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없고 셰어 메이트는 있습니다.
6년 전 당시 언니의 남자 친구(현 형부)는 살던 집 계약이 만료되면서 잠시 지낼 곳이 필요했고, 어차피 곧 언니와 같이 살 것이니 언니와 내가 살던 집으로 잠시 들어와 같이 살기로 했다. 다니던 직장이 집에서 지하철로만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이었기 때문에 이참에 나는 직장 근처로 살 곳을 찾아보았다. 언니가 형부와 결혼을 해서 신혼집으로 나가면 다시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었기 때문에 두세 달 머무를 곳을 찾아보았고, 그러다가 셰어하우스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셰어하우스에서는 개인방을 쓸 수 있고, 두세 달 정도 단기로 머물 수도 있어서 당시 내 상황에 딱이었다. 셰어 메이트를 구하는 사이트가 따로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 보편화되어 있으니 여자들만 지내는 곳에 가면 별일이야 있겠냐며 사이트에서 직장 근처 지하철역 명을 넣고 적당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직장에서 걸어서 십분 거리인 데다가 사진작가이자 세계여행을 다니는 분의 집을 찾아냈다.
그분은 3개월 정도 중동 쪽으로 도보여행을 떠날 계획이라 그동안 자신이 지내는 방에서 지낼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 집은 방 세 개짜리 빌라로 내가 들어갈 방을 제외하고도 방이 두 칸 더 있어서 다른 직장인 여성 두 명과 같이 사용하게 된다고 적혀있었다. 글쓴이가 쓴 다른 글을 검색해보니 예전에 셰어하우스를 구하는 글도 여러 개 남아있었다. 글에 남긴 전화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어보니 여성분이셨고, 신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서로 주민등록등본도 보여줘야 한다고 하여 신원은 어느 정도 확인되는 것 같아 퇴근 후 들러보았다. 집은 엘리베이터 없는 빌라 5층이고 깨끗했다. 한 벽 가득한 책과 옛 비디오테이프, 곳곳에 붙은 사진들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물고기 모양의 다양한 오브제들이 가득했다. 물고기가 그려진 러그, 물고기 모양 접시, 물고기 모양 수저받침대 등등. 물고기가 가득한 집의 가장 큰 안방을 사용할 수 있었고, 다른 방엔 메이크업 아티스트 한 분, 또 다른 방엔 미디어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 한 분이 살고 있었다. 집주인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때마침 대학교 선배셨고, 교직 경력이 있는 것까지 같아서 경계심은 차츰 사라졌다. 출퇴근 시간도 벌고, 책장에 꽂힌 많은 책을 편하게 읽을 수도 있다고 하시니 월 45만 원씩 드리고 여행을 따나신 동안 집주인 분의 방을 3개월간 사용하기로 했다.
서른이 넘어서 시작한 타인과의 동거였다. 다른 내 친구들은 결혼을 할 때 셰어하우스 생활을 시작했다. 나와 생김새도 살아온 과정도 다른 타인이 꾸려온 공간에서 직업도 성향도 다른 타인들과 공유하는 삶. 단순히 밤 10시가 넘으면 소음에 주의해야 하고 욕실 후 개수대에 낀 머리카락을 그때그때 정리해 버려야 한다는 에티켓을 배운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퇴근 후, 약속 후. 어쩌면 가장 편안한 시간을 공유하는 것은 약속 장소에서 친구를 만나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책장엔 어떤 책이 꽂혀 있는지, 쉬는 날엔 무엇을 하는지,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돌아온 날엔 어떤 음식을 먹는지, 부모님과 말다툼을 한 후엔 어떤 행동을 하는지 여과 없이 드러났다.
어린 시절 엄마와 같이 생활을 했던 기억이 거의 없다. 엄마는 아침 일찍 일하러 가셨고 밤이면 맛있는 것을 들고 아빠와 함께 귀가하셨다. 우리 네 식구는 거실에 빙 둘러앉아 그날의 사냥감을 먹고 배를 통통 두드리다 잠들었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은 언니와 나를 데리고 목욕탕에 가셔서 우리를 차례로 눕히시고는 깨끗이 씻기셨다. 아빠와는 생활을 어느 정도 공유했다. 청소를 규칙적으로 하셨고, 언니와 나의 교육에 열을 내셨고, 깔끔하게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중요시 여기셔서 늘 우리의 교복을 빳빳하게 다려 주셨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두 분 다 보통의 사람들보다 깔끔한 분이셨던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음악적 취향이 있으신지, 취미는 무엇이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시절 가정을 갓 꾸린 여느 젊은 부부들처럼 먹고사는 것이 너무 바빠 그런 취향을 누리실 여유가 없으셨으리라. 두 분 다 바쁘셨고 특히 어머니는 쉬지 않고 무언가를 하셨다. 항상 머리를 정수리 근처까지 높이 하나로 묶고 입술엔 빨간 립스틱을 바르시고는 생기 넘치게 움직이셨다.
그렇게 자신의 취미생활을 포기하시고 언니와 나는 피아노 학원도 보내주셨고, 집엔 피아노도 한 대 놓아주셨다. 생활공간에 악기가 있는 것이 삶을 훨씬 풍부하게 만든다는 것을 배웠다. 돌이켜보면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는데도 피아노 한 대가 있는 유년 시절은 꽤 그럴싸해 보인다.
스무 살이 넘어서는 고향에서 떠나와 서울에서 친언니와 둘이 살았다. 언니와는 나이차가 꽤 있어 어릴 때는 거의 언니의 영향을 많이 받진 않았는데 둘이 딱 붙어살게 되니 언니의 생활도 내게 꽤 많이 스며들었다. 언니는 드라마를 보면서 울고 웃으며 스트레스를 푸는 집순이였다. 외모를 가꾸거나 옷을 사는 일에는 돈을 잘 쓰지 않지만 맛있는 것을 먹는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토요일에 언니와 치킨 한 마리를 시키고 오후 다섯 시부터 열 시까지 예능을 이어 보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다.
같이 살아야만 알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가족과 함께 살 땐 인지하지 못했다. 어려서이기도 했고, 너무나 당연해서. 성인이 된 후 타인과 함께 사는 것은 정말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사람이 오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가 오는 것이라는 말이 있던데, 그 사람과 같이 살아야 그 사람의 세계에 좀 더 가까워진다는 말이 본뜻에 더 다가갔다고 본다.
우리 가족 중엔 수집가가 없기 때문에 수집하는 사람과 살아본 적 없다. 당시 세계여행을 떠나 내게 자기 방을 렌트했던 셰어하우스 집주인 언니는 수집가이자 맥시멀 리스트였다. 집안 곳곳이 틈도 없이 여러 가지 물건들로 가득했다. 언니의 물건들은 날 숨 막히게 했다. 같이 살던 메이크업 아티스트 언니는 전라도 사람이라서 그런지 국을 하나 끓여도 육수를 우려내었고, 음식을 정말 잘하셨다. 같이 나눠 먹는 것도 좋아하는 만큼 상대가 나누지 않으면 섭섭해하기도 했다. 휴일에 자고 있는 나를 흔들어 깨워 마트에 가자고 해서 기겁했던 기억이 남았다. 쉴 틈이 필요했다. 다른 동생은 집에서 밥을 잘 먹지 않았고 스트레스를 받은 날에만 퇴근 후에 늘 비빔면 두 개를 끓여 먹었는데 찬물에 헹구지 않고 따뜻한 비빔면에 그냥 소스를 넣어 비벼먹었다. 늘 차게 헹군 면에 소스를 비벼 먹던 나라 따뜻한 비빔면을 먹는 모습은 참 기이한 광경이었다. 그 친구의 취향이라기보다는 채반에 받쳐서 물기를 빼고 찬물에 헹구는 귀찮음을 따뜻한 비빔면보다 더 싫어해서 늘 따뜻한 비빔면을 먹었던 것 같다. 비빔면은 차가워야 제맛인데... 아무리 피곤해도 괴식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친구로서 직장동료로서 그 사람을 만났다면 절대로 몰랐을 사람들의 세계가 함께 살아보니 내게 왔다. 그리고 그 틈에서 내가 몰랐던 내가 보였다.
수집가 집주인 언니는 여행을 끝내고 홀쭉해져서 돌아왔다. 걷는 여행을 좋아하는 언니는 자기 몸만 한 배낭을 메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걸으셨다고 한다. 사막도 보고 쏟아지는 별도 보고 여러 위험을 건너 빽빽하게 물건이 가득한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해외여행이라고는 동남아 패키지여행밖에 가보지 않았던 내 눈에 언니는 너무 용기 있고 멋져 보였다. 여자 혼자서 해외여행을 몇 개월이나 훌쩍 다녀오고 그것도 알제리 사막을 걸어서 건너다니... 게다가 자기가 사는 공간을 렌트해주는 알뜰함까지 가졌다니, 이제껏 보지 못한 생활방식이었다. 이후 나는 셰어하우스를 만들어 타인들에게 내 공간을 빌려주고 여행을 떠나게 된다.
당시 나를 좋게 보아준 언니는 여행 후에도 간간히 저녁식사에 초대해 각국의 여행자들을 위해서 소파를 내어주는 카우치서핑에 대해 알려주고 그렇게 만난 외국인 친구들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하루는 한국에 여행 온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만두를 빚었다. 고기를 먹지 않아 두부로 만든 비건 만두였다. 처음으로 비건을 만났다. 고기를 안 먹는 삶도 있구나. 자신의 신념을 식습관으로 표현하는 사람을 만나 함께 두부 만두를 빚고 노래를 불렀다. 외국인들과 얼큰하게 취한 내게 언니는 영혼의 방학을 추천했다. 너의 영혼에도 방학을 주라는 말이 묘하게 설득력 있었다. 놀라는 말은 또 잘 들어야지. 실제로 언니네 집 소파를 빌리러 온 각국의 여행자들을 만나니 못할 것 도 없다 싶었다. 게다가 언니가 검증된 호스트들을 추천까지 해준다고 하니 마지막 용기를 짜내어 홀로 유럽여행을 떠났다. 세계여행가 언니를 만나지 못했다면 하지 못했을 선택이다.
공항 화장실에서 복대를 옷 안에 잠가 차고는 벌벌 떨면서 유럽에 도착해 소매치기가 가득하다는 소문으로 악명 높은 프랑스 북역을 지나 파리 17구역에 사는 언니가 추천해준 호스트 질 아저씨를 만났다. 질 아저씨는 땀범벅이 되어 집을 찾고 있는 내 눈앞에 요정처럼 뿅 나타났다. 한 손엔 와인을 들고. 영화에서만 보던 프랑스식 인사인 비쥬(볼 키스)를 나누고 아저씨는 집을 보여주셨다. 집엔 창이 많아 햇볕이 잘 들었다. 집안 곳곳에는 아저씨가 그린 그림, 모은 예술품, 손수 만든 가구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마치 작은 박물관이나 갤러리에 온 것 같다는 착각을 일으켰다. 직접 칠하셨다는 노란 벽 때문인지 집안이 생기로 넘쳤다. 아저씨는 가난한 소파 여행자에게 다락방을 3일 간이나 빌려주셨다. 찾아오느라 고생했다고 크게 웃으시고는 파스타를 뚝딱 만들어 와인과 함께 대접해주시기까지 했다. 불안해할 나에게 언니를 만났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본인의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그리고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내 이야기도 들어주셨다. 그렇게 프랑스인 질 아저씨의 인생도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질 아저씨의 인생철학은 간단했다. 인생을 믿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바라면 인생은 원하는 것을 준다는 것. 정말 원하는 것을 모르는 것이 문제지, 일단 바라면 인생은 준다고 했다. 그리고 바랐으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셨다. 삶에는 빛도 있고 어둠도 있음을,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질 아저씨는 알려주셨다. 인생을 믿고 순간을 살라고 하셨다. 그리고 감정을 가두려고 하면 결국 터질 것이라고 쌓이지 않게 표현하며 살라고 하셨다. 이것이 파리지앵의 인생철학인가? 트라우마를 치료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체조도 해봤는데 다리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벌벌 떨리다가 잊고 싶었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개운함을 느꼈다. 무슨 사이비 종교도 아닌데 믿고 싶었다. 프랑스식 철학도 이 체조도.
나는 인생에게 무엇을 바랐길래 이런 삶을 준 걸까?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새로운 것. 새로운 삶. 내가 해왔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는 것. 나는 그것을 원했다.
다음날 눈을 뜨니 아저씨는 나가고 없으셨고, 주황색 주스와 메모가 남아있었다. "Have a good day, Linda"라고 적혀있었다. 내 영어 이름은 Lina인데... 내 이름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만들어준 건강주스를 마셨다. 아저씨 집에서 생활 루틴은 늘 같았다. 맛있는 아침을 먹고 온갖 야채를 착즙한 주스를 마시고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신 뒤 깨끗하게 씻고 밖으로 나가서 파리를 즐겼다. 이리저리 걸어 다니다 해피 아워엔 맥주를 한 잔 하기도 하고 공원에 가서 한 숨 늘어지게 자기도 했다. 뤽상부르 공원이 내 단골 낮잠 스폿이었다. 하루는 베네수엘라에서 춤을 가르치는 여행자가 와서 함께 마이클잭슨 춤을 추었다. 저녁엔 빔으로 영화를 보기도 하고, 치즈를 곁들여 와인을 마시며 아저씨와 수다를 떨었다. 간호보조에서 삽화가, 만화가, 그리고 이제는 IT컨설턴트로 살고 계신 아저씨는 한 달에 10일 정도만 일을 하고 여행을 다니신다고 했다. 화장실엔 아저씨가 다닌 콘서트 티켓과 비행기 표가 벽 한가득 붙어 있었다. 벽장엔 시디가 가득했다. 취향이 여유를 만든 건지 여유가 취향을 만든 건지 모르겠으나, 취향과 여유가 있는 아저씨가 멋져 보였다. 여유는 없지만 취향이라도 갖자. 좋아하는 마음에 민감해지자. 화장실에 갈 때마다 다짐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셰어하우스를 만들어 타인들과 함께 살았다. 의대 편입을 준비하는 약학대생, 하루에 틴더로 남자를 다섯 명씩 만나는 프랑스인 여대생, 캐나다에서 결혼을 약속한 남자와 헤어지고 한국으로 돌아온 프로그래머 등등. 궁금한 이야기Y는 보지 않아도 될 만큼 다양한 사연의 인생이 내 삶으로 들어왔다. 약대생과 같이 살 땐 예쁜 애가 부지런하기도 엄청나게 부지런해서 덩달아 부지런해졌고, 틴터녀 프랑스인 친구는 내 옷이 다 너무 천이 많다며 엉덩이만 겨우 가리는데 성공한 바지를 선물로 주었다. 그 친구는 티브이쇼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보면서 한국어 공부를 해서 한국말 구사력이 조금 아기 같았다. 항상 어온니~ 하면서 나를 부르고, 매일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를 포장해 와서 먹고 사천 짜파게티를 끓여먹었는데도 몸매가 환상적이어서 유전자를 탓하기도 했다.
남해에서 나는 아직도 한 남자와 인생을 함께 하지 않고 (못하고?) 셰어 메이트들과 살고 있다. 에이아이(셰어 메이트 1)는 앱등이라서 덩달아 아이패드와 최신형 아이폰에 입문해 노트에 펜으로 글을 쓰던 내가 이제 아이패드에 글을 쓴다. 메리골드(셰어 메이트 2)는 감정표현이 풍부하고 일 욕심이 많아서 일하고 분노하고 분노하고 일하고를 반복하는데 감정표현도 잘 못하고 일하기도 싫어하는 나는 메리골드의 삶을 관찰하는 것이 무척 재미있다. 일을 사랑하는 메리골드 덕분에 나도 일을 좀 더 사랑하게 되었다. 이번엔 고양이까지 더해져 고양이와 함께 하는 삶을 글로 썼다. 이 글은 포털 사이트의 간택을 받아 4만 9천 뷰라는 쾌거를 기록했다. (깨알 자랑)
혼자가 편하다는 사람들로 가득한 사회에서 나는 이렇게 부대끼고 부대끼며 살고 있다. 거의 부대찌개 짬뽕인 내 인생은 의외로 맛깔난다. 욕실에서 자빠져도 일으켜줄 사람이 있고, 음식을 했으면 설거지는 하지 않아도 되어 개이득이다.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고 한 사람과 찌인하게 살아갈 날도 꿈꾸지만, 지금도 나쁘지 않다. 우리는 지금 내가 유튜브를 보고 맛이 너무 궁금해서 만든 딸기 두부 티라미수를 퍼 먹고 있다.
"으음~~ 맛있어!"
메리골드는 좋아하며 먹고 에이아이는 한번 먹어보고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정말 이상하고도 맛있는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