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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Jan 25. 2024

<멜랑콜리아> 혹은 우울에 대한 위로

<멜랑콜리아>, 라스 폰 트리에


트레바리 강남 아지트에는 10여명이 영상을 함께 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어제 #트레바리 클럽 [인생에 보탬은 안되지만] 번개가 있었다. 우리 모임은 1개월에 1회 정규 번개가 있다. 사이드로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책을 읽고 떠드는 모임도 있고, 중국 차茶 처럼 평소 경험해볼 기회가 적은 것들을 경험해보는 모임도 있고, 그냥 맛집을 찾아가서 세월아 네월아 술 마시는 모임도 있었다. 어제는 조금 다른 컨셉의 번개를 했는데, 와인을 마시며 예술 영화를 함께 보고, 2차에 모여서 영화에 대한 소회를 나누는 모임이었다. 


나는 아폴론적인 것(이성적인 것)을 좋아하고, 영화 역시 그러한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예술은 본질적으로 디오니소스적인 것(감성적인 것)을 부분적으로 포함한다. 어제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2차에 모였을 때, 함께 영화를 본 멤버 중 한 분이 내게 자세한 영화평을 요청했다. 나는 오늘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영화를 평가하고 분석한다는 것은 아폴론적인 것이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자꾸 파헤치면 아폴론적인 것이 된다. 영화를 본 당일은, 영화를 그 영화 전체로 남겨 놓기를 바랬다. 


그리고 열기가 조금 가라 앉은 다음 날(오늘), 점심시간에 비로소 이 영화에 대한 아폴론적인 해설을 덧붙이려고 한다. 이 문서는 어제 영화를 본 멤버들에게는 감상문, 혹은 개인적인 해설로 동작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분들에게는 후기 프로이트에 대한 짤막한 소개글이 될 것이다. 


전기 프로이트의 이론은 근본적으로 에로스(성충동)으로부터 출발했다. 자신의 일부를 씨앗으로 삼아, 새로운 나(2세)를 발아시키는 오랜 생명의 역사가 만들어 낸 본능이 바로 성적 에너지로서 리비도다. 거의 모든 것을 에로스로 해석하려는 프로이트의 시도는 프로이트를 범성론자(汎性論者)로 일컫는 비판으로 이어졌고, 제자이자 친구였던 융과의 결별도 겪게 한다.


많은 비판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지켜오던 프로이트의 에로스 일원론적 신념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에 의해 꺾이게 된다. 후기에 프로이트는 에로스의 반대편에서 타나토스(죽음충동, 이하 죽음충동)을 발견한다. 


프로이트는 1920년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죽음충동을 완전히 정리한다. 쾌락원칙은 흔히 쾌락을 누리려는 원칙으로 잘못 이해되는데(슬라보예 지젝 조차 쾌락원칙을 가끔 이런 식으로 읽는다) 쾌락원칙은 무제한적 쾌락을 즐기려는 원칙이 아니다. 쾌락원칙은 쾌락을 유지하고 불쾌를 줄이려는 원칙이다. 술을 더 마시고 싶지만 다음 날 아침 출근 때문에 여기까지만 마시기로 하는 경험 정도는 누구에게나 있다. 내일 아침의 불쾌를 줄이거나 없애기 위해 현재의 쾌락을 제한하는 것이 쾌락원칙이다. 쾌락원칙은 늘 현실원칙과 타협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쾌락은 고통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쾌락은 무제한적으로 탐닉될 수 없다. 술을 마시면서 내일 마실 술에 대해 생각하거나, 점심을 먹으면서 저녁 식사에 대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심지어 나는 흡연가 시절 담배를 피우면서도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인간은 쾌락을 즐기는 와중에도 쾌락을 생각한다. 쾌락은 도무지 만족되지 않는다. 우리는 무제한적으로 술을 마실 수도, 무제한적으로 맛있는 것을 먹을 수도, 무제한적으로 성행위를 즐길 수도 없다. 모든 쾌락엔 한계가 있고, 심지어 현실원칙과 타협까지 해야 한다. 쾌락원칙은 실은 전혀 쾌락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쾌락원칙을 넘어설 수는 없을까? 


그리스 신화에서 미다스 왕은 디오니소스의 시종인 실레노스에게 인간에게 가장 좋고 훌륭한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실레노스는 침묵했으나, 왕이 답변을 강요하자 실레노스는 결국 껄껄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하루살이 같이 가련한 족속이여, 우연과 고난의 자식들이여, 왜 듣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것을 내게 말하도록 강요하는가? 좋다, 말해주겠다. 가장 좋은 것은 그대에게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무無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니 그대에게 차선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일찍 죽는 것이다.'


어떤가? 어떤 생각이 드는가? 


태어나지 않은 상태의 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무기체의 형태일 것이다. 그리고 죽은 후에도 나는 무기체가 된다. 무기체는 쾌락원칙은 물론, 현실원칙으로부터도 자유롭다. 무기체는 더 이상 쾌락을 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삶의 에너지가 쾌락원칙을 따른다면, 죽음충동은 쾌락원칙을 넘어서 있다. 쾌락원칙 너머에 있기에 쾌락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프로이트가 이 책의 제목을 <쾌락원칙을 넘어서>라고 지은 이유는 이것이다. 


프로이트는 그의 연구 기간 내내 에로스/타나토스의 충동 이원론을 여러 번 수정했다. 하지만 이 책,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프로이트는 최종적으로 생명충동이 죽음충동의 특수한 경우에 불과하다고 서술함으로서 이원론을 폐기한다. 이어서 프로이트의 승계자인 라캉도 ‘모든 욕망은 사실상 죽음충동이다’라고 선언한다. 




*이하 영화 <멜랑콜리아>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영화를 보실 분은 읽기를 여기에서 멈추어 주세요*







누가 봐도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를 떠올릴 수 밖에 없는 포스터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영화 전체가 상징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그 상징들이 대개는 노골적이어서, 이 영화는 예술 영화라기 보다는 철학 영화에 가깝게 느껴졌다. 디오니소스적인 전체로 다가오지 않고, 하나씩 분절된 아폴론적인 개체들로 읽혔다. 


불안을 핸드헬드 카메라로 표현하고, 분절된 세계를 불안정한 컷으로 암시하며, 추상화를 사실주의 작품으로 교체하는 장면으로 상징계(The Symbolic)의 균열을 막아내려는 라캉의 근원적 불안을 표현하는 등, 감독은 자신의 의도를 작품 안에서 숨길 생각이 아예 없어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의도를 알아줬으면 하는 바램도 숨기지 않는다. 그 질문은 이것이다. ‘혜성 멜랑콜리아는 대체 무엇을 상징하는가?’


<멜랑콜리아>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저스틴의 결혼식 이야기가 담긴 1부와, 혜성 충돌로 지구가 멸망하는 2부로 나누어져 있다. 사실상 1부는 맥거핀으로서, 히치콕의 <사이코>에서 남녀가 돈을 훔쳐 저택까지 오게 되는 부분과 비슷하다. 1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저스틴이 심각한 우울을 앓고 있고, 그 결과로 결혼식도 망치고 직장도 잃는다는 것 정도다. 


중요한 내용은 2부에 있다. 2부에서 원래 지구를 스쳐 지나가야 했던 혜성 멜랑콜리아는 경로를 변경하여 지구를 덮치고, 어이가 없게도 지구가 멸망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혜성은 대개는 얼음과 암석의 혼합물로 되어 있다. 혜성은 지구에서 관측될 때 대개 긴 꼬리를 가진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는 혜성이 태양에 접근하면서 쉽게 녹아 증발할 수 있는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얼음 덩어리가 증발하여 수증기가 되고, 일산화탄소, 이산화탄소, 메탄 등이 포함된 혜성은 그래서 긴 꼬리를 남긴다. 



영화에서 묘사된 혜성 멜랑콜리아. ⓒ 노르디스크 필름



하지만 <멜랑콜리아>에 등장하는 혜성 멜랑콜리아는 전혀 혜성처럼 생기지 않았다. 파랗게 빛나는 멜랑콜리아는 지구보다도 아름답다. 감독이 혜성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멜랑콜리아를 그렇게 묘사한 것은 아닐 것이다. 멜랑콜리아가 이렇게 아름답게 묘사되는 것은 멜랑콜리아가 상징하고 있는 것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우울을 앓는 사람은 쉽게 죽음을 소재로 사고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우리는 죽음충동의 특별한 형태인 생명충동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의지가 줄어들면 생명충동은 쉽게 죽음충동의 형태로 돌아간다. 


위에서 프로이트의 죽음충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모든 충동은 본질적으로 죽음충동’이라고 했다. 우울을 앓는 저스틴은 지구 위 모든 생물 앞에 난데없이 나타난, 실체화된 죽음 앞에 의연하다. 오히려 죽음 앞에서 생명을 느낀다. 저스틴이 다가오는 멜랑콜리아와 교감, 혹은 교접하는 장면은, 죽음충동에서 오히려 욕동하는 생명충동을 느끼는 저스틴의 심리상태를 반영한다. 그래서 죽음이 분명해질수록 저스틴은 생기발랄해진다. 


반면 언니 클레어는 극도로 불안을 느낀다. 하이데거는 ‘불안은 죽음이 우리에게 자신을 고지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테라스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우아하게 마지막을 맞이하자는 클레어는 역설적으로 그녀가 불안을 극복하고 있지 못하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 클레어의 제안을 ‘차라리 화장실은 어떠냐’며 거절하는 저스틴의 태도는 죽음충동이 쾌락원칙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멜랑콜리아와 육체적 합일을 마치고 완전한 무기체의 상태가 될 준비가 된 클레어는 와인이 주는 현실적, 쾌락적 태도 따위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그래서 우울을 앓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위로처럼 읽혔다. 당신이 죽음을 생각하는 이유는, 죽음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죽음이 실제로 아름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죽음은 자살과 다르다. 멜랑콜리아는 자살의 형태로 도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살을 하는 것은 이성을 상징하는 형부 존이라는 역설을 등장시킴으로서 감독은 이 지점을 분명히 한다) 감독은 오히려 우울을 정신적 나약함 등으로 치부하려는 세상의 보통사람들을 향해 ‘사악한 생명들은 모두 죽어야 한다’며 독설을 퍼붓는다. 


이 영화는 내가 본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첫 영화다. 그래서 내 읽기는 철저한 오독일 수도 있다. 하지만 프랑스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는, '작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글을 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며, '텍스트는 독자에게 읽힘으로서 작품으로 완성된다'고 했다. 그러니 라스 폰 트리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멜랑콜리아>는 내게 이렇게 읽히며 작품으로 완성된 것으로 하기로 한다. 그리고 항상 그렇지만 반박시 님 말이 맞다. 


독서모임에서 영화 상영 이벤트를 한 건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즐거웠다. 그냥 술먹고 떠드는 모임 말고, 이런 소소한 이벤트들도 가끔 해 보아야지. 적당한 강사나 주제를 찾지 못했을 때, 인터루드를 이런 형태로 운영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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