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ssic (2010)
파란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창문 곁에 폭신한 쿠션이 깔린 식탁의자를 바짝 몰아세워 놓고는 그 위에 앉아서도 키가 부족해 무릎을 꿇은 채였다. 아이는 캄캄하다고 생각하며 하염없이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창문틀에 기대어 턱을 괴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이의 등 뒤로, 집안에는 여전히 아기를 재우기 위한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가득 진동하고 있었다. 아이의 어린 동생을 재우며 아이의 어머니가 틀어 놓은 CD였다. 아이가 채 인식조차 하지 못한 사이에 아기는 잠들었는지 고요했다. 눈이 감겼다 떠졌다. 아직 다섯 살도 채 채우지 못한 아이는 귀를 기울였다. 잠이 넘어와 자꾸만 고개가 기울어졌다. 창밖으로 검은 승용차 한 대가 고여 있는 물을 가르며 지나쳐 갔다. 그에 아이는 민감하게 반응하여 창밖을 내다보았다. 초침은 계속 달리고 있었다. 오래도록 아이는 그 자리 그대로였다. 아직 시계를 읽을 줄 모르는 아이는 어림짐작으로 열 시쯤일까-하고 생각했다. 창 밖으로 건너편 세탁소 아저씨가 가게를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맛비가 요 며칠 전부터 쏟아지는 바람에 낮이고 밤이고 아이의 눈에는 마냥 캄캄하기만 하여 짐작키가 더 어려웠다. 아이는 괜히 뜻도 모르는 시계를 빤히 쳐다보며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거냐고 혼잣말로 투정을 부렸다. 다시 고개를 돌려 비가 내리는 창밖을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아이가 애가 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CD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럽게 유난을 떨더니 다시 첫 번째 트랙으로 돌아갔다.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금 들은 적 있을 법한 음악이 습한 공기를 타고 흘렀다. 그럼에도 어쩐지 고요한 방구석이었다. 아이가 창가에서 방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몇 걸음 너머에 방문이 있었고 열려 있었다. 거기서 또 한참 뒤에 방문이 하나 더 있었고 그 열려 있는 틈새로 누워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둘 모두 미동도 않았다. 아이는 문득 무서운 기분이 들며 목이 시큼하게 아려왔다. 아이는 또 한참 두 사람을 응시하였다. 동생인 듯한 아기는 소리 없이 잠들어 있었다. 동생을 보며 아이는 소름이 돋았다. 결국 다시 몸을 돌려 창 밖을 향했다.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이는 2층에 사는 장난꾸러기 오빠가 수도꼭지에 호스를 이어 뿌리고 있는 건 아닐까, 멈추지 않고 퍼부어 내리는 빗줄기가 신기했다. 이제 창 밖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차도 없었다. 종종 움직임이 느껴져 쳐다보고 있노라면 도둑고양이가 반짝이는 눈을 한 번 마주치고는 스쳐 지나갔다. 시각은 새벽 한 시를 넘어섰다. 앓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살짝 돌리니 문 틈 너머로 누워 있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의 귀에 들리는 것은 똑딱이는 시계 초침 소리와 빗소리, 그리고 방금 전부터 새삼 느끼게 된 어머니의 신음 소리였다. 아이는 덜컥 울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입을 앙 닫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후로는 시계 초침 소리보다도 빗소리보다도 젊은 엄마의 앓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혹여나 그마저도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당장이라도 그 방에 쫓아 들어가 엄마를 꼭 끌어안고 배를 토닥이는 엄마의 손길에 기대어 잠이 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목을 죄어오는 그 표정과 답답함이 다시 생생히 느껴지는 것 같아 몸이 파르르 떨렸다. 의자 위에 양반 다리를 한 채 양손을 다리 사이에 끼고 다시 멍청하게 시계를 쳐다보았지만 역시나 그 세 바늘이 잇는 각도가 의미하는 바를 깨우치기엔 부족했다. 아이는 시선을 새빨간 향기가 진동하는 그 방으로 옮겨 이번엔 아기를 보았다. 그 옆에 있는 딸랑이와 젖병, 기저귀 등도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 귀엽다는 핑계로 볼을 꼬집어 댄 탓에 아직도 아기의 볼 어귀가 파리하였다. 그것을 느끼고 아이는 엉엉 소리 내어 울었지만 더 이상 나올 눈물이 없는 듯했다. 벌써 꽤 오랜 시간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탓이었을 것이다. 엄마의 빨간 잠옷에 아이는 겁이 났다. 아이는 문득 배가 고팠다. 그리고 점점 아이가 이겨내기엔 역부족인 잠이 이어졌다. 하루 종일 친구들과 씽씽카를 타며 뛰놀기라도 한 듯 피곤함을 느꼈다. 없는 눈물을 짜내며 한참을 울다 아이는 지쳐 그렇게 잠이 들었다. 기다리던 사람은 여태 오지 않은 채였고 더 이상 엄마의 앓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창밖엔 여전히 푸른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한 남자와 여자가 있었다. 둘은 초등학교 동창이었고, 대학교에서 다시 만난 사이였다. 자연스레 친해지게 된 두 사람은 누구나 예상했듯이 연인이 되었고, 학교를 졸업하며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남자는 반듯한 직장을 얻었고, 여자는 아이 돌보기와 집안일에 정성을 들였다. 그러나 여자가 모르는 사이 남자는 변해가고 있었다. 직장의 스트레스를 엉뚱한 곳에서 해소하곤 했다. 직장 내 다른 여사원과 남다른 감정을 나누는가 하면 도박에도 손을 댔다. 그는 잘 나갔다. 회사원으로써도 도박꾼으로써도 남자로서도 그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그랬던 그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갑자기 게임이 반전되어 그는 돈을 모두 잃었고, 그 후로도 점점 말려 들어가기만 했다. 직장의 숨겨둔 애인에게 차이고 점점 정신을 잃었다. 그는 모든 것이 돈 때문이라는 착각에 휩싸였다. 그 후로 돈에 집착하게 되었고 그가 사랑했던 여자와 아기는 뒷전이었다. 직장에서 잘리고 그는 점점 더 도박에 미쳐갔다. 그에 필요한 돈은 모두 아내에게서 나왔다. 집에서의 소통이라고는 오로지 폭력과 협박뿐이었다.
아내는 마지막이라며 돈 봉투와 함께 서류를 몇 장 건네었는데 이혼 서류였음에 틀림없었다. 그는 매달렸다. 그러나 여자는 짐을 꾸렸다. 남자는 여자를 보낼 수 없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여자는 붉은 피비린내를 안방 가득 흩뿌리곤 쓰러져 그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이미 일어설 힘이 없는 듯했다. 그는 겁이 났다. 그는 마찬가지로 겁에 질린 자식의 눈을 보았다. 바들바들 떨고 잇는 아이에게 다가가 그의 큰 손으로 아이의 목을 따스하게 감싸 잡았다.
코 곁에 손가락을 대어보고 숨이 끊어짐을 확인했다. 죽은 듯이 잠든, 사실은 잠에 든 듯 죽은 두 아이와 죽어가는 여자의 곁에서 미친 사람처럼 한참을 중얼대고 울부짖다가 돌연 일어서서 도망을 쳐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켁켁대며 목을 감싸고 자리에 일어서 앉았다. 어린 동생은 이미 죽어 파리해진 인상이었고, 엄마는 비린내 가득한 눈으로 울고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가 생각해보니 목을 감싸 쥐는 아빠의 슬픈 표정이 떠올랐고, 아이가 기다릴 사람은 그 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아이는 그렇게 아빠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야근에 피로해진 몸을 소파 위로 힘없이 던지고는 더듬더듬 리모컨을 찾았다. 픽-하며 텔레비전이 켜졌다. 여자는 담담하게 화면을 쳐다보았다.
‘한 가정집에서 일가족이 사망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4살 배기인 첫째는 죽은 지 일주일 정도 되어 아기와 엄마가 살해된 뒤에도 얼마간 더 살아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남편이자 아빠인 용의자 김 모-‘
여자는 피곤한지 곧 텔레비전을 끄고 팔걸이에 머리를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