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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Oct 14. 2023

과학적 다원주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장하석




<과학, 철학을 만나다> 완독, 주말 아침에 일어나 간단한 후기를 남긴다.


캠핑장에 가서 불멍을 할 때 마다 나는 신비감에 휩싸이곤 한다. 대체 뭔가 ‘연소한다’는 물리적 상태는 왜 존재하는 걸까? 연소의 결과로 나타나는 저 불꽃은 어디에서 나타난 건가? 그걸 우리는 어떻게 볼 수 있는 걸까? 


생각해보면 정말 신기한 일이다. 나무는 셀룰로스라고 하는 긴 탄수화물 체인으로 되어 있는데, 나무에 충분한 열이 가해지면 셀룰로스가 메탄, 수소, 탄소, 일산화탄소 등으로 분해된다. 이 중 몇 가지 분자가 공기중의 산소와 결합하여 기체가 된다. 뜨겁게 가열된 기체 분자는 광자를 방출한다. 이 광자는 750 나노미터 정도의 파장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파장이 우리 망막에 닿으면 시신경은 뇌에 750 나노미터의 파장이 망막에 닿았다는 전기 신호를 전달한다. 그러면 뇌는 우리에게 불꽃을 만들어 보여준다. 비로소 우리는 깨닫는다. 아, 불꽃이구나. 불꽃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불꽃은 실은 전기신호다.


지금이야 뇌과학과 신경과학이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에게 알려주지만, 아마 과학 이전의 사람들에겐 이 현상이 매우 신기해 보였을 것이다. 불꽃은 어디에서 나타났을까? 물이 어는 현상은 액체였던 물이 고체로 굳어졌다고 생각하면 되지만, 나무가 탈 때 불꽃은 어디에서 나타난 걸까? 아마도 나무 내부에 불꽃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그랬다. 라부아지에가 산소를 발견하기 전에(엄밀하게 말하면 라부아지에가 산소를 발견한 건 아니지만) 사람들은 모든 물질 안에 플로지스톤이라는 물질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 플로지스톤은 일종의 신비로운 지방질인데, 매끄럽고 반반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종이는 반질반질하지만 종이를 태우면 푸석푸석해지지 않는가? 이를 두고 18세기 초 사람들은 연소 과정을 통해 종이가 플로지스톤을 잃었다고 여긴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금속이 녹슬어서 금속회(calx)가 되는 것도 같은 과정으로 해석되었다. 가연성 물질이 타는 것과 금속이 녹스는 것을 본질적으로 같은 과정으로 본 것이다. 금속은 매끈매끈하지 않은가? 매끈한 금속이 지방질인 플로지스톤을 잃으면 녹이 스는 것이다. 게다가 지방은 번들거리고 불에 잘 탄다. 말 되지 않는가? 현대 과학을 배운 우리에겐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리지만, 플로지스톤 이론은 당시에 연소의 과정, 금속의 본질, 생화학 작용을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광범위하고 훌륭한 이론이었다.


그런데 프랑스의 화학자 라부아지에는 이 플로지스톤 이론의 치명적인 모순을 발견한다. 천칭으로 무게를 재는 것을 좋아했던 라부아지에는 금속에 녹이 슬면 질량이 증가하는 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녹이 슨다는 것이 플로지스톤을 잃는 것이라면, 녹이 슨 후 질량이 줄어야 이치에 맞는 것이 아닌가? 금속뿐만이 아니었다. 인과 유황 등도 태우면 질량이 오히려 증가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라부아지에는 대담한 발상의 전환을 시도한다. 태우면 질량이 증가한다면, 뭔가를 잃는 것이 아니라 뭔가는 얻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라부아지에는 산소를 발견했다. 라부아지에의 발견은 플로지스톤 이론을 뒤집는 화학혁명으로 이어진다. 플로지스톤을 추종하는 학자들과, 라부아지에와 산소를 추종하는 이들은 맹렬하게 경쟁했다. 이 두 이론은 타협의 여지가 없었으다. 그리고 이 전쟁은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산소론의 승리로 돌아갔다. 플로지스톤 이론은 현대에 와서는 이름조차 남지 않았고, 우리는 라부아지에를 현대 화학의 아버지라고 배운다. 토머스 쿤 식으로 말한다면 플로지스톤 패러다임이 붕괴되고 새로운 산소 패러다임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의 작가, 캠브리지대 장하석 교수는 그것이 과연 좋은 일이었느냐고 묻는다. 아니, 올바른 패러다임이 틀린 패러다임을 밀어내고 정상과학이 되었는데 그게 좋은 일이었냐고? 필연적인 과학의 발전이 이루어진 것뿐인 것 같은데, 여기에 뭔가가 더 있단 말인가? 장하석 교수님의 생각을 조금 더 따라가 보자.


패러다임의 경쟁은 산소론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산소론이 모든 것을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 논의가 왜 시작되었는지 첫 지점으로 돌아가보자. 이 논의는 연소이론 대한 논쟁이었다. 라부아지에는 물질이 타는 것은 산소와 화합하는 것이고, 가연성 물질이 연소하고 나면 산화물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산소와 화합한다고 해서 왜 열이 발생하는 걸까? 현대 과학은 이에 대해 에너지 이론으로 답변하지만 이 에너지 개념은 라부아지에로부터 70년 뒤인 1850년대에 정립되었기 때문에 라부아지에는 에너지에 대해 몰랐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관점으로는 다소 엉뚱해 보이는 주장을 한다.


당시 라부아지에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라부아지에는 열을 일종의 화학 물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물질에 열소(caloric, 우리가 알고 있는 칼로리의 그 칼로리가 맞다)라는 멋진 이름도 붙여 주었다. 그는 산소가스가 산소와 열소의 화합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현대 화학은 열소 역시 플로지스톤과 마찬가지로 허구적인 것으로 보지만, 이 열소 이론은 당시에도 큰 비판을 받았다. 예를 들어 화약은 기체가 아니라 고체 상태로 있는데, 주변에 산소가 없어도 잘 타고 폭발한다. 그렇다면 화약이 연소할 때 나오는 열의 출처는 어디인가? 이러한 공격을 받았지만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이론을 끝까지 밀고 나갔고, 결국 어이없지만 현대 화학의 아버지는 당시 프랑스 화학 교과서 제1장에 열소의 성질과 역할에 대한 내용을 적으셨다.


여기까지 알고 나면 플로지스톤 패러다임의 전복이 과연 과학의 발전에 얼마나 기여한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불완전한 패러다임이 불완전한 패러다임으로 바뀐 것뿐이다. 만약 플로지스톤 이론이 계속 살아 남았다면 어떨까? 19세기 후반 영국의 오들링은 플로지스톤 개념을 그대로 뒀더라면 그 이론은 자연스럽게 에너지 이론으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산소와 화합하여 열을 발생시키는 주체는 에너지다. 무엇인가 물질에 깃들어 있었던 것, 연소 과정을 통해 물질 밖으로 나오는 것, 플로지스톤은 실은 에너지와 꼭 닮은 것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장하석 교수의 주장은 이러하다. 새 패러다임이 옛 패러다임을 전복하고 새로 일어서는 혁명적 혹은 단절적 발전은 통쾌하고 재미있기는 하지만 과학의 발전 측면에서 보면 이득이 별로 없는 것이다. 그 보다는 과학 한 분야에서도 가능한 한 여러 실천 체계를 발전시키고 유지하는 다원주의를 장하석 교수는 제안한다.


일반적으로 과학은 일원주의를 추구한다. 우리가 아직 진리를 얻지 못했다고 해도 과학은 그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과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다. 현재 진리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쿤의 패러다임이다. 장하석 교수가 제안하는 다원주의는 이와 다르다. 이렇게 독점하지 않아도 정상과학의 이점은 충분히 살릴 수 있으며, 오히려 경쟁 패러다임이 있어야 패러다임은 자기 안의 모순을 검토하고 보완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우리는 양자역학이 패러다임인 시대를 살고 있지만, 일상생활 범위부터 태양계 스케일까지는 뉴턴 역학이 여전히 유효하다. 스케일이 아주 작아지면 양자역학이, 아주 커지면 일반상대성이론이 유효하다. 속도가 높아지면 특수상대성이론을 쓴다. 우리는 양자역학을 통해 로켓을 발사하는 방법을 모른다.


내비게이션의 GPS는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인공위성과 통신한다. 인공위성에 있는 원자시계는 양자역학의 원리로 동작한다. 인공위성과 내비게이션 사이의 시간 차이는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수정된다. 그리고 그 인공위성은 뉴턴 역학으로 쏘아 올려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패러다임들은 서로를 보완하며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가? 그럴 듯한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꽤나 설득됐다. 칼 포퍼의 반증주의도,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도, 라카토슈의 회색지대 이론도, 파이어아벤트의 무정부주의도 주지 못했던 완전함을 나는 장하석 교수의 다원주의에서 느꼈다. 나는 당분간 과학철학에 한해서는 장하석 교수의 입장을 지지하게 될 것 같다.


한편,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혁명기에 자신의 장인과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것으로 삶을 마감했다. 장하석 교수님의 말처럼, 잘 들여다보면 과학에서 승패를 가르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고, 그 역사를 승자의 관점으로만 들여다보는 것은 재미도 없고 이득도 별로 없다. 그리고 라부아지에의 삶처럼, 인생도 마찬가지다.




혹시 이 글을 읽고 과학 철학 입문서가 읽고 싶어졌다면, 아래의 책을 권한다. 




https://brunch.co.kr/@iyooha/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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