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에서 만난 사람, 틈을 사랑하는 H
H는 스트리밍을 하지 않고, 좋아하는 곡이 있으면 다운로드를 받아서 음악을 듣던 때를 그리 워 한다. 데이터가 늘 모자랐던 척박한 데이터 환경에서 음악을 스트리밍해서 듣는 것이란 쉽 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진짜 좋아하는 곡을 고심해서 고르고 골라 음악을 핸드폰에 다운로드 받았다. 그렇게 핸드폰을 채운 자신만의 데이터 프리 플레이리스트를 보면 괜시리 마음이 푸 근해지곤 했던 것이다. 늘 부족한 데이터 사정은 H에게 음악 하나 하나의 소중함을 알려주었다.
한계가 만드는 것들이 있다. 옷을 좋아하는 내 친구 한 녀석은 어릴 때 돈이 부족해서 사고 싶은 옷들을 사지 못하니, 양말이라도 자신이 정말 사고 싶은 것을 샀다고 한다. 그는 H가 다 운로드 받을 음악을 고르듯 아주 아주 신중하게 신을 양말을 골랐는데, 덕분에 그 친구의 발 목은 언제나 센스가 넘쳤다. 한번도 보지 못했던 패턴의 양말이 그 친구의 트레이드 마크였 고, 자리에 앉았을 때 슬며시 드러난 그 친구의 양말은 그 친구의 정체성이었다. 친구는 늘 할 수 있는 선에서 멋을 부렸다. 한번도 그 친구가 멋지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그 양말들을 골랐 을 시간들을 떠올리면 괜시리 그 친구가 더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가수 나얼은 말했다. 아마도 생떽쥐베리가 쓴 책 '어린왕자' 속 어린왕자도 그런 이야길 해었 던 것 같은데, 무언가를 하기 위해 들인 시간이 그것을 더 가치있게 만든다고. 가수 나얼은 좋 아하는 뮤지션의 LP판을 사기 위해 LP가게를 뒤지며 을지로를 누비고, 충무로를 누볐다. 그 러다 찾던 LP판을 찾으면 내적 환호성을 내지르며 가슴에 그것을 소중히 품고 집으로 돌아갔 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LP판을 들으며 보물찾기에서 승리한 기분을 만끽하는 것이다. 자 신만의 보물찾기를 하는 사람들은 슬플 틈이 별로 없다.
H는 대학교에서 광고를 전공했지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인스타그램이라는 SNS계정에 꾸준히 그림을 그려 사람들에게 보여줬고, 사람들은 그런 H의 꾸준함과 H의 그림 을 좋아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H는 모든 것이 싫어졌고, 자신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 아졌고, 자신의 모든 그림을 인터넷 세상에서 지워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H의 그림은 인 터넷 세상에서 영영 자취를 감추었다. 그땐 왜그랬는지 모르겠다며 H는 수줍게 웃으며 자신 의 그림을 내게 보여주었다. H의 그림은 기품있고 우아했다. 그림 속 여자는 슬퍼보였지만, 아름다웠다. H는 MR. Doodle이라는 작가를 좋아한다고 했다. 자신은 그림을 잘 그려야한다 는 강박이 큰데, 낙서처럼 끼적끼적 그려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그 사람이 멋져보인다는 것이 다. 그리고 그가 그리는 그림은 겉보기엔 간단해보여도 그리기 어려운 그림인 것 같다고 했 다. 아무렇지도 않게 슥슥 그런 그림을 그리고 사람들에게 편하게 보여주는 그의 태도를 H는 닮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H는 자신의 그림에 신중하고, 그래서 H의 말과 행동 하나 하 나하는 귀한데, H는 좀더 가벼워지고 싶어 하는 듯했다.
"흑백 그림이 좋아요. 저는 무채색에 미친다니까요." H는 말했다.
"왜?"
알록달록한 색들을 좋아하는 나는 물었다.
"채색을 하는 것이 어려워서 흑백을 좋아하긴 하는데, 흑백으로 이렇게까지 표현할 수 있 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림을 보면, 너무 좋아요. 정말. "
예전에 어떤 그림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작가는 자신이 표현하기 어려운 것은 글로 쓴다고 했다. 그렇게 그림 일기를 그리기 시작했고, 그런 그림 일기를 사람들이 많이 사랑 해주어서 지금까지 계속 그리고 있다고 했다. 가령 학교 배경을 그리기 어려우면 사람 뒤에 '학교' 라고 쓰는 식인 것이다. 모든 것을 그림으로 그리라는 법은 없으니 자신이 할 수 있 는 방법을 총 동원해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들도 충분 히 멋지지만, 자신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무언가를 해내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이 할 수 있 는 선에서 최고로 멋진 것을 내놓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귀여운 뻔뻔함과 용기를 보면, 나 도 모르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곤 한다.
중학교 때 잠시 다녔던 미술학원 선생님은 내게 일 년 내내 연필로 하는 뎃생을 가르치셨 는데, 미술학원에 널려있는 아무 소품이나 주워오셔서 그리라고 하는 식이셨다. 지금 생각 해보면 소품은 날로 디테일이 더해갔고, 색깔도 다양해졌던 것 같다. 어느 날 선생님은 말 씀하셨다. 빨간 소화기를 그리는 날이었는데, 이것이 빨간 색이라고 생각하고 그리면 검정 색 연필로 그린 이 소화기도 빨간 색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그린 그림에 몇 개 의 선을 더하는 것 만으로도 그림을 대번에 살아있게 만드는 선생님을 신뢰하고 있었고, 그 래서 빨간 소화기를 그리는 내내 검정색 흑연이 묻어 나오는 선을 그리면서도 이것은 빨간 색이라고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이것은 빨간 색이야. 이것은 헝겊이야. 이것은 빛이야.' 그림을 그리는 내내 주문을 외우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흰 종이에 검정색 4B연필로 그림을 그리면서도 말이다. 그렇게 그린 그림은 정말 빨간 색 같았고, 헝겊 같았고, 빛이 내리쬐는 것 같았다.
H가 매력을 느끼는 그 흑백의 매력은 상상하는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검정과 흰색 만을 사용하면서도 그리는 내내 생각했을 것들을 상상하는 매력. 얼마 전 아이슬란드에 다 녀온 작가가 쓴 에세이를 읽었는데, 아이슬란드의 풍경을 그림으로만 담아내어 진짜 아이 슬랜드의 풍경을 상상하는 재미가 있었다. 사진이 없는 것이 오히려 좋았달까.
부족한 것들은, 한계가 있는 것들은, 내가 들어갈 틈을 주어 오히려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