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의 말> 8
손끝에 닿는 키보드의 표면이 매끈하다. 커피잔 아래 고인 물이 차갑다. 주먹을 쥐면 말랑한 손바닥이 느껴진다. 보기보다 묵직한 마우스를 한 번 들었다 내려놓는다. 흐느적거리는 옷자락과 단단한 테이블 다리를 비교해 본다. 각자 자기에게 어울리는 물성을 가진 것들이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문득 입을 열어 '마음-'하고 소리를 내본다. 그것이 부피나 중량, 형체 같은 것은 전혀 가지지 못한 채 시간에 붙어 함께 지나간다. 그러면 내가 '마음-'이라고 소리를 냈다는 사실과 귀로 들어온 소리가 뇌로 들어가 기억으로 남을 것 말고는 지금 이곳에 남는 물성은 없다. 테이블의 표면이나 일기장, 빨대, 벽, 의자 같은 것과는 다르게.
"마아으음-"
다시 한번 '마음'을 말해본다. 목소리가 카페 안에 울린다. 입 근처를 스윽 훑어보지만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는다. 허공을 휘적거려 봐도 손에 차이는 것이 없다. 그런데 그것과 상관없이 '마아으음-'의 유연하면서도 뾰족한 모서리가 또렷하게 느껴진다. 말이라는 것이 이렇게 비겁하다. 아주 모호하여 쉽게 확신해선 안되면서 동시에 몹시 선명하니 말이라는 것에 마음을 기대게 된다. 믿어선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 말고는 믿을 것이 없으니 그것이 믿음을 얻게 된다.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말은 허튼 마음을 받게 되고, 마음은 헛된 말에게 기대어 서로 불필요한 몫을 짊어지고 흔들리게 된다. 마음이 그런 일을 겪는 게 싫다. 안쓰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러니 마음을 떠밀어 본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고작 만져보거나 닮지도 않은 말들로 너를 대신하려고 하는 것밖에 없어. 그러니까 나를 떠나. 어디 여행이라도 가든지. 훌쩍 떠나버려. 이렇게 자포자기하며 한껏 떠밀어도 마음은 의리가 깊어 날 떠나지 못한다. 나는 내 마음을 어떻게 해주지도 못하는데 내 마음은 기어코 나에게 붙어있다. "나 갈 데 없어. 나는 네 마음이잖아." 나와 마음 사이에는 그런 정이 있다. 나 말고는 믿을 것이 없으니 마음은 성심성의껏 나를 믿는다. 어리숙하여 제대로 대해주지도 못하는데, 미운 정 고운 정이 쌓일 만큼 쌓여 서로를 놓지 못한다. 그것이 내내 미안하고 감사하니 나도 애쓰지 않을 수가 없다. 갈 데도 없다 하는데 내가 아니면 누가 내 마음을 지킨단 말인가. 내가 지키지 않으면 단단하게 정착하는 일도 하지 못하고, 바람에 떠밀리다가 녹아서 비가 되거나 우주 먼지 같은 것이 되어 내가 짐작도 할 수 없는 차원을 헤매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 어떡하냐고. 불쌍해서 어떡하냐고.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될 테고, 마음은 주인을 잃는다. 그러니까 나는 절벽에 겨우 한 손으로 매달려 달랑거리는 마음을 슬며시 잡고 "괜찮아, 내가 잡았어."라고 외친다. 그러면 마음이 "역시 너뿐이야."라며 빙긋 웃는다.
이런 상상을 했다. 내가 떠민 마음이 절벽에 매달려서 내 손 하나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상상 말이다. 내가 밀었으니 내가 잡았을 뿐인데 마음은 그마저도 고맙다고 빙긋 웃는 상상. 모처럼 제대로 바보 같은 상상을 한 셈이다. 둘 이상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판단할 때에는 반드시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사실과 상관없이 내 멋대로 결론을 내릴 것이라면 괜찮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말이다. 저런 나만의 상상 속 마음과 실제의 마음은 얼마나 일치할까? 모를 일이지만 확신할 순 없겠다.
한편 말은 마음과 닮은 구석이 있으면서, 사실은 생각과 더 가까운 관계일 수 있다. 생각은 들러붙는 편이다. 7편에서 다루었던 말의 끈적함과 비슷하다. 끈적함과는 별개로, 생각도 마음에서 비롯될 가능성은 있다. 반대로 생각이 마음을 움직이게 할 가능성 역시 있다. 둘의 관계가 명확하게 분리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둘의 관계성을 다루는 것이 아니니 분명하게 분리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나의 바보 같은 상상과 믿음이 마음과 생각 중 무엇과 더 가까울지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은 나쁘지 않다. 마음을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그럼 다른 상상을 해보자.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퇴근길의 지하철역 안이다. 덥고 습한 날씨에 모두 지쳐있다. 더군다나 퇴근시간인만큼 몹시 혼잡하니 그것만으로도 기운을 쓰고 있는 참이다. 그나마 이 길만 거치면 드디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에 기대감을 가지면서 마지막 힘을 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와중에 마음도 내일을 위해 퇴근길에 나섰다. 마음은 아주 정직하고 성실한 직원으로, 잔머리를 굴리거나 약삭빠르지 않아 그저 마음으로서 오늘도 온 힘을 다해 하루를 보냈다. 얼마나 고된 하루를 보냈는지 한 발을 내딛는 것도 벅차고 어깨가 무거워 곧 쓰러질 것만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데서나 드러누워 잠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자신을 그렇게 무책임하게 던져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으니 꿋꿋하게 발을 옮겨 겨우 이곳에 도달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만, 오늘을 잘 보냈으니 스스로 뿌듯하게 여기며 힘을 내기로 한다. 드디어 열차가 들어온다. 멀리서 들려오는 열차 소리와 역내에 울리는 안내 소리에 모두가 설렘을 느낀다. 열차 문이 열리고 줄줄이 들어가는 사람들 틈에 마음도 한 발을 들이민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 마음을 잡아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열차는 떠난 뒤였고 마음은 역에 남아 누군가와 나뒹굴고 있었다. 거짓이다. 거짓이 매달린다. "가지 마, 가지 마. 나 어떡하라고." 마음이 질색한다. "저 이제 가야 해요." 거짓은 아주 집요하고 끈질기다. 마음도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난처하다. 거짓이 물고 늘어질 것이 뻔하니까. 덥고 습한 여름날의 퇴근길, 사람들이 바글바글 들어찬 와중에 거짓과 마음이 엎치락뒤치락 실랑이를 벌인다. 그러는 사이에 다음 열차가 들어온다. 안내 방송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거짓은 마음을 힘껏 잡아당긴다. "가지 마, 너 내 마음이잖아. 어디 가는 거야. 나 혼자 두지 마." 열차가 떠나고 다시 들어오길 반복한다. 마음은 뾰족하면서도 마냥 모질지 못해 거짓을 떠나지 못한다. 피로로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와중에 거짓까지 매달려 있으니 버겁다. 유난히 하루가 길고 고되다. 이래선 이 지긋지긋한 하루가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마음은 거짓을 선뜻 뿌리치지 못한다.
물론, 전부 내 상상이다. 매달린 마음을 구해주는 것도, 피곤한 마음에게 매달려 있는 나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마음을 불쌍히 여기고, 슬퍼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입장이다. 마음의 입장을 들어봤냐는 것이다. 마음은 날 떠나고 싶을 수도 있다. 내가 지긋지긋해졌을 수도 있다. 이렇게 집요하고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 부담스럽고 싫을 수도 있다. 마음도 갈 길이 있을 수 있고, 지금은 이곳을 떠나야 하는 때일 수도 있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지난 화에서 '마음은 자연히 흘러가고 변하는 것'이라고 직접 말했으면서, 이렇게 끈적하게 마음에 들러붙어있는 나의 모습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나는 자연히 흘러가는 것들보다는 끈적하게 들러붙는 것들과 더 닮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자꾸 거짓이 되어버리고, 동시에 끈적한 것들을 싫어하게 되는 것이다. 나 같은 것들이 미운 거지. 이를테면, 동족혐오다. 내가 싫어하는 나의 면면을 다른 데서 알아채는 것이 불쾌한 모양이다. 마음도 알고 있듯이 나는 집요하고 끈질기다. 끈적거려서 한 번 마음을 둔 곳에는 지긋지긋하게 들러붙어 있는다. 그거 놔라, 너한테 필요 없는 거야,라고 주변에서 아무리 말리고 알려줘도 고집도 센 인간이라 잘 들어먹지도 않는다. "안돼. 이거 놓으면 나는 어떡하라고, 그럼 나 아무것도 없어." 더군다나 이렇게 겁도 많다. 여기까지 쓰니 확실해졌다. 겁 많고 생각 많은 거짓이 마음을 놓으면 마음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북적이는 지하철 역 안에서 지친 마음의 바짓가랑이를 움켜쥐고 울고 있다. "가지 마. 네가 가면 나는 마음이 없잖아."
왜 마음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거짓이다. 또 어떤 쓸데없는 거짓부렁이 믿음을 가지고 이렇게 마음을 못 살게 굴고 있는 것인지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자연히 흘러가는 것들에게 자꾸 마음을 주게 된다. 열차를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 떠나갈 텐데 나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조용히 말한다.
"마아으음-"
워낙 시끄러운 와중에 '마아으음-'은 옅게 사라진다. 거짓은 괜히 쓸쓸해하며 마음을 읊조리지만, 마음은 들러붙는 것이 아닌지라 흘러간다. 모두가 그와 같이 흘러간다. 거짓만 붙박이처럼 제자리에 두 발을 눌러 붙인 채 운다. 마아으음-, 마아으음-.
"마아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