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에서 만난 사람, 취향이라는 보물을 품은 K
"나는 쉽게 나의 세계를 열어 보여주고 싶지 않아. 나는 내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아부어 만 든 내 취향은 내가 허락한, 아주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보여줘."
K는 말했다. 그는 자신의 취향을 보물처럼 자신만의 방에 숨겨 두고는 아무에게나 꺼내주지 않는다. 그의 선택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조금씩 그의 세상을 조금씩 열어볼 수 있다. 그 러니 K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당신이 조금 마음에 든다는 뜻일지도 모 른다. 그러고보면 처음 그를 만났을 때와 지금 그는 내게 아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처음 엔 온몸으로 나를 경계하고 있었는데, 경계심을 조금씩 풀며 아주 아주 조금씩 문을 열어준 다. 그를 이해하게 되면 될 수록 나는 웃음이 많아졌다. '사랑스럽다'라는 말이 사람이 된다 면 저런 사람이 아닐까? 안전하고 행복한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고 싶은 그는 언제나 경비태 세일 수밖에 없지만,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하고 싶어하는 듯하다. 그는 매사에 열심히니까. 좋아하는 것에도 싫어하는 것에도, 슬퍼하는 것에도 사랑하는 것에도.
어쩌다 남해에 오게 되었지만, 그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공간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 세상은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놓은 그만의 안식처이니까. 남해에 점점 좋아하는 것들이 늘어 서, 해야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늘어나서 점점 안식처에 돌아갈 길이 아득해지고 있지만 마 음 속에 그런 곳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에게 숨쉴 틈을 줄 수 있길 바란다. 이곳에서도 그 는 좋아하는 것들을 은밀히 닌자처럼 즐기며 주변을 보살피고, 사람들을 위해 복숭아를 깎아 주고, 궂은 일은 누가 하기도 전에 먼저 해치워 놓는다. 많은 것들을 신경쓰고 배려하느라 그 는 언제나 홀로 아늑한 동굴 속으로 들어가고 싶을 것이다.
나는 아주 조금씩 그의 세상에 대해 물어보고 있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만의 동굴 속으 로 조금씩 뒤따라 걸어가고 있다. 자칫 너무 놀라 이만 나가달라며 '쾅!'하고 문을 닫지 않을 만큼의 속도로.
갯벌 속 조개처럼 가끔씩 엿보이는 그의 동굴 속 세상은 그야말로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질만큼 그 동굴의 깊이는 깊고 화려해보인다. 지금까지 알 게 된 K에 대해서 써도 되냐는 물음에 감사하게도 그는 허가증을 내어주었다. 나는 아직 그 의 동굴 초입에 서 있어서 특별히 허락을 받은 것 같다. 언젠가는 그의 동굴을 속속들이 탐험 한 뒤에 글로 담고 싶지만, 만약 그런 행운을 얻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사 랑스러운 K만의 사랑 표현법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작은 것에도 크게 놀라곤 하면서 K는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한다. 아니, 어쩌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굴곡진 이야기를 사랑한다. 라디오로 공포 이야기를 들으며 샤워 를 하고, 음악도 치정극이나 전쟁영화의 O.S.T.를 즐겨듣는다. 일을 하면서 그는 전장으로 들어선다. 웅장하게 울리는 전쟁 영화 음악을 들으며 밤을 새워 일을 해낸다. 전쟁처럼 사는 그에게 일은 마르지 않고, 그 일들을 모두 잘 해내고 싶은 그는 전쟁 영화 속 영웅이 되어 눈 앞에 닥친 일들을 해치운다.
가장 위험한 것들을 알고 나면 많은 것들을 대비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밑바닥을 알고, 알 면서도 인간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한번은 좋아하는 드라마의 O.S.T.음악을 들려주며 이 드라마의 시작 영상이 어떻게 드라 마 속 전개에 맞춰서 달라졌는지 비교해주었다. 드라마를 볼 때 나는 늘 이 시작 영상은 건 너 뛰어버리곤 했었다. 곧바로 이야기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나와는 달리 K는 창작자들이 세계관을 어떻게 만들어가는 지에 큰 가치를 두었다. K의 설명을 들으면서 봤더니, 똑같아 보이던 인트로 영상이 정말 미세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드라마 속에서 정의가 깨어졌을 때, 인트로 영상 속 눈을 가리고 저울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상이 미세하게 금이가는 식이었 다. 그런 것들을 들으며 보니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냥 건너 뛰어버리는 이 시작 영상까지 드라마 내용을 생각해가며 공을 들인 그 누군가가 정말 멋지게 다가왔다. 작업물을 표현해 내기 위해 누가 어떤 작업물에 어떤 디테일을 더했는지, 그가 어떤 부분에 신경을 쓰는 사 람인지 K는 알고 있다. K는 그런 숨은 멋짐을 알아보고, 그래서 K가 좋아하는 것들은 언 제나 보이는 것보다 더 멋지다.
디테일을 알아보는 그라서 작은 것까지 챙기느라 늘 분주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부분까지 도 잘 해내고 싶은 그의 마음을 알기에 그렇게까지 하지 말라고 속없이 말할 수가 없다. 그 의 숨은 멋짐을 속속들이 존경할 수밖에.
보이는 것에 쉽게 마음을 빼앗기곤 하던 나는 K 덕분에 좀더 자세히 보기 시작했다. 보이 는 것 이면에 있는 것들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불편하게 느껴지던 인간의 어두운 면 까지 들여다보려고 한다. 듬성 듬성, 표현할 수 없는 느낌과 정확하지 않은 이름만 가득했 던 나의 세계에 튼튼한 뼈대와 기둥이 세워지고 있다. 무언가를 안다는 오만함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K. 얼마나 그의 동굴이 깊은지 가늠도 되지 않아서 언제나 그의 말은 귀하다.
K는 흐린 날의 바다를 좋아한다. K는 바다색도 하늘 색도 모두다 회색빛으로 흐려서 어디 까지가 바다인지 어디까지가 하늘인지 알 수 없는 바다를 보러 카메라를 들고 바다로 향한 다. 맑은 날, 윤슬이 반짝이는 남해 바다를 좋아하는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가 노래하는 바다는 언제나 에메랄드처럼 푸른 빛이지 않은가.
경계가 없는 것, 구분짓지 않고 유연한 어떤 것으로 녹아들고 싶은 그는, 많은 것을 챙기 느라 날 세워진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 오늘도 자신만의 동굴로 숨어든다.
많이 속상해도 많이 울어내며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없는 어둡고 아늑한 자신만의 세계에서 힘을 내어, 다음날을 또 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