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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만춘 Jul 19. 2021

루소처럼 걷기

에릭 와이너,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읽고

“걷기는 자극과 휴식, 노력과 게으름 사이의 정확한 균형을 제공한다.” - 에릭 와이너,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


이른 아침.

일어나서 밥을 안친 후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밖으로 나가서 걸었다. 저녁엔 노을 지는 아름다운 풍경과 여유로운 시간이 좋지만 아직 한낮의 열기가 식지 않아서 걷다 보면 후덥지근하다. 그에 비해 아침 시간은 조금 더 상쾌하고, 내가 부지런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시간 정도 걷다 돌아와서 찬물로 샤워를 하고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 산책은 가급적 매일 하는 일인데(그런데도 뱃살은 빠지지 않는다!ㅠ), 오늘은 과제를 먼저 끝낸 기분이었다.


‘앞으로 매일 이렇게 아침 산책하는 습관을 가질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으나, 굳이 계획과 결심은 하지 않기로 한다.

“저는 이렇게 새로운 루틴을 만들었습니다!”

라고 공공연히 떠들거나, ‘나와의 약속’이니 ‘아침 인간을 위한 습관’이니 하며 거창하게 좌표를 찍고 싶지 않다. 목표를 세워 굳히는 순간, 그것이 하나의 규칙과 의무가 되어, 지키지 못했을 때 쓸데없이 자책과 후회를 만들어 낼 것 같기 때문이다(자책하고 후회할 일은 이미 충분하다).


걸을 때마다 나는 자유롭다. 어디로, 얼마만큼 가다가 돌아올지 아무렇게나 정한다. 칸트는 매일 오후 12시 45분에 점심을 먹고 프러시아 쾨니히스베르크의 늘 똑같은 대로에서 한 시간 동안 산책을 했다지만 내가 꼭 칸트처럼 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유롭고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는 산책자. 순수한 자기 사랑. 나의 산책은 루소의 걷기를 닮으면 좋겠다. 루소는 언제든 늘 걸어 다녔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혼자서 두 발로 여행할 때만큼……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존재하고, 이렇게 살아있고, 이렇게 나 자신이었던 적이 없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의 저자 에릭 와이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본질적으로 걷기는 개인적인 행위다. 우리는 혼자서, 자기 자신을 위해 걷는다. 자유는 걷기의 본질이다. 내가 원할 때 마음대로 떠나고 돌아올 자유, 이리저리 거닐 자유.”


군인들의 행군이 아니라면 걸을 때 우리는 대체로 자유롭다. 상사의 지시나 해야 할 일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주변 풍경을 바라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할 수 있다. 몹시 현란하거나 섹시한 옷을 입지 않았다면 팔을 휘저으며 걸어도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가만히 우뚝 서 있으면 사람들이 쳐다볼 만큼,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은 풍경의 일부처럼 자연스럽다.


루소가 걷기를 사랑한 이유처럼, 걷는 데에는 인류 문명의 인위적 요소가 필요치 않다(물론 장애가 있는 경우는 다르다). 걷기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 고급 승용차나 명품 가방이 필요 없다. 치렁치렁한 장신구는 오히려 걷기에 방해가 될 뿐이다. 멋진 구두 대신 가벼운 운동화, 고급 정장 대신 티셔츠에 반바지가 제격이다. 백화점, 콘서트홀, 회의장처럼 문명의 중심지나 건물 내부로 들어갈 때에는 허름한 차림새 때문에 주눅이 들 수 있어도, 자연 속에서 마음껏 걸을 때만큼은 본인도 자신의 차림새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신경 쓰지 않는다(실제로 나는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한참 산책하다가 우연히 내 발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각자 혼자 걸을 때에는 사회적 지위도 사라진다. 어느 학교 선생님일지 몰라도 산책길에서는 그저 배 나온 아줌마에 불과하다.


에릭 와이너에 따르면, 정신은 시간당 5킬로미터의 속도, 즉 걷기에 적당한 속도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다. 그에 따르면 그토록 많은 철학자들이 걷기를 즐긴 이유가 바로 걷기가 정신 활동에 유익하기 때문일 것이다. 니체는 "진정으로 위대한 생각은 전부 걷기에서 나온다"라고 확신하며 종종 기운차게 스위스 알프스 산맥으로 두 시간가량의 짧은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위대한 생각까지는 아니지만, 나 역시 걷다 보면 머릿속이 정리되는 느낌을 받는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도 조금 더 쉽고 단순해지는 느낌이다. ‘뭐 어때?’하고, 없던 배짱이 생기기도 한다. 걷는 동안 머릿속에 담아 두었던 많은 것들을 덜어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잊기 위해 걷는다.”

라는 에릭 와이너의 말이 와닿는다. 우리는 “우리에게 너무한”(윌리엄 워즈워스의 표현) 세상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걷는다는 말이 맞다.


그렇다면 루소의 걸음걸이는 어땠을까?

루소는 발에 생긴 티눈으로 거의 평생 고생했는데, 티눈 때문에 아주 천천히 걸었고, 평범한 도랑도 절대 뛰어넘지 못했다고 한다. 루소의 죽음도 산책길에서 연유한다. 1776년 10월 말경 파리의 좁은 길 위를 걷고 있던 루소가 마차를 제때 피하지 못해 개의 공격을 받았고, 자갈길 위로 넘어져 뇌진탕에 걸리고 신경 손상을 입은 후 2년도 지나지 않아 아침 산책에서 돌아온 뒤 쓰러져 사망했다고 한다. 말년이 다가올수록 루소의 걸음은 더 부드럽고 낙천적인 성격을 띠었다고 한다. 도망치거나 무언가를 찾거나 철학적 주장을 하기 위해 걷는 것이 아니라 ‘그냥 걸었다.’


우리는 흔히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한다. 걷는 일조차 뭔가를 위해 시작하고(예를 들어 뱃살을 뺀다든지-.-), 목표 걸음 수를 채우는 일을 꾸준히 하기 위해 노력한다. 건강을 위한 파워워킹으로 주먹을 머리까지 올리며 전투적으로 걷기도 한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걸을 때조차 바쁘다. 빠르게 걷는 사람들 틈에서 천천히 걷는 사람은 교통 체증을 일으키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루소처럼 사나운 존재(개든 사람이든)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냥 걷는 것’이야말로 자유롭고 평온한 일인 것 같다. 목표를 위한 과제가 아니라 그냥 걷는 과정 자체에서 자유로움과 즐거움을 느끼는 일, 그것이 루소처럼 걷는 법일 것이다.


“걷기는 움직임 속의 성전이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느껴지는 평화가 우리에게 달라붙어 함께 움직인다. 휴대 가능한 평온함이다. 고통이 사라진다. 매 걸음마다 부담이 덜어지고, 누가 내 신발에 공기를 불어넣은 것처럼 가벼워진다. 대지의 진지함, 또한 가벼움을 느낀다. 타박. 타박.”  - 에릭 와이너


산책하다가 우연히 봤더니 신발이 짝짝이였다. 얼마나 놀랐던지...  걸을 때 내 발의 느낌에도 더 집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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