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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만춘 Jun 27. 2021

#나를 펼치는 글쓰기   

  1. 나는 왜 글을 쓰기 시작했는가?     


봉달호의 <매일 갑니다, 편의점>에서 편의점 주인아저씨는 매일 새벽 가게 문을 열기 전 한 시간 동안 자신만의 글쓰기를 합니다. 그에게는 하루 중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합니다. 오롯이 자신만의 시간. 자기를 대면하는 시간. 그에게 글쓰기란 고단한 편의점 일을 하면서도 일상에 매몰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니었을까요? 본사의 갑질도, 진상 손님도, 물류센터 직원의 실수도 그에겐 글쓰기의 소재가 됩니다. 그의 행복이 부러워서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거나 뛰어난 문장력을 구사할 수는 없더라도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전문가는 그들만의 역량과 깊이가 있고, 아마추어 작가에게는 또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때론 덜 세련된 문장이 이해하기 쉽고, 다소 서툰 표현과 일상의 언어가 오히려 친근감을 주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글에 담긴 평범한 생활 모습과 진솔한 생각이 더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점점 양념이 많은 음식보다 담백한 음식이 좋아집니다.

 ‘강릉 원조 할머니가 해수로 슴슴하게 만들어주시는  순두부찌개가 속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채워주는 것처럼, 뛰어난 필력은 없지만 내 삶의 진솔한 이야기가 어쩌면 누군가에게 작은 울림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글을 쓰고 내놓는 데 용기를 냈습니다.     


김훈이 박완서의 글을 흉내 낼 수 없다고 한 은유 작가의 말은 큰 위로가 됩니다. 두 작가 중 어느 한 분이 부족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각자 자신의 색깔이 뚜렷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리멸렬한 내 일상의 파편들을 있는 그대로 늘여놓는 일도, 그에 대한 저만의 해석과 감정을 솔직하게 풀어내는 일도, 어쩌면 저만의 빛깔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비록 화려하고 매혹적인 색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무엇보다 글쓰기는 남이 아닌 저를 위한 선물이 될 것 같았습니다. <일단 오늘 한 줄 써봅시다>의 저자 김민태도 글쓰기는 자기 효능감을 높여준다고 했습니다. 그는 글쓰기에 한 번 빠지면, 너무 쉽지도 너무 어렵지도 않은 문제를 스스로 만들어내 배우고 성장하며 틈틈이 몰입하는 삶이 된다고 했습니다. 일단 경험을 기록하기, 일기부터 시작하기를 권유하는데 경험을 기록하면 글쓰기가 훨씬 쉽고 흥미로워지며, 일상에 마법 같은 변화가 찾아온다고 합니다.     


내 삶이 내 글의 소재가 된다는 점이 처음에는 조심스러웠습니다. 으레 자기 이야기는 자신한테만 재미있고 중요하기 쉽습니다. 본인은 눈물까지 삐져나올 정도로 웃음을 참지 못하며 “내가 말이야, 이랬다는 거 아냐. 진짜 너무 웃기지 않아?” 하는 이야기가 실은 전혀 웃기지 않아서 “하. 하” 하고 억지로 웃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심지어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안타까운 사연을 배경, 원인, 경과까지 아주 세세히 이야기할 때에는 “아, 그렇구나.”, “참 안됐구나” 하면서도 하품을 참느라 곤혹스럽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기한테 가장 관심이 많고, 자기 얘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남이야 그러든가 말든가 대개는 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경험을 글로 쓰는 것은 사실 자기만족에 가깝습니다.

     

김영하의 <오래 준비해온 대답>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고대 그리스의 수사학 학교에서는 좋은 연설에 다음 세 가지가 필수적이라고 가르쳤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든가 웃기든가, 아니면 유용한 정보를 줘라."


 ‘내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가? 사람들을 웃길 수 있는가? 내가 주는 정보들은 유용할까?’

생각해보면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단’ 써 보기로 했습니다. 김민태 작가는 ‘완벽주의는 당신의 글쓰기를 망치고, 창조성과 장난기와 생명력을 방해한다’고 했습니다. 너무 오랜 준비와 너무 많은 생각은 실행을 어렵게 합니다. ‘뭐, 어때?’ 하는 마음 가짐. 정말이지 ‘자기만족’이면 어떤가요? 내 삶에 내가 만족할 수 있다면, 글쓰기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면 그 자체로 ‘마법’이 되는 것입니다.          



2. 나는 왜 계속 글을 쓰는가?     


은유는 "인간을 부품화한 사회 현실에서 납작하게 눌린 개인은 글쓰기를 통한 존재의 펼침을 욕망한다."라고 했습니다. '존재의 펼침'.  구겨지고 찌그러져 있던 나 자신을 반듯반듯 두 손으로 펼치는 마음. 저는 그 마음을 글쓰기를 통해 배웁니다.


 제 삶은 종종 방바닥에 잔뜩 어질러진 블록 조각 같습니다. 아이가 어릴 때, 순식간에 방바닥이 미니카와 레고 블록 조각으로 뒤덮이곤 했습니다. 무심결에 작은 레고 블록 조각을 밟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 말할 수 없는 고통. 그렇다고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낼 수도 없었습니다. 바닥에 있는 모든 장난감이든 색종이든 한 군데에 싹 쓸어 담아 버리고 싶지만 다음 놀이를 위해서 종류별로 분리해서 정리해야만 했습니다. 블록 박혔던 자국이 선명한 발바닥을 문지르며 하나하나 정리를 하다 보면 마침내 맨바닥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지만...
 
 생각의 파편들이 블록 조각처럼 머릿속을 붕붕 떠다니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받은 작은 상처가 뜻밖에 아프고 흔적을 남깁니다. 신경 끄고 싶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럴 때 글쓰기는 흩어진 생각들을 모으고, 정리하는 시간이 됩니다. 잊으려 할수록 더 생각나는 그 힘든 일들을 오히려 직접 대면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에 걸맞은 마음속 서랍에 넣다 보면 어느새 마음 방에도 비로소 빈 공간이 생깁니다. 언제 다시 어질러질지 모르지만...
 
 하루는 반성문 쓰고 다음 날 계획표 쓰는 게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늘 왜 이 모양일까?'
 스스로 자책하고 원망하면서도 글을 쓰면서 다시금 자신을 위로하고 힘을 얻습니다. 나탈리 골드버그도
 "우리가 힘을 얻는 것은 언제나 글 쓰는 행위 자체에 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글 쓰는 행위 그 자체로 힘을 얻기에 쓰고, 쓰고, 또 씁니다.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오롯이 나와 나, 둘만 있는 것 같습니다. 평소 잘 돌보지 않았던, 그러면서 책망하기에 바빴던 '나'를 만나 위로해 줄 수 있는 따뜻한 시간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나로 살아가기 위한 생존의 글쓰기가 됩니다.     


작가 은유는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응시의 힘을 말합니다. 똑바로 볼 수 있다는 건 두렵지 않다는 뜻이래요. 그녀는 삶이 굳고 엉킬 때마다 글을 썼다고 합니다. 저 역시 글쓰기는 굳고 엉킨 내 삶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게 해 줌으로써 내가 내 삶에 대한 마음 가짐을 다잡게 해 줍니다. 다잡는다는 것이 두 주먹 불끈 쥐고 파이팅을 외치는 것만이 아니라 어지러웠던 내 마음이 덤덤해지는 것, 말하자면 컴컴한 하늘 아래 거칠게 파도치는 바다가 잔잔하게 물결치는 바다로 변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햇살 보일 만큼 완전히 개지는 않더라도 파도의 물살이 한풀 꺾이기는 합니다.     


글 쓰는 일을 통해 저는 제 삶을 똑바로 응시하고, 위안과 힘을 얻고 있습니다. 세상의 한 구석에서 묵묵히 삶을 일구며 수줍게 내미는 제 글들이  누군가에게 아주 작은 울림이라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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