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정당화된 삶에 대하여
트레바리를 하면서 만난 아주 소수의 멤버들과 비정기 모임을 하고 있다. 대략 한 달에 한 번 정도 보는 것 같은데... [아침 안부도 안 묻고 헤겔이라니요], 혹은 [본체]라고 부르는 모임이다.
매우 소수의 인원이지만 모두 철학과 문학을 공통적으로 좋아하고, 부분적으로 예술을 사랑한다. 어떤 멤버를 시를 쓰고, 어떤 멤버는 뮤지컬을 하고, 어떤 멤버는 피아노를 치고 작곡을 한다.
이 모임을 하고 난 다음 날엔 오후까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일에 집중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독서도 게임도 할 수가 없다. 한껏 도취되었던 전날의 감흥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니체는 예술만이 삶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예술은 형식적인 것, 질서적인 것, 논리적인 것(니체는 이것을 아폴론적인 것이라고 부른다)과, 형식이 없는 것, 음악적인 것, 감성적이고 도취적인 것(니체는 이것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부른다)의 합일이라고 말한다.
철학은 매우 아폴론적이다. 철학은 관점이고 프레임이다. 세상을, 세계를, 우주를, 삶을 바라보는 일종의 틀이다. 세상과 우주와 삶은 이 틀에 의해 재단된다.
술은 매우 디오니소스적이다. 술은 감성적인면을 강조하고, 사람들을 도취시키며, 닿을 수 없는 타자에 닿게 한다. 내가 느낀 이 감동을 네가 느꼈으리라 확신할 수 없지만, 어쩐지 술은 그걸 함께 느꼈을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니체에 의하면 우리는 만나는 그 자리 마다 예술을 만들고, 그 예술에 흠뻑 취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폴론적인 것(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며 디오니소스적인 것(술)에 취한다.
이 합일의 위력은 정말로 어마어마해서, 나는 육체적으로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술)에서 한참 벗어난 다음 날 점심시간에도 그 감흥과 도취의 후폭풍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근원적 일자에 닿았던 것 같은 착각은, 도무지 비루한 일상의 삶으로 나를 되돌려 놓지 않는다. 그저 돈을 벌 뿐인 일상적인 나는 한 없이 작아지고, 나에게서 멀어져간다. 니체는 얼마나 위대한가, 예술은 얼마나 삶의 본질에 가까운가!
어제 나는 왜 푸코를 구조주의자라고 할 수 없는가에 대해 깨닫고, 점심시간에, 예전에 내가 필사한 <말과 사물> 160개 꼭지를 모두 다시 보고 있다. 구조주의 위에 계몽주의를 놓고 <말과 사물>을 다시 읽으면 전혀 다른 것들이 읽힌다.
#트레바리 를 하지 않았다면 경험할 수 없었을, (이 모임을 비롯한) 많은 것들은 내 삶 전체를 바꾼다. 트레바리를 하겠다고 마음 먹었던 나와, 허락하셨던 마나님께 새삼 감사하는 점심시간. 심지어 나는 오늘 점심시간에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인생에 변화가, 도취가 필요하다 생각하는 분들은 트레바리를 해 보시죠 (결론이 광고가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