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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유록 May 12. 2022

아주 심기

김태리도 하지 못했던 것

그는 서울의 중심, 한남동 한복판에 살았다. 그의 집을 드나들 때 사람들에게 눈인사하면서 나는 정말 한 번도 뿌듯함을 느끼지 않았었나? 그와 함께 걸어 다니며 트로피를 손에 쥔 사람처럼 당당하지는 않았었나? 외모, 재력, 능력까지 나는 모든 것을 평가하는 사람이었다. 그것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인양 굴었지만, 그것들이 주는 편안함과 우월감을 누구보다 원하고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떠나지 않을 정도로, 딱 견딜 수 있을 만큼 심술을 부리곤 했으니까. 그래도 온통 황금색으로 도금한 그 텅 빈 남자를 손에 꼭 쥐고 놓지를 못했다. 트로피 안엔 사랑이 없었음에도.  그는 오랜 공복에 바스락 씹어 먹은 김 한 장 같았다. 짭조름한 바삭함에 눈이 번쩍 뜨였으나 절대로 나를 배불리 지 못했다.





그는 캐나다인이었다. 캐나다에서도 퀘벡 출신이라 프랑스어가 모국어였지만 영어도 유창하게 구사했다. 중국어도 읽을 수 있고 스페인어도 일상회화는 가능하며 불어를 하니 이태리어도 곧잘 했다. 지금은 미국으로 떠났지만 한국에서 지낼 땐 한국어 공부도 열심히 했다. 늘 무언갈 열심히 하는 친구였다. 이직 준비를 하면서도 새벽 6시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한국을 떠나게 된 이후에도 한국어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도 있고, MBA 자격증도 있는 똑똑하고 매사 열심히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그런지 만족이라곤 몰랐고 비꼬기를 좋아했으며 감정표현엔 늘 서툴렀다. 나 역시 엄격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서인지 그런 그가 이해되기도 하고 한편으론 안쓰러웠다. 내가 사랑을 표현하면 그는 냉소적인 유머로 상황을 모면하곤 했는데 나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출국날엔 종로 한복판에서 눈물을 쏟아 나를 당황시켰다. 이 정도의 마음인데 왜 그리도 표현을 못했을까. 되받지 못하는 나의 애정표현만이 우리 사이를 낙엽처럼 뒹굴었는데... 눈 내리는 종로에서 우산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흘리는 그가 애처로웠다. 트로피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내가 아니었을까. 사랑의 말을 자주 듣지 못한 사람들은 아예 그 말을 하지 못하거나 그 말을 듣길 바라며 조건적으로 남들에게 사랑을 표현한다. 전자이거나 후자이거나 마음이 쓸쓸한 것은 매한가지이다. 그 시절 우리는 쓸쓸했다.







이제 그는 미국 보스턴에 살고 있다. 나를 만나고 얼마 안 되어서 직장에서 해고 통고를 받아 혹시 내가 악연인가 싶어 걱정스러웠지만, 결국 원하는 곳에 가서 잘 지내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전 세계가 고통받고 있었으니 그 아름다운 도시도 예전 같진 않았겠지만, 서울은 너무 복잡하니까. 그는 보스턴으로 떠나자마자 나를 미국으로 초대했었다. 함께 뉴욕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자기 어머니가 계신 마이애미에서 휴가를 보내자고. 믿을 수 없는 그의 제안에 마음이 구름처럼 떠올랐다. 형체도 없는 마음이 너무 떠올라서 주체할 수조차 없었는데, 그는 곧 다시 생각 보니 자기는 아무것도 약속해줄 수 없다고 말을 바꾸었다. 여행은 와도 괜찮지만, 미래를 약속할 수 없으니 서로 마음만 아플 것 같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솔직했을 뿐인데 그 당시에 나는 그가 아주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경찰서에 가서 국제 면허증도 만들고 2년짜리 미국 비자도 받았는데, 결국 미국 땅을 밟지 않았다. 그를 보지 못하는 사실에 슬프기보다는 자존심이 상했다. 자존심이 상하면 끝난 것이다. 상대가 나를 대우해주기만을 바라면 이미 막판까지 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를 세 번째 만났을 때 그가 결혼을 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만남을 이어가면서 그가 그때까지도 많이 아프다는 것도 알았다. 외롭지만 뜨겁지는 않은 마음은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야 만다. 아무리 센 척을 하더라도 외로운 사람은 티가 나니까 나는 그런 그가 안쓰러웠다. 상처를 입어도 괜찮다며 그를 추앙하고 싶었지만, 그를 보듬지 못했다. 오히려 남은 무엇이라도 털어가고 싶었다. 나 역시 뜨겁지 않았으니까. 그저 누구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관계 맺기가 두려운 사람들은 누구라도 괜찮다는 선택지에 자주 빠지곤 한다. 나는 그 선택지에 오래 갇혀서 작은 관심에도 크게 반응했다.








남해에 내려와 과거를 추억하면 그 추억 속에 있는 내가 마치 다른 사람이 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진다. 온갖 드라마들, 장문의 메시지, 폭음, 지독하게 따라붙던 두려움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것을 내가 의도적으로 만들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는 게 너무 재미가 없어서. 그놈의 재미란 것이 정말 더티하도록 없어서 작은 일에도 온갖 감정을 써버리며 끝장을 보려고 했던 것이다.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 주인공의 삶이란 자고로 온갖 스펙터클 한 서사로 가득해야 하는 것이니까.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처럼,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길 바랐다. 도시는 너무 크고, 나는 너무 작았다.





지금 나는 나만의 각도로 살짝 틀어서 유유히 공전하고 있다. 거대한 인생이라는 중심의 인력을 느끼면서. 아침에 눈을 뜨면 거리끼는 느낌이 아무것도 없다. 같이 사는 친구들과 고양이에게 인사를 건네고 좋아하는 호밀 크래커에 크림치즈를 발라 커피와 먹는다. 어떤 날은 계란을 삶아 먹기도 하고 어떤 날은 크래커 대신 빵을 먹기도 한다. 아침엔 늘 어느 정도 멍해서 대체로 아무것도 안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내가 채워나갈 수 있는 크기의 하루가 놓여 있다. 쌀에서 현미로, 단 디저트 빵에서 식사빵으로 서서히 식습관을 바꿔나가는 재미를 느끼고 있고, 만보기에 10000이라는 숫자가 찍히는 희열감을 느끼려 제자리걸음도 불사한다. 운동에 슬슬 재미가 붙어서 고전 중의 고전인 마일리 사이러스 다리 운동과 티파니 허리운동을 시작했다. 클래식은 영원하다고 마일리 사이러스 다리 운동을 하고 나면 갓 태어난 새끼 기린처럼 걸어 다니게 된다. 플리마켓에 나가서 팔 액세서리를 만들 준비를 하고, 내일은 동네 경로잔치에 가서 노래를 부를 예정이다. 곧 있을 남해대학교 군 가요제에도 나가볼 생각이다. 예전부터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고, 노래도 마음껏 부르고 싶었는데 만들어서 팔라고 해주고, 노래도 부르라고 해주니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격이다. 남해의 이곳저곳을 취재해 군 블로그에 올리는 일도 겸하고 있다. 좋아하는 팝송을 따라 쓰고 영어 대사를 따라 말한다. 아주 작게 매일 영어 공부를 하고 아주 작게 매일 새로운 것을 공부한다. 예전의 나는 곧장 끝장을 보고 싶었는데, 지금 나는 야금야금 무언가를 한다. 아무도 모를 정도로 정말 조금씩 변하면서. 아무도 모르니까 첩보 영화를 찍는 것처럼 아주 스릴 만점이다. 풀이 자라듯이 아주 조금씩, 하지만 분명하게 자라고 있다.





이제 술에 취한 상대를 너무 빨리 보고 싶지 않다. 바닥까지 한 번에 달려가고 싶지 않다. 적당히 거리감을 두고 싶고 적당히 불편해하며 가까워지고 싶다. 술이 꺼내놓는 그 사람 마음속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너무 일찍 만나고 싶지 않다. 오래오래 데면데면하고 싶다. 여전히 인정받으면 기분이 좋고 오해를 사면 억울하지만 나 혼자서도 충분히 따뜻한가 보다. 누군가에게 와락 안기고 싶지 않으니. 왜 이제 조급하지 않을까. 항상 뒷목과 어깨가 알게 모르게 바짝 긴장해 있었는데 이제 아주 말랑 말랑하다. 작물마다 잘 자라는 조건이 있듯 나도 내가 더 잘 자랄 수 있는 조건이 있는데, 그 조건이 맞는 곳에 옮겨 심긴 것일까.





얼마 전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다시 보았다. 내가 시골에 산다고 하니 다들 내가 '리틀 포레스트' 속 김태리처럼 살고 있는 줄 생각해서 벤치마킹을 좀 해보려고 봤지만, 온갖 음식을 1인분씩 손수 만드는 그 바지런함을 나는 도저히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남해에도 택배는 정말 잘 오고, 맛있는 반찬가게도 있는 걸. 텃밭에서 야채를 따다 먹는 정도가 현재 내가 따라 할 수 있는 최선이지만 언젠간 영화 속 김태리처럼 철마다 제철 재료로 한 상 차려 소중히 먹을 수도 있겠지. 요즘 처음으로 5년 뒤 내 모습이 기대되기도 한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말미에 김태리는 시골에서 1년을 보낸 후 다시 서울로 간다. 시골로 '아주 심기'를 준비하러 간 것이었다. 아주 심기란 양파가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도록 다시 한번 더 다른 곳에 심는 것인데 이렇게 아주 심은 양파는 더 달고 맛나다고 한다. 서울에서 16년. 그곳엔 내가 원하는 것이 없었다. 너무 많은 사람, 너무 많은 자동차, 너무 많은 가게, 너무 많은 정책, 너무 많은 행사. 소화해 내기가 버거운 것들 투성이었다. 지하철에서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있었고, 매연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동네 이웃 주민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이중 도어록으로 문을 잠그고 작은 모니터 속 세상을 보며 배달음식을 먹는 것도 재미가 없었다. '인 서울'을 책상 맡에 붙여놓고 공부할 땐 그렇게 서울로 '인'하길 원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 입어도 보지 않은 옷을 그토록 사고 싶어 했던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한번 입어봤더니 내 옷이 아니었는데, 옷을 사느라 들인 노력이 아까워서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고 벗질 못했다.





담장이 낮아서 집 안이 훤히 다 보이고, 밤이면 개구리 소리가 들리고, 여름엔 바다로 바로 빠져들 수 있는 이곳이 좋다. 보스턴에 사는 그와 나는 아직도 SNS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곤 한다. 친구도 연인도 아니지만, 과거 어떤 한 시간을 공유한 사이로 남아있다. 사진 속 그는 예전보다 훨씬 더 편해 보인다. 겪어야 할 것들을 다 겪어낸 사람의 얼굴이다. 나는 아직 겪을 것들이 더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남해에서 이 마음 그대로 경제적으로도 편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다. 누군가를 채워주는 관계도 가꾸어 보고 싶다. 영화 속 김태리도 시골에서 경제적 자유와 사랑은 이루지 못하고 영화는 끝났다. 나도 아직 도시에서 길어온 땔감을 지펴서 하루하루를 데우는 중이다. 도시의 삶은 내게 시골에서 뿌리내릴 자원을 주었으니 내가 이곳에서 아주 심어질 수 있도록 남해가 주는 것들을 먹으며 풍성히 자라날 생각이다. 경로잔치에서 노래도 부르고, 남해군에 관한 글도 쓰면서. 소소하고 특별한 하루를 켜켜이 쌓아 가다 보면 나만의 작은 숲에서 먹고살며 사랑하는 이야기도 들려줄 수 있겠지. 김태리도 못했던 리틀 포레스트, 그 뒷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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