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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유록 May 19. 2022

내 나이 서른일곱, 이름을 바꾸었다.

신분세탁 아니고요

퍼스널 브랜딩이 인기다. 자신을 하나의 브랜드로 만드는 것이. '나는 어떠어떠한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않아도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지.'라고 단번에 알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 그것이 펄스널 브랜딩이라고 한다. 자신의 어떤 면을 편집해서 지속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각인시키는 것. 기업에서 상품 브랜드를 만들듯 자신을 하나의 브랜드로 만드는 것. 사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브랜드를 갖는다. 바로 '이름'. 전지현과 왕지현이 주는 느낌이 다르고, 손예진과 손언진이 주는 느낌이 다르듯 사람의 이름이 풍기는 이미지는 이름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연예인들이 자신의 이미지에 맞춰서 예명으로 활동하는 것이겠지.






남해에 내려와서 이름을 바꾸었다. 강하게 힘을 줘서 발음해야 하는 중간 글자가 언제나 신경을 긁었고, 항렬 때문에 따라붙은 마지막 글자도 여기저기서 오타가 자주 나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쁜 이름이었지만, 내 마음엔 썩 들지 않았다.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 직장에 다니면서 영어 이름으로 불릴 때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남해에 내려와서 다시 본명을 자주 들어야 하니 이참에 이름을 바꾸겠다고 결심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행동력은 눈덩이처럼 점점 커지며 가속도가 붙는 것일까. 못할 것은 또 무엇인가 싶은 것이다. 내가 가장 많이 듣는 이름을 내가 바꾸는 것인데. 그렇게 내 나이 서른일곱에 대략 서른다섯 해 정도를 들어온 이름을 바꾸는 여정길에 덜커덕 올랐다.






얼마 전에 전화 사주를 보면서 알게 된 철학가 분에게 작명을 의뢰했다. 작명 서비스는 무려 이십만 원. 이십만 원을 결재하며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고 이름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묘하게 들떴다. 어떤 이름을 주실까. 작명 서비스는 비대면으로 3일간 진행되었다. 철학가분께서는 내게 생년월일과 형제관계 등을 물어보시고는 작명을 시작하셨다. 하루가 지나자 이름을 여러 개 보내주셨다. 그런데 후보 이름들이 계속해서 휴대폰으로 날아오는 것이다. 주셔도 너무 많이 주셨다. 열댓 개의 이름이 계속 날아오는데 이럴 것이면 좋은 이름의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의아했다. 기왕이면 좋다는 이름을 짓고 싶어서 돈을 드리고 의뢰한 것이라 나에게 좋은 이름 탑 3 이름을 세 개 정도 주실 거라고 기대했었다. 그래서 열댓 개의 이름 중 내게 가장 좋은 이름 세 개 정도만 추려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렇게 받은 이름이 효진, 은채, 소혜. 각각 이름을 녹음해서 소리를 들어보고 주변 친구들에게도 물어보며 어떤 이름으로 바꾸는 것이 가장 좋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의견을 묻고 소리를 들어보아도 확 끌리는 이름이 없었다. 친구들의 의견도 제각기 흩어졌다. 효진파, 은채파, 소혜파로 나뉘어서 각기 다른 주장을 펼쳤다. 세 이름 모두 예쁜 이름이니까. 하지만 갈라지는 여론처럼 내 마음도 이리저리 흔들렸고, 어떤 이름도 내 이름 같지가 않았다.






결국 다른 작명가 분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다 발견한 '무료 이름 감정 서비스'. 백 퍼센트 이름이 안 좋다고 바꾸라고 할 것 같았지만, 어차피 이름을 바꿀 것이므로 한번 들어보자 싶었다. 작명가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1월 생은 아니시죠?"




짧은 질문을 던지시곤 작명가 분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런데 놀라울 정도로 나에 대해 속속들이 설명하시는 것이다. '어떻게 이름만 듣고 저런 말씀을 하시지?' 싶은 이야기들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업으로 삼아하시는 일이니 다르긴 다르구나 싶었다. 처음 받았던 이름이 영 마음에 들지 않으니 이분께 한번 더 의뢰해보기로 했다. 특히 이분은 이름 소리에 더 집중하시는 것 같아서 내가 바라는 방향의 개명이 가능할 것 같았다.





"oo 씨는 이름에 무조건 기역자가 들어가야 합니다."

"기역이요?"

"예쁜 이름 너무 바라지 마세요. 이름이 예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이름을 써야지요."





예쁜 이름을 바라지 않았다. 들었을 때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이름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이름에 기역자가 들어가야 한다니... 벌써 흥미로워... 흔쾌히 2차 작명 서비스를 의뢰했다. 기역자가 들어간 이름 후보들을 기다리며 너무 설렜다. 어떤 이름이 올까...





이틀이 지났을까. 작명가분으로부터 이름 세 개가 도착했다.





'나겸, 유록, 금서'






작명가분께서는 최대한 이름을 많이 불러보고 들어 본 뒤 결정하라고 하셨다. 곧바로 휴대전화에 '나겸아, 나겸씨, 나겸, 나겸언니, 나겸누나' 라고 녹음해서 수차례 들어보았다. 다른 이름도 같은 방법으로 여러 번 들었다. 하지만 몇 번 듣지 않아도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미 작가명이 스포일러지만, '유록'이란 이름을 듣자마자, 이것이 내 새로운 이름이라는 것을 알았다. 듣자마자 왠지 기분이 좋았고 자꾸만 부르고 싶었다. 그래도 작명가 분께 각각 이름을 구성하는 한자 뜻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뜻은 중요하지 않아요~. 소리를 많이 들어보라니깐."






작명가 분은 단호하셨다. 어떤 뜻인지 궁금한데 이렇게 미스터리할 때가. 어쨌거나 답은 정해져 있었으니 '유록'을 택했다. 친구들에게 물어볼 것도 없었다. 누구에게 묻지 않아도 내 마음에 쏙 들었으니까. 고민을 하는 이유는 선택지 중에 자신이 바라는 답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다. 바로 가족들. 그래도 내 이름을 가장 오래 불러주었고, 내 이름에 가장 애착이 있는 우리 가족들의 동의를 구하고 싶었다. 특히 항렬 자를 제외한 한 글자는 아빠가 지어주신 것이기 때문에 아빠의 허락을 받고 싶었다. 아빠가 틀림없이 서운해하실 것 같아서 좋은 이름이 나올 때까지는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힘든 난관을 넘을 때는 쉬운 일부터 시작해야 하니, 엄마 쪽부터 공략하기로 했다.





"엄마, 통화돼요? 나 이름 바꾸고 싶어서 의뢰를 좀 받았는데 너무 마음에 드는 이름을 찾았어. 나한테 참 좋은 이름이래."

"엥? 뭔데?"

"유록이, 장유록"

"오, 유록이 좋다."






정말 예상치도 못했던 반응이었다. 무슨 이름을 바꾸냐고 당연히 반대하실 줄 알았는데, '유록'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든다고 하시는 것이다. 사실 유록으로 정했다고 친구들에게 말했을 때도 하나같이 이름이 너무 딱이란 반응이 돌아왔었다. 친구들이니 의례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소 직설적이신 우리 엄마까지 긍정적으로 반응하시자 신기하기까지 했다. 이 기세를 몰아 용기를 내어 아빠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아빠가 지어주신 이름을 바꾸고 싶다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 아빠가 조금이라도 덜 상처받으실까.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내딛어야 하는 발걸음이었다. 내딛고 싶었다. 일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오는 것도 기암 하셨을지도 모르는데, 이제 이름까지 바꾼다고 말씀드리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하지만 내가 원하는 인생을 걸어가는 것을 보며 본인이 바라시는 딸의 인생보다 내가 바라는 나의 삶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고 계신 듯했다. 분명 포기인지 인정인지 모를 것을 하시려고 노력하고 계셨다.






"아빠... 나 아빠가 지어주신 이름이 너무 예쁘고 그 이름으로 잘 살아왔는데, 이제 글을 쓰고 남해로 와서 예전과는 좀 다르게 살고 있잖아~ 그래서 이름을 한번 받아봤는데 괜찮은 것 같아서요~ 이참에 법적인 이름도 바꾸면 어떨까요? 우리 가족은 원래 이름으로 부르고 활동 이름 같은 거지~."

"무슨 이름인데?"

"장유록!"










'장유록'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힘은 실로 특별했다. 아빠도 그 정도 이름이면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싶으셨던지, '기억에 잘 남겠다.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라.' 하시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서 얼떨떨했다. 이름을 바꾸고 싶었지만, 개명 과정만 생각하면 지리멸렬한 일들이 이어질 것만 같아 오랜 기간 망설였었다. 하지만 막상 행동으로 옮기니 이렇게 산뜻할 수가 없는 것이다. 머릿속에 오래 고여있는 일들을 실제로 해보았을 때 생각보다 쉬워서 고민한 시간들이 아까워질 때가 많다. 최악의 경우를 떠올리는 인간의 뇌는 인간을 살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를 막아 세운다.





이름을 바꾼  사람들에게 '이름을 바꾸고 갑자기  풀렸어.'라는 소리를 듣는 인생을 살게 되면 아빠가 내게 미안해하실까 , 아빠가 서운해하실까   만일의 경우까지 떠올리며 나도 어쩔  없는 아빠의 감정들 때문에  감정을 눌러왔었다. 행여 내가 사회적으로   되면 좋은 것이고, 아빠도 '본인이 좋다는 이름으로 하라고 하길 잘했다.' 생각하시고  털어버리실 수도 있으실 텐데 말이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성공한다고 무조건 행복한 인생도 아니고. 아빠가 주신 이름으로 살면서도 크게 아픈  한번 없이, 좋은 대학에 가서 공부했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매끼  먹으면서 서른일곱이  때까지  살아왔다. 대단한 성공을 바라며 이름을 바꾸려는 것도 아니고, 바꿀  있다면,  바꿀 것이 없어서 바꾸었을 뿐이다. 마침 마음에  드는 이름을 만났으니.





며칠 , 집으로 작명서가 도착했다. 상장이나 임명장 등을 넣어주던 짙은 파란색 커버를 열어보니 '장유록' 이란  글자와 함께 한자가 쓰여 있었다.





무성할 '유'

새길 '록'





과장 좀 보태어 감전된 듯 온몸이 찌릿했다. 아니, 짜릿했다. '이거 이거, 본 투 비 작가 이름이잖아?'









예전 이름에게 작별인사를 고하며 법원 사이트에 접속해 개명신청까지 완료했다. 32,100원. 수수료를 포함해 법적으로 이름을 바꾸는 데에 드는 비용이다. 신분증을 바꾸는 등 여러 가지 과정이 앞으로 이어질 테지만, 생각보다 서른일곱 살에 이름을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 친구는 You rock!으로 연락처명을 바꾸었다며 캡처를 떠 보내주었다. 같이 사는 친구들은 며칠간 예전 이름을 부르기도 하며 혼돈의 과정을 살짝 겪었지만 어느샌가 '유록, 유록'하며 새 이름을 곧잘 부른다. 아직 어색해서 '유록'이란 이름을 들으면 웃음이 터질 때가 있지만, 이렇게라도 많이 웃게 해 주니 고마운 이름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어쩌면 바꾼 이름 때문이 아니라, 이름을 바꾸었다는 사실 때문에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이름을 바꾼 뒤 일어나는 일들에 좀 더 의미부여를 하고 있고, 다가오는 기회들에 흔쾌히 '오케이!'를 외치고 있으니까. 묘하게도 유록이는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퀸의 쿵쿵 짝, 쿵쿵 짝, 'We will, we will, rock you!' 하는 노래가 생각나서 'rock you'가 무슨 뜻인지 검색창에 한글 번역을 찾아보았다. 여러 가지 번역이 있었지만, 한 번역이 마음에 들어왔다.




'나는 너의 영혼을 흔들어 버릴 거야.'





, 멋진 .






아빠에게 '내가 뭐라고 불리든 나는 아빠를 가장 사랑하는 작은 딸이에요.'라며 편지를 썼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연히 이 아름다운 남해에서 새로운 이름을 만났을 뿐이다. 새로운 이름과 친해지는 유록* 나날이다.







*유록: 봄날의 버들잎의 빛깔과 같이 노란빛을 띤 연한 초록 (네이버 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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