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에서 만난 사람, 책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C
C에게는 매년 한번씩은 꼭 꺼내어 읽는 책이 있다. 열 다섯살이 되던 해에 책의 표지에 마음 을 빼앗겨 처음 읽게 된 후로 1년에 한번은 꼭 다시 읽었다. 그는 올해 스물 다섯. 10년 동안 그 책과 함께 자라며 처음엔 도통 이해가 되지 않던 문장들과 조금씩 친해졌다.
"열 다섯살에 읽었을 때랑 열 일곱, 스물, 스물 셋, 이렇게 나이를 먹으며 읽었을 때의 느낌 이 매번 너무 확연하게 달라서 매년 한 번은 꺼내 읽고 있어요. 처음엔 작가가 왜 사랑하는 사 람에게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삿포로에 가자고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스물 세살 되던 해였나, 알바를 하다가 그 문장을 읽는데 너무 좋더라구요. 이제 사랑도 좀 알게 되고 취 향도 생겨서 그런가 봐요. 저도 나중에 사랑을 하게 되면 꼭 삿포로에 같이 가자고 할 거에요."
작가 이병률의 여행기, 책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와 십 년을 함께 보낸 C는 이제 그 작가와 여행관까지 닮아버렸다. C의 여행에서는 이름난 관광지에 가는 것보다 어떤 사람들과 어떤 이야기를 만들었는 지가 가장 중요하다.
"저는 한 권으로 끝나는 에세이 책이 좋더라구요. 긴 소설보다는요. 책을 많이 읽진 않지만, 마음에 들면 계속 읽는 편이에요. 좋아하는 문장들에 줄도 긋고 사진으로 찍어도 두고 꺼내 봐요. 근데 사실 책이 질서정연하게 책꽂이에 꽂혀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제일 좋아요."
C는 자신만의 세상을 만드는 것을 가장 즐긴다. 자신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고, 돈을 모아 서 어렵사리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구해 오직 자기만을 위한 전시회를 연다. 어쩌다 마음에 드는 책이 생기면 책꽃이 예쁘게 꽂아두고는 생각날 때마다 이리 저리 뜯어보고 곱씹으며 자 신만의 세계로 들여 보낸다.
그는 올해 1월에 남해로 왔다. 너무나 치열하고 많은 것이 버려지던 패션계를 떠나서 고요한 남해로 온지 이제 8개월. 남해에 아주 오기 전부터 빠르게 변하는 업계에서 일하는 것보다 잔 잔한 남해 바다를 보면서 캠핑을 하는 것이 좋았다고 한다. 거의 매주 남해로 캠핑을 떠나오 던 그는 남해의 한 어촌 마을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잡고 무작정 남해로 왔다. 그는 이곳에 서 남해를 닮은 티셔츠를 만들고, 바다가 주는 것들을 모아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인테리 어 소품을 디자인 한다. 물고기를 담던 나무 상자를 그러모아 씻고, 자르고, 갈아내어 도시에 서 온 아이들과 함께 액자를 만든다. 아름다운 일들만 가득한 것은 아니지만, 그중에 아름다 운 일이 분명히 있어 괜찮은 날들이다.
10년 전에 자주 들르던 곳이 있었다. 실내에 커피 볶는 향이 가득해 다녀오고 나면 옷과 머리 카락에 커피향이 지독하게 베이도록 만들던 곳. 책장엔 책이 빼곡히 꽂혀 있고, 선반에는 텔레 비전에서는 들어 본 적 없었던 음반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곳은 누군가가 미리 정해놓은 답을 찾는 것에만 익숙했던 내가 나의 무언가를 만들게 해주었다. 책을 꺼내어 읽었고, 커다란 스피 커로 음반을 골라 들었다. 공간의 주인은 가끔씩 들을 때마다 다른 것을 느끼게 하는 앨범을 추 천해 주었고, 십 년간 그 음악들과 함께 나이를 먹었다. 가을이면 조니 미첼을 들었고, 겨울에 는 듀크 조던을, 초여름엔 본 아이버를 들었다.
요즘 남해에서 가끔씩 음악을 골라서 틀어주는 DJ가 되어보곤 하고 있는데, 어쩌다가 사람들 을 모아 재즈를 같이 들었다가 일이 조금 커졌다. 누군가가 오랫동안 들으며 나이를 먹어갈 음 악을 만나게 해줄 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괜시리 어깨가 으쓱거리면서 동시에 무거워 지곤 한다. 십 년이라는 시간이 나도 누군가에게 음악을 소개해줄 어떤 세계를 만들어주었다.
얼마 전엔 사람들을 모아서 재즈를 들으려는데 누군가가 알은 척을 해왔다. 십 년 전 내가 자 주 들렀던 그 보물창고의 설계자였다. 남해에 들릴 일이 있어 나를 깜짝 놀래켜줄 생각으로 갑 자기 찾아온 그의 등장에 간담이 서렸다. 그 앞에서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니 얼굴이 달 아올랐지만, 내가 열어줄 수 있는 세상만큼 보여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니 식은땀 을 닦으며 준비한 음악들을 내어놓았다.
그와 나는 요즘 듣는 음악과 살아온 이야기를 나눈 뒤 헤어졌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도 그때 들었던 음악을 이야기 하며 재즈의 당김음이 어떠니, 누구의 피아노가 어떠니 하는 이 야기를 킬킬 거리면서 주고 받았다. 요즘 자주 듣는 음반이라며 또 다른 세계를 열어주고 그는 떠났다. 서로의 취향을 아는 사람과만 나눌 수 있는 언어가 있다.
C는 남성복만이 가진 선이 좋아서 대학에서 남성복에 대해 공부했는데. 남자모델의 신체 사이 즈를 재는 것이나 거의 남자밖에 없는 업계에서 여자로서 일을 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지금은 남해에서 늘 그가 마음을 빼앗겼던 그 간결하고 힘 있는 선을 담아 많은 것을 만들어 낸 다. 남성, 여성이라는 신체적 차이를 넘어선 취향을 담은 무언가를 남해에서 하는 일에도 녹여 내고 있는 것 같다. 무언가를 오래 좋아한다는 것은 삶의 방향을 오랫동안 이끌어가기도 하는 것이다.
C는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삿포로로 함께 가자고 했을 때, 웃으면서 자신도 C를 사랑하노 라고 말해줄 사람을.
마냥 웃다가 한 마디만 내뱉어도 오랫동안 쌓아온 자신만의 세계를 단번에 알아줄 사람을.
별일 없었던 하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키득 키득 웃으며 둘만 알법한 농담을 나눌 수 있을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