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균 Oct 15. 2023

나의 사춘기에게

<사는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 박찬국



이번 독후감은 약간 톤이 평소와 좀 다릅니다. 박찬국 교수님 트레바리 클럽에 놀러가기 위해 쓴 것이라서... 정보 전달은 없고, 철학소에 대한 설명도 없고, 니체를 빙자한 제 인생 얘기에 가깝네요. 



-------------------------

다들 중학생쯤 겪는다는 사춘기를 나는 참 늦게 겪었다. 그리고 그게 하필 고3 때였다. 고2때까지 곧잘 하던 공부를 고3때 놓아버렸다. 


책과 노트는 펴 놓았지만, 자율학습실에 앉아서 멍하게 천정만 쳐다보았다. 문득 정신이 들면 <무소유>, <텅 빈 충만> 같은 법정 스님의 책과, <슬픔이여 안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같은 프랑소와즈 사강의 소설을 읽었다.


그 시절 내겐 내 미래가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부모님이 가기를 바라셨던 의대는 성적으로도 턱이 없었지만, 무엇보다 가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소심하고 조용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그런 중요한 일을 내가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컴퓨터를 좋아했지만 공대를 가는 것도 망설여졌다. 나는 수학이 어렵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역시 문과를 갔어야 했을까, 나는 3학년 2학기 까지도 고민했다.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자율학습실에서 모두가 사각사각 종이에 펜을 굴리며 뭔가를 적고 그리고 줄을 치고 있는 사이, 나는 연습장 귀퉁이에 짧은 이야기를 끄적였다. 한참 열중해서 소설을 쓰다 문득 고개를 들면 자습실의 차가운 공기를 덮으며 이질감이 아득하게 밀려왔다. 이 넓은 자율학습실에서 나만 고개를 들고 있었고, 나만 소설을 쓰고 있었으며, 나만 모두의 목표, 즉 1점이라도 더 성적을 올려서 한 등급이라도 더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목표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내 주변에 있는 동급생들이 자신의 삶에 부여하고 있는 의미를 내 인생에 부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나는 의대를 가고 싶지 않았고, 자율학습실에 앉아있고 싶지 않았고, 공부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글을 쓰는 것인데, 그 행위는 나에게 죄로서 다가왔다. 미래의 직업에 ‘소설가’를 써서 냈더니 면담을 하면서 ‘현실적으로 그런 직업으로 먹고 살 수 없다’며 기어이 그 칸을 ‘변호사’로 채우게 했던 중학교 때의 담임 선생님이 있었다. 그 이후 소설을 쓴다는 것은 내겐 미래의 나를 배신하는 행위가 되었다. 내가 쓴 글이 길어질수록 나는 ‘정상normal’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쓰는 소설을 감추고, 어른들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니체를 만났을 때, 나는 너무나 기뻤다. 네가 아닌 것이 되도록 너를 규정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무력화하고,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니체의 호통에 나는 그간의 마음 고생을 모두 돌려받는 기분이었다. 니체는 모든 ‘정상’을 거부한다. 니체에 의하면 나는 ‘정상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주변 동급생들이 당연한 듯 자신의 인생에 부여한 의미(1점이라도 높은 점수, 한 등급이라도 높은 대학)에 동의할 수 없었다. 학교의 규칙과 나라의 법률을 따르는 것 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왜 내 인생의 의미까지 남들이 부여하는가? 게다가 왜 기꺼이 남이, 사회가 평가해주는 대로 살려고 하는가?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이미 이 시절에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니체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삶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이미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게 나든 남이든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 자체가 무가치하다는 것이다. 가치를 평가하려면 그 외부에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죽기 전까지 삶의 외부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현존재는 현존재로 있는 동안은 자신의 전체를 달성하지 못하며, 세계-내-존재를 상실하여 존재자가 아니게 된 다음에서야 비로소 전체를 획득한다) 니체는 그 보다는 놀이처럼 인생 자체에 빠져 살라고 한다. 기쁨과 슬픔이 반복되는 순간순간을 즐기며, 승리와 패배가 반복되는 너의 삶을 긍정하라고 한다. 


언젠가부터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니체를 꼽고 있다. 니체를 가장 많이 읽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늘 니체에게 위로 받는다. 니체는 항상 내게 네가 살던 대로 살면 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마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내가 그렇게 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처럼 초인은 결과가 아니라 ‘상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초인과 마지막 인간(말세인)이 중첩된 상태로 산다. (양자역학의 그 중첩이 맞다) 나는 초인이면서 동시에 마지막 인간이지만, 죽는 날까지 초인인 상태로 지내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많아지도록 노력하며 살 것이다. 


한편, 자율학습실에서 방황하던 수험생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놀랍게도 나는 기어이 소설가가 되었다. 고등학교 때 자습실에서 꾹꾹 눌러쓴 몇 줄의 시놉시스는 열 권의 장편소설이 되었고, 애장판으로, 양장본으로, 개정판으로 출판되었고, 지금도 e-book으로 독자를 만나고 있다. 나는 자율학습실의 질서에서 벗어나, 다행히도 승리와 패배가 반복되는 나의 삶을 살아 가고 있다.






혹시 그 책이 궁금하시다면 


https://select.ridibooks.com/book/1176000059



작가의 이전글 과학적 다원주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