말이지. 다 죽어가던 얼굴이 햇볕에 그을린 건강해 보이는 그 특유의 얼굴 있잖아, 여하튼 엄청 밝아지셨어. 삼촌한테 여행이 어땠냐고, 어떻게 그렇게 오래 지내다 오시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삼촌이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


"뭐라고 했는데?"










내가 처음 홀로 나섰던 여행지는 영국이었다. 한국에서는 보통 키에 보통 몸집인데도 영국에 가니 내가 그곳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런던은 모든 것이 다 커다랬다. 사람도 크고 공원도 크고 버스도 크고 오직 지하철 좌석만 작았는데, 커다란 사람들이 지하철 좌석에 구겨지듯 앉아 있어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비가 오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런던에서 지내는 일주일 동안은 언제나 날씨가 맑았다. 커다란 공원에서 초식동물처럼 뛰어다니는 영국 사람들을 보니, 덩달아 조깅이란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 일찍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숙소 주변에 있는 하이드 파크를 찾았다. 마치 어제도 뛰었고 오늘도 뛰었고 내일도 뛸 사람처럼 공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엉성하게 뛰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누가 보아도 영국 신사 같은 키 큰 남자와 요정 같은 여자가 나를 향해 두두두두 달려왔다. 그들은 나를 지나치며 특유의 영국식 발음으로 "긋모오닝"하고 인사를 건넸다. 마치 내가 어제도 보았고 오늘도 만났고 내일도 만날 이웃인 것처럼. 그래서 나도 엉겹결에 어제도 보았고 오늘도 만났으며 내일도 만날 사람처럼 "긋 모올닝" 하고 답했다.





호스텔에서 제공하는 빵을 토스트해 아침을 먹으려는데 주방 한편에서 아침을 만들어먹는 불가리아인 남자와 마주쳤다. 그의 그릇엔 토마토와 요거트, 아보카도 등 건강한 음식이 가득했다. 스크램블까지 만들어 접시에 예쁘게 담고는 싱긋 웃으며 내게도 자기 음식을 나눠주었다. 그는 평일엔 프로그램 개발자로 일하고 주말엔 춤을 추러 이곳저곳을 다닌다고 했다. 자기는 사실 춤만 추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춤으로 돈을 벌 순 없지만 꼭 전문 댄서가 될 것이라며 웃어 보였다. 불가리아 조식 청년은 다음에 또 보자며 춤을 추러 나갔다.




자연사 박물관에 가서 공룡뼈를 보고 박물관 직원 아저씨에게 피시 앤 칩스 맛집이 어딘지 물어보았다. 아저씨는 화장실 위치가 아닌 다른 것을 물어보는 관광객이 너무 반가우셨는지 불편해 보이는 다리를 이끌고도 문 앞까지 나오셔서 손가락으로 가야 할 방향을 이리저리 가리키며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라고 꼭 가보라고 해주셨다. 정말 피시 앤 칩스도 맛있고 직원분이 잘 생겨서 아직도 기억 속에 'Hoop & Toy'라는 박물관 아저씨 단골 가게 이름이 남아 있다.


 







"삼촌한테 여행이 어땠냐고, 어떻게 그렇게 오래 있다 오시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삼촌이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


"뭐라고 하셨는데?"


"우연을 초대했다고 하시더라."





박하의 삼촌분은 매일 회사에 나가서 일을 하시고, 돌아오면 자기 계발을 하시고, 그래서 승진도 하시고 더 많은 일을 하셨다. 그렇게 일만 하시다 처음으로 홀로 떠난 태국여행에서 삼촌은 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고 계셨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공원에서 축구를 하고 있던 사람들의 공이 삼촌에게 굴러들어갔고, 사람들은 삼촌에게 같이 공을 차겠냐고 물었다. 마치 언제나 만나던 이웃처럼. 삼촌은 심장이 터지도록 달리며 아이처럼 공을 차셨다. 그렇게 공을 차고 나서 무리 중 한 명에게 저녁식사 초대를 받으셨고, 삼촌은 그 우연에 "Yes."라고 답하셨다. 그렇게 우연이 만드는 여행에 매료된 삼촌은 일 년간 우연을 초대하며 여행을 즐기셨다고 한다. 계획도 없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밥을 먹고 또 그 사람들이 알려준 곳으로 여행하고. 이렇게 하루를 채워가는 여행은 모든 것을 계획하고 통제해야 했던 삼촌에게 알 수 없는 희열과 해방감을 주었고, 삼촌은 길 위에서 자신이 유목민의 후예라는 것을 깨달으셨다고.



박하는 말했다.


"우연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고, 우연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우연을 초대하는 사람이 있는데, 너도 우리 삼촌처럼 우연을 초대하는 사람 같아. 갑자기 남해라니!"










오랫동안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며 저렇게 살아야 한다고, 한 곳에 정착하고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제 밥그릇을 챙기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다들 그렇게 사니까. 하지만 서른 넘어 홀로 떠났던 여행에서 나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자유로웠다. 정말 사는 것 같았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시간을 보내고, 그들의 방식대로 살아보면서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생명력을 느꼈다. 삶은 한 방의 결말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디에도 한 방의 해결책이나 극적인 변화 같은 것은 없다고, 그저 움직이라고 내 생명이 말했다. 거대한 목표를 위해 뛰어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잘해야만 사랑받는 것도 아니라고. 정말 고귀한 것은 하루하루 공들여 사는 모든 순간들이라고. 여행지에서는 누군가에게 나를 증명할 필요도 없었고 목표는 하나, 마음을 나누는 것뿐이었다. 진흙탕에서 버둥거리다 겨우 진창에서 한 발을 뺀 사람처럼 희열감을 느꼈다.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초록이 무성하게 뻗어나가는 여름도 있고, 그러다 이렇게 춥고도 아름다워 다른 세계 같은 계절이 돌아오고, 붉은 동백꽃과 노란 낙엽을 바라볼 수도 있다. 인간은 언제나 거대한 극장에 있는 듯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마음속에 담고 있는 예쁜 에너지를 세상으로 되돌리는 것이 극장표의 값이다.

-책 '스위트 히어 애프터', 요시모토 바나나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때, 오로지 그 사람만을 바라보며 순간순간 감정을 진실되게 표현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나를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순간이 영원처럼 빛이 났다. 남의눈을 신경 쓰며 남에게 비친 내 모습이 멋져 보이려고 애쓰는 것이 얼마나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것이었는지 온몸으로 느껴졌다. 우리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을 완벽히 피할 수는 없는데 왜 그리도 스스로를 증명하려고 애썼을까. 대부분의 경우 스스로가 충분하다고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쏟아내는 것일 뿐인데.








처음으로 홀로 떠났던 여행지에서 돌아온 후부터 의식적으로 여행자처럼 일상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우연의 씨앗을 심는 일에 힘과 시간을 들였다. 쏟아질 우연을 받아둘 강한 손과 놀랄 마음을 준비하고 보물 쪽지에 적힌 선물은 모르는 채로 쪽지를 이곳저곳 숨겨두는 것이다. 글을 써서 인터넷에 띄워 보내고 그림을 그려 선보이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사람들에게 작은 선물과 손편지를 보내보고 매일을 기록했다. 작은 행복까지 하나하나 샅샅이 끌어모아 기록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구슬처럼 꿰어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꾸준히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가고 아름다운 문장을 모으고, 전혀 안 해봤을 일들에 발을 내디뎠다. 남해로 한 달 살기를 떠나고 한국에 온 여행자를 모아 영화 토론모임을 만들었다. 우유나 버터, 계란이 들어가지 않는 비건 빵을 만들어 팔아보기도 하고, 여행기를 모아 오디오 작가에 지원해 내가 녹음한 글이 '나디오'라는 플랫폼에 싣기도 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우연을 초대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보낸 초대장에 우연은 새로운 친구, 새로운 일, 새로운 기회라는 이름으로 가끔씩 찾아왔다. 전에 없던 설렘도 함께.





 이제 10kg을 빼기 위해서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찾아올 즐거운 일에 완전히 몸을 맡기기 위해 몸을 관리하려고 애쓴다. 삶이라는 것이 결국은 러키박스가 아닐까. 열어보면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기뻐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에겐 즐거운 일을 준다고 믿는다. 예전에는 항상 삶과 싸우고 있어서 싸울 일만 주었는데, 이제는 예상하지 못했던 기쁜 우연을 선물해주니까. 오프라 윈프리가 사랑은 아프지 않고 느낌이 좋은 것이라고 했다. 이제 삶을 사랑한다.








헤밍웨이는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서 말했다. 자기처럼 자기 일에 만족하는 사람은 가난을 그다지 힘겨워하지 않는다고. 언제나 그랬듯 지금도 먹고사는 법을 궁리하지만, 전처럼 힘겹지만은 않다. '오히려 좋아.'라는 요즘 유행어처럼 오히려 좋다. 지금의 생활 방식에 만족하기 때문에 힘겹지 않고, 유목민이 먹고살 것을 찾으려고 세상을 떠돌았듯 먹고살 궁리를 하는 덕에 좀 더 부지런히 우연을 초대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남해에 와서 글을 쓰며 '이 정도면 되었다.'라는 감각에 좀 더 민감해졌다. 가지고 있는 것에 좀 더 마음을 두게 되었다. 돈은 많지 않지만 시간은 많으니 내가 원하는 대로 시간을 쓰려고 노력하고, 조직에서 대인관계 스킬을 더 배울 순 없으니 책을 읽으며 인간을 이해하는 능력을 기르고 창작을 하면서 창의력과 추진력을 기르고 있다. 멋진 직장에 갈 순 없지만 마음만 먹으면 바다로 산으로 어디든 갈 수 있으니 가고 싶은 곳에 마음껏 가려고 한다. 아이와 남편이 없어서 아주 친밀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여러 가지 감정을 느낄 수는 없지만, 혼자만이 누릴 수 있는 독립적인 시간, 나만을 위한 시간의 자유로움을 마음껏 느끼고 있다. 잘 찾아보면 내 선에서 누릴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지천에 널려있었다. 남해 바닷가에 널린 조개껍데기처럼. 내가 할 일은 그저 그것을 깨닫고 누리는 것뿐이었다. 지불할 극장표 값은 결국 세상에게 내가 받은 사랑만큼 행복하게 사는 것이겠지.







고민하고 계획하고 골머리를 앓아도 행동하기 이전은 0이야. 0은 0일뿐이야. 그런데 후지게라도 한번 해버리고 나면, 그 사람은 1이야. 1을 가진 사람인 거야. 우린 1을 만들어야 돼. 내일 한다고, 더 나이가 들어서 멋진 1을 만든다고 하면 안 돼. 지금 1을 만들어야 해 지금 당장.

-책 '쉬운 천국', 유지혜






예전엔 계획만 하기 바빴다. 하지만 이제 후지더라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무엇이든 한다. 어떤 것이든 만들어서 세상으로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우연을 초대한다. 일기를 쓰고 메모를 하고 쓴 글을 공개하고, 체력을 키우고 편지를 쓰고 선물을 보낸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며 그림을 그리고 낯선 언어를 배우고 몰랐던 기술을 익힌다. 그냥 하는 것이다. 그렇게 1을 만들어 보내면 세상은 10으로 100으로 돌려주곤 하니까. 세상은 언제나 나보다 커서 내가 준 사랑보다 더 큰 것을 주니까. 겸허한 마음으로 찾아올 우연에 미리 감사하며 무엇이든 만드는 것이다. 사랑을 담아.  






거울을 바라본다. 그 속엔 말갛게 웃는 여행자가 서있다.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신나게 즐겨볼 심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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