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에서 만난 사람들, 그러다 취한다
선생님은 방충망까지 몽땅 열어 젖히셨다. 창밖에서 시원한 아침 바람과 방충망 필터도 없는 풍경이 쏟아져 들어왔다.
남해 새벽 요가에서 만난 선생님은 원예치료사로 활동하시다 이제는 은퇴를 하시고 남해 에 있는 한적한 산 속에 손수 집과 작은 갤러리를 지으셨다. 갤러리 안에는 수채물감으로 그린 남해가 가득했다. 푸른 나비 두 마리가 그려진 그림에 마음을 쏙 빼앗겨 품에 안고 나왔다. 그림은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니 그림값은 나중에 돈 벌어서 달라며 신용도 없는 방 문객에게 그림을 넘기셨다. 좋아서 웃는 내게 선생님은
"그거, 남해야."
하셨다. 나비 두 마리가 꽃밭에서 놀고 있는 것 같은 그 그림은, 남해섬이었다. 흙 냄새 가득한 집안으로 들어서니 한창 작업중인 커다란 캔버스가 떡 버티고 서있었다. 캔버스 안 에서는 작은 배 한 척이 큰 바다를 가로 질러 어딘가로 항해 중이었다. 피아노를 지나 윗 쪽으로 올라가보라는 말씀에 피아노를 넘어 책장을 밟고 위로 올라가니 또다른 방이 펼쳐 졌다. '작은 아씨들'에서 사랑도 마다하고 글만 쓰던 주인공 조이가 하루종일 틀어박혀 글 만 쓰고 있을 것 같은 다락방이었다. 책꽂이를 가득 채운 식물에 관한 책들과 시집, 그리 고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들은 선생님이 걸어온 시간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흙으로 지으셨나봐요?"
"내가 흙을 다 발랐지. 재미있으니까, 근데 너무 힘들어. 밖에 소주병 봤지?"
선생님이 소주를 연료 삼아 쉬지도 않고 지으셨을 공간에서 시와 그림을 즐기며 방충망도 없는 창으로 들어오는 남해를 들이켰다.
"좋은 걸 하면 안 좋은 것도 좀 섞어줘야 해."
파리에서 만났던 질 아저씨가 떠올랐다. 플러스가 있으면 마이너스는 자연히 따라온다고 했던 아저씨는 언제나 넉넉하게 웃고 계셨다. 낙차에 관해서 생각한다. 환희의 순간이 지 나면 부록처럼 따라오는 허탈감에 대해 생각한다. 사랑이 끝난 뒤에 감정이 끝날 때까지 빚쟁이처럼 쫓아오는 상실감을 떠올린다. 좋은 것을 원하려면, 그 뒤에 따라올 낙차를 견 디는 힘이 있어야겠구나. '좋은 것을 용감하게 좋아하려면 감당해낼 힘을 길러야겠구나.' 라고 썼다.
"방충망도 안 치시네요."
"방충망을 열어둬도 생각보다 그렇게 벌레는 들어오지 않아. 그리고 우리가 쟤네가 사는 곳에 들어온 것이지, 쟤네가 우리가 사는 곳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니까."
문을 열어두어도, 방충망까지 열어두어도, 걱정했던 것만큼 나쁜 것들은 들어오지 않았 다. 남해에 와서 어느 순간부터 거의 모든 것에 "예스"를 외치며 방충망도 없이 지내보았 는데 삶 속으로 들어온 것들은 필터도 없는 예쁜 것들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무례 하게 느낄 수 있었던 말들도 그저 열어두었더니 들어왔다가 나가버렸다.
요즘 '나는 바다다.'라고 가끔 생각한다. 바다를 자주 보아서 그런지 자신이 모든 것보다 크고 넓어서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다고 득도한 사람처럼 상상하곤 하는데, 상대방 의 말에 주제넘은 말을 붙이려다 말고 그저 받아들일 수 있어져서 좋다.
선생님께서 아로니아 발효 원액을 좀 주시겠다고 하셔서 깔대기와 병을 들고 선생님의 뒤를 밟아 뒤뜰에 있는 보물창고로 향했다. 선생님께서 항아리 안에서 익어가던 아로니아 원액을 한 국자 떠올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벌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선생님, 선생님, 벌 이요, 벌.' 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더니 '벌에도 좀 쏘이고 하는 거지.' 하시며 비파도 좀 가 져가라며 '비파'라고 적힌 항아리 뚜껑을 여셨다. 벌은 조금 두리번 거리다 날아가버렸다. 한 모금 들이켜보라고 주시는 비파액을 꿀떡 삼키니 꼭 술마시는 사람처럼 크아, 하고 탄 성이 터져나왔다. 선생님은 세월을 후루룩 들이켜는 나를 보며
"그러다 취한다."
하셨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런 일도 좀 겪고 그러는 거지.' 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이 되려면 얼마나 긴 항해를 해야할까. 시간이 만드는 맛은 너무 달고 귀해서 한 모금만 마셨는데도 갈증이 달아났다. 조금씩 아껴가며 감사히 마셔야지. 시간이 가는 것이 너무 아쉽고 달다.
남해가 그려진 액자와 시간이 넘실거리는 액기스 두 병을 소중히 품에 안고 선생님의 차 를 타고 작업실로 돌아왔다. 선생님은 작업실 앞뜰에 있는 식물들의 정체를 알려주시고는 나중에 글을 보여달라고 하시며 떠나셨다. 앞뜰에는 지난 세입자가 심어둔 것인지 누군가 가 먹고 씨를 툭 뱉고 가서 자라난 것인지 알길이 없는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로즈마리를 따서 물에 넣어 마셔도 되고, 왕성히 자라는 노란꽃이 달린 식물은 결명자이 니 알이 맺히면 따서 볶아 먹어도 된다고 하셨다. 석류도 있고 감도 있고, 국화도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정원 무식자에겐 그저 예쁜 나무고 풀이었는데, 선생님의 눈에는 모든 것이 저마다 다른 가치를 지닌 귀한 것들이었다.
그날 오후엔 친구가 월요일마다 읍내로 오는 타코야끼 트럭에서 타코야끼를 사들고 찾아 왔다. 우리에게 그 타코야끼는 일주일에 한번만 맛볼 수 있는 특별식이다. 그래서 작은 타 코야키 한 알을 먹으면서도 그 짭쪼름하고 뜨거운 맛에 감탄하며 신나게 웃을 수 있다. 요 즘 남해에서 만난 친구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어보며 책으로 엮을 준비를 하고 있어서 타코야끼 친구에게도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물어보았다. 친구는 좋아하는 영화인 '중경삼 림'의 주제가를 들으며 작업실 창문 한쪽에 그림을 그려주었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펜 가 는 데로 척척 그림을 그리는 친구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자신은 자신의 재능이 얼마나 빛이 나는지 알까. 앞뜰에 결명자가 자란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 결명자를 그려보려 했다 며 베시시 웃는 그 친구는 누군가에게는 그저 한 사람일 뿐일지 몰라도, 내 눈에는 이제 너무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원래는 모두가 사랑아닐까
- 김형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