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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Jan 29. 2024

<남한산성>의 귀환

어린시절에 건네는 위로

부재함으로서 자신이 억압된 기표임을 웅변했던 <남한산성>은, 비로소 오늘 내 책장으로 귀환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책을 읽는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015B, 넥스트, 서태지와 아이들, 노이즈 같은 남성 밴드나 남성 그룹의 노래만 듣던 시절에 나는 읽고 난 책을 함부로 대했다. 내 방엔 전공책과 강의노트, 프린트물 숙제들을 두는 간이 책장 외 제대로 된 책꽂이가 없었고, 나는 읽고 난 책들을 식탁이나 TV 테이블, 장식장 같은 곳에 아무렇게나 두었다. 


누군가 책을 빌려 달라고 하면 나는 그 책을 준 후 일부러 잊어버렸다. 돌려 달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 책은 자연스럽게 내게서 잊혀졌다. 많은 책들이 그렇게 사라졌다. 


나는 김훈 전집을 다 읽었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 김훈의 최고작은 여전히 <남한산성>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답고 처절하고 처연한 패배와 멸망과 죽음과 모멸의 서사를 김훈은 담담하게 적는다. 


재작년인가, 선생님의 <하얼빈> 관련 강연을 들으러 갔던 일을 계기로 선생님의 전작들을 몽땅 다시 읽기로 했었는데, 오랜만에 들렀던 본가의 서가에서 나는 이 책을 찾지 못했다.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책이었는데 이 책은 본가의 서가에도, 우리 집 책장에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주었는지, 어디에 두고 잊어버렸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책을 내게서 밀어내던 시절이 생각나서 쓴 웃음을 지었다. 


책을 가지고 싶어서 집에 와서 인터넷 서점에 들어갔는데, 그 새 표지가 바뀌었다. 그러면 그렇지. 오래된 책이니 개정판이 나왔겠지. 어쩐지 표지가 바뀐 그 책이 내가 읽었던 책 같지 않아서 그냥 두었다. 


어제 마나님 생일 선물을 사러 함께 잠실 애비뉴엘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잠실역에서 알라딘 중고서점을 만났다. 혹시 절판된 철학서 횡재를 하지 않을까 싶어 마나님께 30분만 놀다 가자고 졸랐다. 


서가를 쭉 둘러보다 분홍색 표지가 선명한 <남한산성>을 만났다. 숨이 멎을 듯한 선홍색 표지를 보자 마자 나는 다른 사람이 집어갈까 서둘러 이 책을 손에 쥐었다. 몇 페이지를 넘기니 부끄럽고 한 없이 작았던 시절의 내가 남한산성에 있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그 겨울에, 나도 사람들과 함께 그 추운 산성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철학서 횡재대신 나는 내가 나를 밀어냈던 시절의 기억을 그 서가에서 찾았다. 


철학서도 아니고 웬 김훈이냐고 묻는 마나님에게, 이따 한잔 하면서 사연을 얘기해주겠다고 했다. 돌아와서 화이트 와인 한 병을 따고 담담하게 했던 이야기를 페북에도 적었다. 마나님은 가끔 들었던 이야기지만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벼르고 별러서, 나는 나 스스로 47세나 되어 나를 위한 책장을 생일 선물로 가졌다. 내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들부터, 앞으로 읽고 싶은 책들을 그 책장에 빼곡히 꽂았다. 그리고 나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에버노트에 숨겨 놓았던 독후감들을 꺼내 SNS에 올리기 시작했고, 트레바리 클럽장이 되었으며, 그 독서 모임에서 너무나 놀라운 인연들을 만났다. 그리고 (곧 발표할) 놀라운 이벤트 같은 건이, 전혀 관계 없을 것 같았던 내 삶에 추가되었다. 


라캉은 억압된 기표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말한다. 부재함으로서 자신이 억압된 기표임을 웅변했던 <남한산성>은, 라캉의 예고대로 오늘 내 책장으로 귀환했다. 붉은 표지를 가진 <남한산성>이 내 책장으로 돌아온 것을 보며 위로 받는 것은 내가 라캉을 읽었기 때문일까, 이제야 비로소 그 시절의 나를 위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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