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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유록 Jun 14. 2022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자의식 깨부수기 feat. 자청의 '역행자'

부끄러운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자면, 학창 시절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때 '어떤 이야기를 하나 보자'는 식으로 선생님들을 바라보곤 했다. 아주 어릴 땐 눈을 초롱초롱 밝히며 선생님 말씀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들었는데, 교육열이 높으신 아버지께서 선행학습을 시켜주시기도 하셨고 유전적으로 암기력이 남보다 조금 뛰어나 새로운 것을 빨리 외웠던 것 같다. 그래서 중학생 때부터는 선생님께서 다 아는 이야기를 하신다 싶으면 엎드려 자버릴 때가 많았다. 그리고 시험기간이 가까워지면 집에서 책을 달달 외웠다. 성적은 항상 잘 나왔다. 중학교 때는 3년 내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정말 내가 효율적으로 공부하는 똑똑한 애인 줄로만 알았다. 인간에 대한 예의도 없으면서. 학교에서 공부도 안 하는데 성적이 잘 나오는 것이 수상했는지 내가 커닝을 한다거나, 우리 아빠가 교수님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런 소문에 으쓱해졌다. 그때는 '안다'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몰랐다. 시험지에 쏟아내듯 외운 것을 뱉어낼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하지만 벼락치기하듯 암기한 지식은 곧바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지식을 받아들이고, 집으로 돌아와 복습을 하면서 관련된 것들도 찾아보기도 하며 천천히 내 것으로 만들어 삶에 적용해 배운 것을 장기기억으로 옮겨두고 나중에 꺼내쓸 수 있는 지경까지 이르러야 '안다'라고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암기만으로도 잘 나오던 성적은 한없이 내 자의식을 부풀렸다. 늘 생업 때문에 바쁘셨던 부모님에 대한 애정결핍도 내 자아를 비대하게 만드는데 한몫했다. '나를 왜 사랑해주지 않으시지?'라는 잘못된 신념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똑똑하고 특별하다'라는 자의식을 키워갔다. 교과지식만이 수업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내겐 즉각적으로 보이는 성적만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렇게 짧은 수를 두었다. 고작 십여 년을 살아온 내가 얼마나 세상을 모르는지도, 나보다 경험도 많고 그 모든 힘든 과정을 거쳐 선생님이 되어 교단에 선 사람들에게서 배울 것이 얼마나 많은지도 그때는 몰랐다. 신이 주신 선물인 나의 암기력은 나를 성적만 좋은 헛똑똑이로 만들어 갔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암기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세계가 찾아오기 시작했지만, 부모님께서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셔서 가까스로 서울의 한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홀로 서울로 떠나 대학에 가자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스스로 자신을 조절하는 자기 조절 능력도 부족했고,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드는 사고력도 다른 동기들에 비해 열등히 떨어졌다. 이때라도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눈치챘어야 하는데, 부풀대로 부푼 자의식은 내 못난 부분을 가리기에만 급급했다. '그래도 내가 명문대까지 온 사람인데, 나 한 때 전교 1등만 하던 사람인데'라는 자의식은 견고하기가 철옹성과도 같아서 내 자아를 보호해줄 방법만 찾아다녔다. 성적을 잘 준다는 소문을 듣고 수업을 찾아들었고, 고시 공부로 도피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자 기초공사가 부실했던 나라는 건물은 언제라도 무너질 것처럼 휘청였다. 자의식과 나의 진짜 상태가 너무 달라서 그 간극을 메울 엄두를 내질 못했다. 학교에서 우등생이 사회의 우등생이 아니란 말의 표본처럼 사회에서 나는 자아만 비대하고 다른 또래들에 비해할 줄 아는 것은 없는 그야말로 열등생 중의 열등생이었다. 그 당시의 내가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였는지 돌아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암기만 해서 될 줄 알았던 고시도 여러 가지 학문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실제 상황에 적용해야 하는 고차원적인 시험인 데다가 장기간 자신을 관리하면서 해내야 하는 과정이었는데 이 모든 것들을 견딜 역량이 부족했고, 모든 비즈니스의 기본인 문제 해결을 해내는 문제해결력도 한참 부족했기 때문에 기업에서 모셔가는 인재도 아니었다.




그때라도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선배가 쥐어준 자기 계발서를 들고 자위하기 시작했다. '생생하게 꿈꾸면 이루어진다'는 말은 부족한 능력을 가리며 다 잘될 것이라고 나를 속이는 솜사탕처럼 달콤한 주문이었고, '아프니까 청춘'이란 말은 나만 이런 것이 아니라며 안도하기 딱 좋은 주문이었다. 그 시절 나는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마음을 편하게 하는 용도로 책을 사용했다. 책들은 내가 콱 혀 깨물고 죽지 않게 살렸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실제로 경험하고 시도하면서 책을 읽으며 지혜를 쌓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 자의식을 지키는 용도로만 책을 사용했으니까. 그때는 책이 한 번에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만능열쇠인 줄 알았다. 내 문제를 척하고 열어줄 그 열쇠를 찾아서 일주일에 두세 권씩 책을 읽었다. 책은 한 사람이 얻은 지혜를 집약해 놓은 것이고, 현실적으로 모든 경험을 할 수 없는 우리가 비교적 쉽게 경험적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인 것 같은데... 열쇠라기보다는 삽질을 편하게 해주는 트랙터 같은 것이랄까. 하지만 당시 나는 책에서 인생역전 비책만 찾았다. 원하는 것을 차근히 만들어나갈 자신이 없어서 만능키만 찾아 헤맸다. 결국 또 책만 읽는 헛똑똑이가 되었다. 다행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 문장을 보는 능력이나 문자 이해력은 조금 키울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실제 세상에서는 주변과 간극이 점점 더 벌어졌다. 조급했던지 여러 가지 경험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도 이놈의 자의식이 문제였다. 모든 경험들을 배스킨라빈스 맛보기 아이스크림을 먹듯 맛보기만 했다. 비대한 자아를 깨닫지 못하고 일이 조금만 어려워지면, 일 탓을 하거나 주변 탓을 했다. 만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자리까지 와서 그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관심은 괴로운 나 자신뿐이니 나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흑백논리에 갇혀 살았다. 나와 말이 통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나와 의견이 맞지 않으면 모자란 인간이었다. '내가 난데'라는 태도는 어린 시절 선생님을 거만하게 대했던 시절처럼 온몸에 배어 있었겠지. 인간관계가 다 잘 될 리가 없었다. '난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니 나를 떠받들어줘.'가 기본값이라 조금만 나를 업신여겨도 분노에 차 부들부들 떨었다. 괴로움에 몸부림쳤던 날들은 비대한 자아와 그렇지 못한 현실 사이에서 오는 것들이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러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책에서 일관적으로 글을 쓰는 것을 강조해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괴로울 때도 글을 썼고 슬플 때도 글을 썼다. 초등학생 때 선생님께서 숙제로 일기를 쓰라고 해서 쓰는 일기 말고, 처음으로 쓰는 일기였다. 글로 감정을 옮겨 놓으니 마치 다른 사람의 것처럼 볼 수 있어서 묘했다. '너는 이런 감정이구나, 왜 이런 감정이 들었니, 이때는 네가 너무 유치했다.' 썼던 일기를 다시 읽으며 혼자 대화하기 시작했다. 자의식이 높아 사람들과 터놓고 대화를 할줄 몰랐던 터라 외로웠던 내게 이 방법은 꽤 효과가 있었고, 비로소 나의 삶의 질에 영향을 주었다. 내가 조금씩이라도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비로소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지독히도 갇혀 있던 나 자신에서 떨어지면서부터.




그렇게 4년에서 5년 정도 매년 일기장을 바꿔가며 글을 썼다. 조금씩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하는 것은 무엇이고, 언제 화가 나는지, 어떤 생각 패턴을 가지고 있는지도 어렴풋하게나마 알아갔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글을 쓰겠다고 남해로 내려올 수 있었다. 무언가를 꾸준히 해온 시간이 용기를 줄 때가 있다. 어렴풋하게나마 무언가를 해내는 데에는 의지력보다 환경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고 느끼고 있기도 했었다. 환경을 바꿀 때마다 나의 행동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재작년에 남해에서 한 달 살기를 할 땐 매일 운동을 하고 사람들과 건강한 음식을 챙겨 먹었으며 활동량도 많고 거의 매일 글을 썼다. 그때의 삶이 만족스러워서 다시 남해로 내려갔다. 하지만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이 없는 남해에서의 삶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과식을 했고, 남해로 찾아오는 서울 친구들과 과식을 하며 여행을 했고, 운동은 점점 더 하지 않았으며 여러 가지 축제나 행사에 참여하느라 분주했다.



물론 남해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있으니 조용하게 생각하면서 글을 쓰기에도 좋았고, 지금은 불편해서 하지 않지만 자유를 만끽하며 코에 피어싱도 해보고 바글바글한 히피펌도 해봤다. 축제나 행사에 판매자로 참여할  있는 기회도 생겨 플리마켓에서 액세서리를 만들어 팔아보기도 했다. 아이디어를 가지고 직접 판매까지 해본 소중한 경험이었다.  지역 가요제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는 도전도   있었다.  모든 시도들은 남해라는 환경과 여기서 문화기획자 친구들과 함께 사는 덕분에 해볼  있었다.




하지만 코 피어싱을 뚫는 것도 순간이고 살튀가 생기고 관리가 귀찮아 빼버렸다. 파마를 해서 얻는 새로운 느낌도 순간이었다. 곧 머릿결이 상하고 머리 감기도 힘들어 싹둑 자르고 쫙쫙 폈다. 액세서리를 만드는 것도 눈과 손, 허리 어디 하나 안 아픈 곳이 없고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 지겨운 데다 경험이 없으니 마진율도 너무 낮았다. 노래자랑에 나가서 용기를 내어본 경험도 인생에 큰 자양분이 되었지만, 매일 노래를 연습하며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삶을 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다른 많은 것들을 시도하면 할수록 글을 쓰는 것은 매일 하고 싶고, 할 때마다 새롭고 많은 것을 배운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해보지 않았으면 모를 일을 많이 배웠기 때문에 해본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앞으로도 수많은 시도를 해나갈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완수하며 체크해 나가는 빛나는 몇몇 순간과 음식을 먹고 운동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하고 사랑을 하는 길고 긴 시간으로 채워지는 것이니 힘들더라도 이 길고 긴 시간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다행히도 남해에서 만난 사람들은 자기의 것을 만들고 자기가 원하는 방식의 삶을 일구어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도시에서 만난 친구들은 거의 회사원이라 그들의 일하는 방식을 엿보기가 힘들다. 그리고 그땐 그들의 일하는 방식까지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다. 남해에 와서 여유가 생기기도 했고,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자영업자나 비영리단체 대표가 많기 때문에 그들의 업장에 가거나 기획한 행사에 가면 자연스럽게 그들이 일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기획을 하고 브랜드를 만들고 메뉴를 개발하고, 마케팅을 하고, 고객을 응대하는 것을 보며 절로 겸손해지기도 했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정말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도 모르게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비대한 자의식은 또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변명거리를 찾고 있었다. 새로운 경험을 하거나, SNS에 보이는 나를 부풀리며 보상회로를 눌렀다. 대단한 자의식에게 세상은 즐거움을 주고 가르침을 주는 곳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를 증명해야 하고, 돋보여야 하는 무대니 멋진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썼다.




그러다 자청 작가님의 책 '역행자'를 읽었다. 사실 읽을지 말지 한참을 고민했던 책이다. '자수성가 청년'이란 이름으로 유튜브에 몇 개의 영상을 올린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없으니, 내 눈엔 '개츠비'처럼 보였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알 수 없는 사람. 사실 지금도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십 년 넘게 꽤 많은 책을 읽어왔고, 5년 정도 홀로 글을 써온 내 상황에서 이분의 책을 읽었을 때 지금껏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머릿속에 여기저기 혼재되어 있던 생각들이 상당 부분 정리된 것이 사실이다. 지금까지 쓴 나 자신의 뼈를 때리는 이 글도 이 책을 읽고 쓸 수 있었다.




책 '역행자'의 7단계를 읽어보니 무엇보다 1단계인 '자의식 해체'를 하지 못한 것이 내 삶에 먹구름을 드리우는 가장 큰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책을 도끼 삼아 정말 오랫동안 내 자의식을 산산이 부수었다. 책을 두 차례 읽으면서 아주 자근 자근 밟았다.





'그래... 내가 그렇게 특별하고 잘났으면 지금 내 삶이 만족스럽겠지. 지금 내가 만들어낸 것들도 많고 줄 수 있는 것이 많은 사람이 되었을 거야. 주머니든 인간관계든 사회적 지위든 어떤 형식으로든 두둑 했겠지. 근데 아니잖아.'





아니다. 정말 아니다. 모르는 기술도 너무 많고, 세상에 받는 것은 있어도 주는 것은 거의 없다. 애인도 없고 배울 것 투성이고, 게으르고 실행력도 부족하다. 흐엉.





이것은 자기 비하도 아니고, 겸손도 아니다. 사실일뿐. 그래도 나는 여전히 만점짜리 인간이다.(?) 자의식을 부풀려서라도 살아남았으니까. 책 '역행자'에 따르면 과거엔 새로운 일에 도전했다가는 곰이라도 만나서 죽음을 면치 못했던 날들이 많았을 테니 우리가 시도나 도전을 좋아할 리 없고,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농경사회였으니 아직도 우리는 주변 평판에 엄청나게 예민하다고 한다. 또한 예전엔 다음날 먹을 거리도 보장할 후 없었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만족을 얻어야 했다. 그러니 우리가 아직도 먹을 것이 눈앞에 보이면 먹고 보는 것 아니겠는가. 작은 신호에도 빠른 판단을 내려버리는 편견도 주변의 위험신호에 민감해지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특별하거나 다른 인간이 아니라, 정말 보통의 인간이었다. 그야말로 그 긴 시간을 강한 치아도 발톱도 없이 생존하는 데 성공한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면서 오랫동안 품어왔던 오만가지 특성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세상은 바뀌었지만 오랜 습성은 버리지 못해서 장기적으로 생각하지도 못했고, 새로운 시도 앞에서 늘 주저했으니 자의식을 부풀리는 것으로 나 자신을 보호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지금까지 살아남은 정말 대단한 인류의 후예이고, 이제 수십억의 인구와 연결되어 있고, 새로운 시도가 환영받고, 당장 눈앞에 먹을 것을 먹지 않아도 먹을 것이 있으며, 생각보다 더 오래 살 수 있어 장기적인 수를 둬야 하는 변화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몸속 유전자에 각인된 이 시대에 맞지 않는 버그를 처리하며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할 때인 것이다.




이 뼈 때리는 자의식 해체의 과정을 거치면서 의외로 평화로워졌다. 자신의 현재 상태를 인정한 뒤에 오는 강 같은 평화... 색다른걸... 내 위치를 조금이나마 찾았으니 앞으로 나아가기가 조금 수월해진 기분이다. 실천이 받쳐주질 못하면 이마저도 또 자의식에 물을 줄 수 있으니 책에서 배운 것을 바로 쓰고자 글을 썼다. (이 책은 독서와 글쓰기를 아주 강조한다.)




다행히 아직 생이 앞에 놓여있다. 그리고 살아남았으니까 아직 기회는 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떻게든 나를 보호하려고 안달일 테니까. 고마운 나. 하지만 결국엔 끝까지 나를 지킬 수는 없으니 나의 자의식이 나의 눈과 귀를 막고 나를 지켜주려고 해도 눈과 귀에서 그 손을 떼고 말해줘야지. 아프더라도 감당하겠노라고. 그것부터가 시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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