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자 확인 방법이 수학을 가르치는 거라던데(친자식이라면 부모가 화를 참지 못한다는 슬픈 이야기) 내 아들 맞다. 썩은 사과의 개수를 구하는 문제였다. 아이는 내가 말한 ‘원가’의 개념도 모르고 있던 데다 내 설명을 듣고 더 혼란에 빠졌다. 아이는 잠시 생각해 본다고 했는데 나는 사과를 티셔츠로 바꿔서 설명을 이어갔다. 내가 보기에 아주 기막히게 쉽고 명료한 예였다. 그런데도 아이가 대답을 하지 않자 나는 답답함을 꾸욱 누르고 문제지 여백에 내가 설명하는 문장을 그대로 썼다. 눈으로 읽으면 좀 나을까 싶어서. 그때 아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 문제 때문이 아니라 이 상황 때문에 속상하다고 했다. 아이는 스스로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했는데 내가 기다려주지 않은 것이 서운하고 답답했던 것이다. 그 순간,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보다는 ‘사내자식이 겨우 이 정도 갖고 울다니 너무 예민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를 지르면서 윽박지른 것도 아니고 설명을 속사포처럼 쏘아댄 것도 아닌데 이런 반응을 보이니 억울하기도 했다. 아이의 눈물을 닦고 안아주며 위로하기보다는 머리에 ‘콩’하고 꿀밤이나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생각이 순간 들었다(아이가 절대 이 글을 읽을 일이 없기를!).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관점이고, 내 생각이었다. 그 순간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스타강사의 설명보다 스스로 생각해 볼 시간이었다.
기다림.
그러고 보면 우리 아이는 유독 기다림을 필요로 하는 아이였다. 결혼하고 4년이 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불임 전문병원에 다닌 적이 있다. 치료 특성상 남편과 같이 가야 했는데 대기실에 너무 많은 부부가 와 있어서 깜짝 놀랐다.
‘우리 주변에 우리처럼 아이를 애타게 기다리는 부부가 이렇게나 많았구나!’
그곳에 모인 아내들과 부둥켜안고 등을 토닥이고 싶었다. 당신은 저처럼 새벽 3시에 벌떡 일어나 캄캄한 논두렁을 미친 듯이 내달린 적은 없으시겠지만 혹시 당신도 시어머니가 지어오신 한약을 봉지마다 가위로 잘라 싱크대에 쏟아버린 적이 있나요?(어머니 죄송해요 ㅠ.ㅠ) 몸을 따뜻하게 해야 된다고 해서 겨울 동안 난방비 폭탄 맞으며 이불로 몸을 칭칭 감고 번데기처럼 누워 지낸 적이 있나요? 기대했다가 실망했다가... 반복되는 과정 속에 불안감은 점점 커지고 남편에게 잘못한 것 없이 미안해지진 않던가요? 힘내자, 씩씩하자 주먹 쥐어보지만 코끝이 찡해지던 거 어쩔 수 없던가요...
누군가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곤란해질 것 같아서 나는 얼른 내 옆 선반에서 작은 책자를 집어 들었다. 굳이 읽을 생각 없이 무작정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든 책자였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이 글을 만났다.
“더디 온다고 재촉하지 마세요. 그 작은 발로 제 딴에는 부지런히 저 먼 우주로부터 총총 달려오고 있을 테니까요.”
곤란해진 사람은 나보다 남편 쪽이었다. 나는 눈가 촉촉 수준이 아니라 몇 번이나 코를 풀어야 했다.
‘그래, 네 딴엔 최선을 다해 고 작은 발로 총총거리며 오고 있는 걸 더디 온다고 재촉하고 있었나 보다. 아직 안 왔다고 조바심 내고, 영영 안 올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구나.’
매주 병원을 다녀도 안 생기던 아이가 자연임신이 되었을 때 그 기쁨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아이가 생긴 줄도 모르고 보드를 배운다고 스키장에서 열심히 구른 걸 생각하면 드라마에서 아이 지운다고 언덕에서 구르던 한복 입은 여인이 오버랩되면서 아찔하기도 했다. 지금도 내 인생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내 안에 또 다른 심장이 뛰고 있던 그 아홉 달이었다(보통 열 달이라고 하지만 난 1월에 임신해서 9월에 출산했으니 아홉 달이 맞다). 혹시나 들을까, 어떤 식으로라도 전달이 될까 싶어 혼자 있어도 중얼중얼 다정한 말을 건넸고, 시를 읽어 주고, 좋은 음악을 틀어 주고 아, 무엇보다 커피 중독자인 내가 한 잔의 커피도 안 마신 것은 지금 생각해도 불굴의 의지였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는 한 달만에 머리 크기도, 몸무게도 99%(뒤에 한 명 있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했다. 그냥 제일 크고 무거운 거라고 했다.)여서 앙증맞기보다는 안고 있으면 팔뚝 근육을 키우거나 관절염이 생기거나 둘 중 하나였다. 몸이 무거워서 그런지 아이는 남들 부지런히 기어 다닐 때 겨우 뒤집기에 성공해서 박수를 받았고, 때가 돼도(?) 이빨이 나지 않거나 걷지 못하고 말을 못 해서 애를 태웠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 ‘때’라는 것이 누구를 기준으로 한 것일까? 평균 시기에 모든 아이를 다 끼워 맞출 수는 없을 텐데도 ‘때’가 되었는데도 할 일(전문 용어로 발달과업?)을 하지 못한다고 조바심 내고 걱정하곤 했던 것 같다. 결국 이빨은 나고, 걷고, 말도 하게 되는 것을.
최선일까, 오기일까? 아기 정서에 좋다는 말과 환경을 생각한다는 일념으로 일회용 기저귀 대신 천 기저귀를 5개월간 사용했다(관절염을 얻고 수질을 오염시켰다). 아기의 면역력에 좋다고 11개월간 모유 수유를 했다(직장에서 유축하러 휴게실에 다녀올 때 “넌 젖 짜러 직장 나오냐?”라는 말을 들었다. 다행히 친한 동료라서 큰소리로 같이 웃어넘겼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건 왜지?). 심지어 회식에 갈 때도 내 가방 안에는 모유 저장팩이 들어 있었다.
정성을 다한 만큼 아이가 건강하게 무럭무럭 컸으면 좋았겠지만, 아이는 아팠고 난 휴직을 했다. 아이를 업고 집 앞에 나가 있을 때 유치원에서 엄마와 손 잡고 돌아오는 아이들을 보며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 아이도 언젠가 건강하게 유치원에 다닐 수 있을까, 마음 놓고 뛰어다닐 수 있을까?’
아이와 한시도 떨어지지 못했고 아이 앞에서 울 수 없어서 참기만 하다 보니 나중에는 숨 쉴 때마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숨 쉬다가 죽을 것 같은 어느 날 자정 무렵, 몰래 집 밖에 나와 놀이터 미끄럼틀 뒤에 몸을 숨기고 실컷 울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이고 선물인 줄 알았던 아이가, 내가 짊어져야 할 무거운 십자가로 여겨졌다. 불안과 걱정의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특히 아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만났던 사람들은 삶을 겸허하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주었다. 아이의 건강과 행복에 대한 바람은 가장 큰 욕심이자 전부였다.
지금 아이는 열정적으로 농구를 즐기고,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다닌다. 그리고 집에서는 썩은 사과의 개수를 구하는 문제로 엄마와 싸운다. 밤 돼서 잘 때가 되면 말이 급격히 많아져서 나.토.박.(나이트 토킹 박스) 별명을 갖고 있는 아이를 재우다 보면 십중팔구 내가 먼저 잠이 든다. 종종 옛날 일은 잊어버리고 채근하거나 잔소리도 하지만 흙먼지와 땀범벅이 되어 돌아온 모습이 사랑스럽고, 친구들을 몰고 집에 오면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반갑고 재미있다. 좀 더디 가면 어떤가. 한 걸음 한 걸음 땅을 꾹꾹 디디며 가고 이왕이면 기분 좋게 웃으며 갈 수 있으면 좋지 않겠나. 벌써부터 방학 때마다 나인 투나인(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의 학원 일정)에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숙제 하느라 하얀 피부에 충혈된 눈보다는 햇빛에 그을려 거무튀튀한 피부와 탄탄해진 근육이 더 보기 좋다. 과속 대신 적정 속도로, 세상의 속도가 아니라 우리의 속도로 의연하게 나가볼까? 자, 그러니 이리 와서 앉아봐. 썩은 사과의 개수를 천. 천. 히 구해 보자.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