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는 유비(類比)다
칸트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당분간 칸트를 떠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나를 위해서도 칸트는 한번 정리해야 할 것 같기도 해서다. 또 다음 달 독서모임 주제가 칸트이기도 해서, 보조 교재 용도로 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겸사겸사. 글을 쓰다 갑자기 어떤 단상이 떠올라서 잠깐 끄적여 보려고 한다.
라캉을 처음 읽을 때, 라캉의 삼계, 그러니까 상상계-상징계-실재계에 대한 설명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2차 저작을 여러 권 읽고, 인터넷 서핑을 통해 여러 글들을 살펴보았는데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두의 얘기가 조금씩 다르기도 했다. 특히나 어려운 것은 그중에서도 실재계였다. 상상과 상징을 넘어 있으면서, 상상과 상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실재계라니, 지금 읽어봐도 참으로 엄청난 정의다. (지금은 이게 어떤 뜻인지 비교적 명확히 알고 있다)
예도 선생님의 27시간짜리 라캉 강의를 다 듣고도 저 삼계에 대한 개념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어느 날 문득 유튜브에서 귀인을 만났다. 김필영 박사님의 [5분 뚝딱 철학]이었다.
김필영 박사님은 라캉 강의를 하시면서 강의 막바지에 “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라고 솔직하게 고백하신다. 다만 잘 모르겠다고 하시면서도 “라캉의 실재계는 칸트의 물자체에 비유하면 어떨까 싶다.”라고 하셨다. 실은 이게 내가 칸트를 읽기 시작한 계기다. 나는 라캉을 이해하고 싶어서 칸트를 읽기 시작했다.
칸트 입문서인 <왜 칸트인가>를 읽고 나서, 나는 비로소 라캉의 실재계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상징계를 칸트의 현상계에, 실재계를 칸트의 물자체에 놓고 살펴보면 그 구도가 선명해졌다. 그렇구나! 실재계는 물자체로구나! 비로소 라캉이 읽히기 시작했다.
지금은 라캉 완전 문외한을 대상으로는 간단한 강의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로 라캉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자 이번엔 칸트가 궁금해졌다. 칸트의 2차 저작들을 읽고, 결국 <순수이성비판>의 서문과, <형이상학 서설>을 읽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을 알았다.
실은 칸트의 물자체는 라캉의 실재계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상징계-현상계, 실재계-물자체의 구도 자체는 매우 통찰적이다. 김필영 박사님의 힌트는 탁월했다. 다만 이것은 유비(類比, 개념적으로 유사한 부분이 있음)에 불과하다. 세부를 살펴보면 아예 개념이 상정된 목적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나는 지금까지 실재계와 물자체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두 개념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과는 달라 생략하겠다)
비로소 중요한 것을 깨닫는다. 이해는 실은 일종의 오해다. 어떤 개념과 사유에 한 걸음 깊게 들어가면 내가 지금까지 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 오해는 반드시 필요하다. 오해가 없다면 다음 단계의 이해로 진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 <형이상학 서설>로 이해하게 된 칸트도 미래의 내가 돌아보면 오해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미셸 푸코가 구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미셸 푸코를 먼저 구조주의자라고 믿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푸코의 철학을 구조주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나서야 어째서 푸코의 철학이 구조주의가 아닌지 알 수 있다. 처음부터 푸코를 구조주의가 아니라는 관점에서 읽으면 아마 읽히지 않을 것이다.
엄밀함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어디까지 엄밀해져야 하는가? 덕분에 새로운 사유의 소재를 얻은 것 같다.
그나저나 예전에 소설가 시절에는 소설 본문을 쓰기로 하면 그렇게 블로그 포스팅이 하고 싶어 졌었는데, 이제는 독후감을 쓰려고 앉으면 슬슬 페북 포스팅을 하고 있네...? 이거 익숙한 구도인데?
혹시, 여기까지 읽고 라캉의 실재계와 칸트의 물자체가 궁금해진 분이 있다면, 아래의 글을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https://brunch.co.kr/@iyooha/49
https://brunch.co.kr/@iyooha/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