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군가 설교하는 모임을 만들지 않는다
꽤 오래전에 술자리에서 누군가의 이탈리아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비행기를 타고 유럽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의 기대감부터 시작되는 얘기였는데, 꽤나 긴 시간 동안 이어지던 그의 이야기는 3분 지점 정도부터 지루해지기 시작하더니, 곧 거북해지기까지 했다. 한 4분 지점부터는 나는 더 이상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왜 이 대화가 거북할까, 를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나에게 이 이야기를 공감할만한, 유럽 여행 경험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상대가 공감할 경험이나 관심이 없는 소재로 일방적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것을 언어적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여행 뿐만이 아니다. 누군가에겐 유학 경험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군대 이야기일 수도 있다. 와인이나 시가 같은 고급 취미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건담이나 에반게리온 같은 오타쿠 취미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겐 어떤 학문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어떤 사업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
공감할 만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상대가 하는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듣기만 할 수 밖에 없다. 직장 상사라면 '위계'에 의해서, 그저 지인이라면 '선의를 소모해서' 우리는 이야기를 듣는다.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누구나 학창 시절에 경험하곤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설교'라고 한다.
독서를 꽤 오랜 취미로 가지고 있었으면서 독서 모임에 나가지 않았었던 이유는, 많은 모임이 이러한(설교) 방식으로 운영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설교하는 자가 두 명이면 '대결' 형태로 변형되었다가(물론 토론이라는 명목으로), 그 대결의 승자가 결정되면 다시 설교의 형식으로 돌아간다. 대결 자체가 흥미로울 수는 있겠지만 모임 참가자들은 누구의 지식이 더 많은지 궁금해서 그 모임에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얼마 전에 내가 클럽장으로 있는 트레바리 클럽 [인생에 보탬은 안되지만] 멤버 중 한 분이 이런 피드백을 주셨다.
"개인적으로, <보탬 시즌3> 모임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 책 봤어? 이 주제 관심 있어? 니체 알아? 라캉 알아? 소쉬르 알아? 물리학 관심 있어?' 같은 질문에 대체로 "나 이거 너무 좋았는데, 너도 알면 우리 같이 호들갑 떨 수 있어~ 호들갑 떨어보자" 의 의미로 '아무말'을 할 수 있어서 <-- 인 것 같아요.
안타깝게도 어른이 되고 나서 만나는 (대개의) 사람들은, 관심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누가 더 많이 아는지 겨뤄보자' 로 받아들이고 그러한 stance 혹은 tone & manner 로 이야기를 하게 되니까 재미가 없어지거든요."
독서모임의 클럽장직을 수락하면서 내가 하고 싶었던 것 두 가지가 모두 여기에 있었어서 기뻤다.
우선 나는 '세상에 흥미로운 지식이 얼마나 많은지' 알리는 모임을 만들고 싶었다. 자기개발서나 재테크 책을 제외하고도 세상엔 재밌고 흥미로운 책들이 정말 많다. 처음엔 낯설지만 곧 재밌어진다. 그래서 나는 '대체 이런 것들이 왜 궁금하냐'는 멤버들의 피드백이 나올 때 마다 웃는다. 멤버가 '낯섬'과 마주쳤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선정하는 책 수준이 항상 입문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 것도 이 이유에서이다.
두번째, 나는 대화를 하는 모임을 만들고 싶었다. 발제문에 늘 포함되는 모임 소개글엔 이런 부분이 있다.
"우리는 안전한 대화 환경을 지향합니다. [보탬]이 하고자 하는 것은 대화입니다. 따라서 모든 멤버가 어떤 의견을 내도 안전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발언 환경을 제공하려고 합니다. [보탬]은 토론을 권장하지 않으며, 다른 멤버 의견에 대한 정면반박도 지양합니다. 의견이 다른 경우 반박이 아니라 질문을 해 주세요. 1:1 의견 교환은 핑-퐁-핑 정도까지만 진행되도록 저와 파트너가 대화를 조율할 겁니다. 이 규칙은 정규 프로그램 외, 뒷풀이와 번개 등에도 적용됩니다."
우리 모임은 토론을 하지 않는다. 나는 지식이 많은 누군가가 '설교' 형식으로 모임을 주도하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물론 나 자신의 발언 수준도 '설교'의 분량까지는 되지 않도록 늘 스스로를 감시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대화를 '아무말 대잔치'라고 한다. 정말 아무말이어도 된다. 혹은 '아무말이어야 한다', 우리는 멤버들의 발언 내용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다. 비로소 '안전해졌다'고 생각하게 된 멤버는 입을 열 용기를 얻는다. 이제 '대화'가 이루어진다.
오늘 받은 피드백에는 이 두 가지 취지에 대한 내용이 다 들어가 있어서, 정말 기뻤다는 얘길, 정신 차리고 보니 꽤나 길게 썼네.
이 모임의 우선순위가 인생에서 점점 올라가는 중이다. 큰일인데. 시작할 땐 이 정도로 재밌을지 몰랐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