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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유록 May 15. 2022

미정이는 살아서 천국을 볼 수 있을까

삶을 추앙해요

 드라마를 볼 때 초반 몇 회는 연속으로 몰아서 보는 것을 좋아한다. 드라마 속 세계관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인물들과 같이 웃고 우는 것이 드라마를 보는 재미 아니겠는가. 그래서 한 달에 하루 이틀 정도는 날을 잡고 하루 종일 드라마를 몰아본다. 다른 사람의 인생에 깊이 발을 들여 보는 것이다. 남해에 와서는 드라마를 통 보지 않다가 이번 달에는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 속 주인공 염미정(김지원 배우분)의 인생에 흠뻑 빠져 있다. '나의 아저씨'를 쓰신 박해영 작가님의 차기작이기도 하고, 좋아하는 배우분들이 잔뜩 출연한다고 해서 이건 꼭 봐야지 하며 벼르고 있던 드라마였다. 처음엔 그냥 걸어 다니기만 해도 인생이 스펙터클 할 것 같은 미모의 미정이가 하루하루를 마지못해 살아가며 지루한다는 것도, 어딜 가든 인기가 폭발할 것 같은 염기정(이엘 배우분)이 사랑이 하고 싶다며 아무나 사랑하겠다고 하는 것도, 외제차 몇 대는 끌 것 같은 염창희(이민기 배우분)가 차를 사고 싶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리다 혼나는 것도 잘 몰입이 되지 않았으나, 지금은 진심으로 이 세 남매와 구 씨(손석구 배우분), 아니 드라마 속 모든 인물들의 삶을 애정하고 응원하고 있다. 그들의 짠함이 꼭 나의 짠함 같아서. 이 드라마를 보면 꼭 내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짠함이 각기 다른 사람이 되어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사는 것이 지루하고 인간들이 싫다가도 아무나 사랑하고 싶고, 주변 사람들에게 잘하며 성실하게 살려다가도 다른 사람들 눈에 그럴 싸 해 보이는 일에 눈이 돌아가는 내 속의 짠함들이 미정이, 기정이, 창희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도 안쓰럽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미정이와 구 씨가 가장 안쓰럽다. 기정이와 창희는 칭얼대고 짜증내고 표현하며 쏟아내는데 저 둘은 입을 꾹 다물고 혼자서 꾸역꾸역 견뎌내니까. 존재에 대한 의문, 사랑을 넘어선 더 커다란 것에 대한 갈망. 내 마음속에 있는 이런 것들도 표현되지 못하고 꾹꾹 숨겨져 있었다. 말할 곳도 없고 말할 기회도 없으니까. 사실은 정말 말이 하고 싶어서 글을 쓴다.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은데 남들이 듣고 싶어 하지도 않는 말을 늘어놓기보다는, 글로 쓰면 읽고 싶은 사람만 와서 읽으면 되니까. 미정이는 어릴 때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한다. 다들 신에게 성적, 교우관계 같은 것들을 바라는 것이 이상했다며 자신이 궁금했던 것은 하나밖에 없다고 말한다.





나, 뭐예요? 나 여기 왜 있어요? 91년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50년 후면 존재하지 않을 건데 이전에도 존재했고 이후에도 존재할 것 같은 느낌. 내가 영원할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에 시달리면서도 마음이 어디 한 군데도 한 번도 안착한 적이 없어. 이불속에서도 불안하고 사람들 속에서도 불안하고 난 왜 딴 애들처럼 해맑게 웃지 못할까. 난 왜 늘 슬플까. 왜 늘 가슴이 뛸까. 왜 다 재미없을까. 인간은 다 허수아비 같아. 자기가 뭔지 모르면서 그냥 연기하며 사는 허수아비 어떻게 보면 건강하게 잘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모든 질문을 잠재워두기로 합의한 사람들일 수도. '인생은 이런 거야.'라는 어떤 거짓말에 합의한 사람들. 난 합의 안 해. 죽어서 가는 천국 따위는 필요 없어. 살아서 천국을 볼 거야.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 11화 중






나도 그것이 늘 궁금했다. '나 왜 여기 있어요?' 왜 사는 가보다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하다며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라는 대답에 합의할 수가 없었다. 왜 사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사는 지를 대체 어떻게 정한단 말인가. 마음속 끝까지 행복한 적이 없고, 아무리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마지막엔 늘 쓸쓸했다. 부모님과의 애착관계 때문이라고들 하지만, 아니. 부모님의 넘치는 애정표현을 받았고, 그것을 온전히 다 느끼고 있다고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궁금할 것 같다. 사랑을 하러 왔다고? 세상에 사랑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그렇다면 왜? 왜 사랑을 해야 하는데? 왜 굳이 태어나서 사랑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얼마나 좋은 것이길래. 저 위의 누군가가 사랑을 해봤는데 그것이 너무 좋아서 다른 무언가도 그것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우리를 만든 것일까? 마치 너무 재미있었던 영화를 친구들에게 추천해주듯, 우리는 사랑을 추천받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일까.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내가 짓지도 않은 이 이름으로 불렸네.
 
- 노래 Track9 중, 이소라






남해에 내려온 뒤 그 좋아하던 바다를 실컷 보고 있다. 파도는 그저 뒤에서 뒤에서 떠밀려와서 해안가에서 철썩하고 부서지곤 돌아갔다. 파도는 왜 치는 것일까? 바람 때문에. 그렇다면 바람은? 기압차 때문에. 그렇다면 기압은? 마치 인간이 파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거대한 힘에 의해 밀리고 밀려서 철썩하고 하얗게 부서질 때까지 살아가다 돌아가는 존재들. 어디서부터 밀려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뒤에서 밀려서 밀려서 앞으로 앞으로 그리고 하얗게 처얼썩. 시간은 앞으로 앞으로 흐르고 겪어내야 할 것은 겪어내야 하니까.






남해에 내려온 뒤 히피펌도 하고 코에 피어싱도 하고 글도 쓰고 듣기 싫었던 이름까지 바꿨다. 정말 하고 싶었던 것들은 남김없이 하고 있는데도 어딘가 한 구석이 허전했다.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어딘가가 빈 것 같았다. 좋아하는 자연을 실컷 보면서 글을 쓰는 것이 답인 줄 알았는데 여전히 마음속 저 밑바닥까지는 행복하지가 않았다. 분명 채워져가고 있는데 아주 아주 작은 구멍이 여전히 남은 느낌. 다행히 채우는 속도가 새는 속도보다 빨라서 물이 차고는 있지만, 어떻게든 그 구멍을 막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구멍은 무엇이고, 어떻게 막아야 할까. 나를 갉아먹던 일을 그만두는 것도 답이 아니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도 답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운동도 하고 건강한 음식도 챙겨 먹고 있는데.






'나의 해방 일지' 속 미정이는 자신이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다며 구 씨에게 자신을 추앙해 달라고 요구한다. 높이 받들어 우러러봐 달라고. 사랑으로는 안되고 추앙을 해달라고. 그저 소중히 여기기만 해서는 안되고 높이 우러러봐 달라고 말한다. 박해영 작가님이 찾으신 구멍을 막는 법은 '추앙'이었을까. 사랑으로는 안 되고, 추앙을 해야 하는 것일까. 사랑에는 미움도 있지만 추앙에는 미움이 없다. 10점짜리 인간이라도 없는 90점을 질책하기보다는 가진 10점을 보며 대단하다고 하는 것이 추앙이다. 얼마 전 동네에서 경로잔치가 열려서 거기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무슨 노래를 불러야 내 노래실력을 뽐낼 수 있을지 한참을 고민하다 내가 참 얌체 같다고 생각했다. 해드린 것이 무엇이 있다고 어르신들이 내게 찬사를 보내야 하는가. 무슨 노래를 부르면 어르신들이 즐거워하실까. 받으려는 마음이 주고 싶은 마음으로 바뀌니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거대한 물고기 회가 보답으로 돌아왔다. 자연은 솔직하다. 가물면 말라붙고, 장마가 들면 녹아 없어진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자기가 피어야 할 때 피며 져야 할 때는 진다. 남해를 생각하며 목걸이를 만들었다. 남해 시금치 색깔 줄에 시금치 뿌리 색 펜던트를 엮어. 나는 남해에서 지내면서 무언가를 추앙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얌체처럼 내가 가질 것만 계산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손가락을 접으며 계산하기 싫다. 지금까지 꽉 쥐고 있어도 줄줄 샜는 걸. 그냥 손을 풀어 다 주고 싶다. 작은 풀꽃마저도 나를 위로하는 이곳에서.





다 소진해야지. 바닥까지 그러모아서 모든 것을 추앙하며 살아봐야겠다. 하얗게 부서지는 순간까지. 왜 사느냐면 이 모든 것들을 추앙하려고 산다고 활짝 웃으면서 말할 수 있을까. 과연 살아서 천국을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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