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 (2024)

찰토마토야, 찰토마토. 맛있어요.

by 김민주

토마토 (2024)


요즘 매일 저녁 산책을 하고 있다. 길을 잘 몰라서 처음엔 이리저리 찾아서 가야 했지만, 이제 익숙하게 길을 따라서 걷는다. 나의 산책 코스는 내가 매일 다니는 길과는 반대편으로 향해 있다. 골목을 따라 집에서 나오면 큰길로 나가기 전에 편의점이 하나 있다. 나는 산책을 시작할 때 그 편의점에 들러서 꼭 두유 같은 걸 하나 샀다. 편의점 앞에서 왼쪽으로 가면 내가 늘 다니는 출퇴근길이고, 직진으로 나가면 본 적 없는 길들이 나왔다. 처음 산책을 가는 날, 본 적 없는 길로 한 번 가보자 했던 것이 지금의 산책 코스가 되었다. 동생이 그쪽으로 가면 공원이 하나 나온다는 귀띔을 해준 것도 있었다. 얼핏 길을 들은 대로 편의점을 지나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얼마쯤 골목을 따라가다 보니 횡단보도 하나가 나왔다. 횡단보도 건너편에는 자그마한 마트 하나가 있었다. 마트를 끼고 오른쪽 골목으로 주욱 따라간다. 가파르진 않지만 경사가 없지도 않았다. 그리고 길을 따라갈수록 점점 경사가 심해졌다. 조금 힘든데, 싶을 즈음 왼쪽으로 난 나무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얼핏 비치는 가로등불에 의지하면서 계단을 찾아 올라가면 야트막한 언덕 위의 자그만 공원이 하나 나왔다. 낡은 벤치 몇 개와 운동기구 몇 개, 훌라후프 같은 게 아무렇게나 있곤 했다. 오늘도 그 길을 따라 그 공원에 갈 것이다.

편의점에 들러 두유를 하나 집었다. 항상 계시는 이 편의점의 사장님은 언제나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네오곤 했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내가 먼저 인사를 하고, 간혹 말을 걸기도 했다. 사장님이 새로운 담배가 들어와서 하나씩 나눠주고 있다며 담배 두 개비를 내게 건넸다. ‘다른 사람들은 다 한 개비씩만 줬는데, 두 개 주는 거야~?’ 그 말에 ‘우와, 정말요? 하하, 감사합니다.’라며 방글방글 웃었다. 내 두유를 계산하면서 ‘요즘 자주 먹네, 다이어트해요? 운동하는 사람들이 이거 많이 먹는 거 같던데.’라고 하셨다. 다이어트를 하는 건 아닌데, 산책을 운동이라고 할 수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대답을 얼버무렸다. ’어, 뭐, 산책 가는데 하나씩 먹게 되더라고요.‘ 사장님이 고개를 끄덕이곤 계산을 하다 말고 뭔가를 부스럭거리더니 빨간 뭔가를 두 개 내밀었다. ’찰토마토야, 찰토마토. 맛있어요. 산책 갔다 와서 먹어요.‘ 아이구, 안 주셔도 돼요, 사장님 드세요! ‘아냐, 많아~ 일하면서 간식으로 먹으려고 가져왔는데 너무 많이 가져와서~’ 거의 품에 들어오다시피 가까이 온 토마토 두 개를 안 받을 수가 없어서 양손에 하나씩 받았다. 꾸벅꾸벅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나왔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근처 학교의 대학생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우리 집 근처에는 자그만 술집들이 여럿 있었다.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웃는 모양을 밖에서 훑으면서 지나갔다. 어릿어릿 떠오르는 어떤 기억들을 그 술집들에 내려두고 길을 따라 나갔다. 횡단보도에 섰다. 건너편의 자그만 마트를 보니 대전에서 자주 갔던 마트가 생각났다. 그때도 사장님과 참 살갑게 인사를 하곤 했다. 사장님이 마트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면서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다. 그다음에 갔을 땐 새로운 사장님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장님이 얘기 많이 들었어요~라고 나에게 말했을 때는 깜짝 놀랐다. ‘제 얘기를요?’ 네네, 전 사장님이, 여기 자주 오는 머리 짧은 아가씨가 한 명 있는데 엄청 바르고 착하다고, 칭찬을 엄청 하시고 가셨어요~. 그 말에 울컥 마음이 쏟아져 나왔다. ’아아, 그러셨군요! 아이구, 감사하네요.‘ 얼렁뚱땅 인사를 꾸벅꾸벅 드리고 나왔다. 자그만 마트를 보면서 그 사장님을 떠올렸다. 실은 제대로 떠올리진 못 했다.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아, 기억은 참. 그런 생각을 할 때 신호등이 이미 바뀐 후라는 걸 알았다. 후다닥 뛰어 건너갔다.

컴컴한 공원, 낡은 벤치가 두 개 나란히 붙어 있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컴컴한 저녁에 사이좋은 벤치 중 하나를 골라 앉았다. 너네는 참 사이가 좋구나. 귀에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들었다. 노래 말고 다른 소리는 어떤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에게 있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초등학교 때 단짝친구, 중학교 때 도서부를 하면서 만났던 사서 선생님, 고등학교 때 동아리 활동을 같이 하던 선후배들, 어딘가에 두고 온 나의 기억들, 그 어딘가에 두고 온 나의 동네, 그곳에 두고 온 나의 친구들, 거기에 두고 온 나의 사랑들. 여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내 옆에 같은 방향으로 앉아 있는 벤치를 한번 쓸어 만져봤다. 아무도 없었다. 여기에는.


집에 돌아오면서 두유를 쪽쪽 빨아먹었다. 집 앞에서 편의점 사장님한테 받은 담배 두 개비를 연달아 폈다. 집에 들어와 빨간 토마토 두 개를 씻어서 하나는 동생을 주고 하나는 방에 들고 들어왔다. 사장님 말대로 정말 맛있는 토마토였다. 창 밖으로 친구들이 하나씩 인사를 하고 갔다. 안녕. 안녕. 너 잘 지내니? 토마토를 먹는데 자꾸 얼굴이 화끈거렸다. 토마토의 빨강이 옮겨 왔는지도 모른다. 안녕. 응. 나는 잘 지내지. 그걸 감추려는지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다. 울퉁불퉁 멋진 몸매에 빠알간 옷을 입고 새콤달콤 향기 풍기는 멋쟁이 토마토. 주스가 된다던가, 케첩이 된다던가, 춤을 춘다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안녕. 사실은 잘 지내지 못해. 보고 싶어. 쓸쓸하고 외로워. 토마토가 맛있다.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다. 내일 편의점에 들러 토마토를 어디서 사셨느냐 여쭈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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