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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만춘 Aug 08. 2021

세상의 그래프에서

-동료의 승진 소식을 접했을 때

동료의 승진 소식을 듣고 놀랍고 반가워서 전화를 걸어 축하해 주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부산스러운 축하 인사 후 정적 속에 나 홀로 우뚝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다들 열심히 살고 있는데 나 혼자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기 좋은 것만 하고 살 수 없는 세상에서 내가 너무 고집스러웠던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옆자리에 앉았던 동료는 이제 저 앞으로 힘차게 달려나가는데 나만 홀로 뒤처져서 쓸쓸한 모습으로 늙어가는 것일까? 나는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면 좋을까, 그것을 위해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질문은 많아지는데 답은 찾기 어려웠다.


'낙오'란 대열에서 뒤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출세'의 반대말로 쓰인다. 어떻게든 대열에 끼어 있어야 먹고살 수 있고, 기왕이면 대열의 앞쪽에 있어야 더 잘 먹고살 수 있는 현대 사회에서 '낙오된다'는 것은 공포스럽다. 아직 대열에서 이탈된 것은 아니면서도 동료의 승진은 상대적으로 내가 낙오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불러오는 것 같다. 같이 발 맞춰 걷던 대열에서 내 발걸음이 느려져서 뒤로 빠지는 느낌이다. '낙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집단이나 사회 속에서 경쟁에 이기지 못하거나 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뒤떨어지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내가 남들보다 능력이나 노력이 부족해서 뒤떨어지고 결국 사회에서 필요가 없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내 존재 가치를 위협한다.


그래서 웬만한 배짱이 아니고서는 동료의 승진을 마냥 해맑게 축하만 해주고 끝나기가 힘들 것 같다. 누군가는 "쓸데없다"거나 "과하다"고 할 만큼 잠시나마 생각이 많아진다. 동료를 위하는 마음으로 기뻐하고 축하해 주는 것과 별도로 자신의 위치에 대해 돌아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공은 욕망을 실현시켜준다. 그런데 정승연의 <세미나 책>에서는 그 욕망이 진짜 자신의 욕망인지 검토하라고, 그 욕망의 실현을 통해서 너의 존재 역량이 더 커지느냐고 묻는다. 이 질문은 나를 위로한다. 동료의 승진은 분명 축하할 일이지만 그 동료가 추구했던 모습과 내가 바랐던 모습은 다르다. 물론, 내가 너무 이상적이거나 순진(안 좋은 의미로)한 것은 아닌지 반성은 하면서도 그 방향으로 갔을 때 내 존재 역량이 더 커질까 생각하면, 자신 없다. 그쪽 일이 내 성향과 가치에 맞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의 성공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그가 앞으로 할 일 자체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과 그가 조금 더 갖게 될 힘 때문이 아닐까?


 '자발적 낙오자'가 되어 내가 따라야 하는 가치와 규칙들을 스스로 세울 수  있으면 좋겠다. 세상의 인정과 힘이 없더라도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가꿀 수 있기를 바란다.


유병욱은 <없던 오늘>에서

"삶의 속도는 한 가지가 아니며, 그 빠르기와 느리기도 정해진 것이 아니다."

라고 했다. 윤종신은 <계절은 너에게 배웠어>에서

"각각의 노래는 세로가 아닌 가로로 놓여 있어야 합니다."

라고 했다.

모두 똑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을 향해 가는 것은 독재자의 군대 같고, 무작정 내달리는 모습은 레밍의 질주 같다.


세상의 그래프에서 세로축으로 이동하는 속도가 다르고, 가로축으로 넓게 퍼질 수 있어야 한다.


('음..그래서 난 앞으로 어떻게 살지?'에 대한 고민은 현재진행형)


© PicsbyFran,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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