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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만춘 Oct 07. 2020

걷는 사람 만춘이

걷기는 free

며칠 앓다가 걸어 본 사람은 자기 발로 걷는 것의 황홀함을 알 것이다. 온몸이 아픈 것이 몸살 때문인지, 오래 누워 있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샤워를 싹 하고 걸으러 나갔던 지난 겨울의 어느 날, 오랜만에 두 발로 땅을 느끼며 걷는 기분이 마약 하듯 황홀했다(센 표현인 거 알지만 그때 떠오른 표현 그대로다). 오종우가 <예술적 상상력>에서 "아팠다가 회복되면 주위의 모든 것이 산뜻하게 다가온다. 오감이 살아났기 때문이다. 감각들이 되살아 나서 살아 있음을 느낀다."라고 말한 그대로다. 나가보니 볼거리가 참 많았다. 못 박는 듯한 소리가 나서 인부들이 가까이서 목공 작업하는가 했더니 야무진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아대고 있었다. 귀여운 녀석. 덕분에 핏기 없는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이후로 나는 걷기 예찬론자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걷기가 얼마나 좋은지 주장을 펼치지는 않지만 나 혼자라도 거의 매일 걸으며 속으로 ‘좋다, 좋다!’ 한다. 걷기는 free(공짜, 자유)다. 돈 걱정 없이 PT나 필라테스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한편 부럽기도 하지만, 따로 회원권을 구매하지 않아도 문만 열고 나가면 되는 걷기가 마음이 편하다. 게다가 요즘은 코로나 19로 인해 실내에서 하는 운동보다 바깥에서 하는 운동이 더 안전하다. 걷기는 부자든 가난하든 누구나 평등하게 할 수 있는 운동이다. 몸에 무리가 되지 않으면서 전신 운동, 유산소 운동이 되니 그 효과도 여느 비싼 운동에 못지않다. 또한, 트레이너나 체육관의 시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개인 시간에 맞출 수 있으니 시간 선택이 자유롭다. 나는 어떤 때는 아침에 걷고, 어떤 때는 저녁밥을 짓기 전이나 식사 후, 그것도 힘들면 밤 10시에도 걷는다. 시간이 없으면 10~15분이라도 걷다 온다.


시간 날 때 걷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 걷는다.

예전에는 운동하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 시간에 할 다른 일들은 늘 차고 넘쳤다. 남는 시간에 운동을 하려고 하니 가뭄에 콩 나듯 했다. 하지만, 걷기는 단지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 휴식은 단지 시간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살피고 살리는 것이었다. 다행히 집 근처에 탄천이 있어서 주로 그 길을 따라 걷는다. 어떤 때는 물가에 가만히 앉아서 아픈 눈은 잠시 감고 귀만 열어 물소리 듣는다. 얼굴에 와 닿는 바람결 느끼며 가만히 앉아 있으면 지친 내 모습 위로받는 듯하다. 누구의 어떤 말보다 더 편안하고 위안이 된다.


주말 이른 아침에 걷는 것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화면을 보던 눈에 초록을 담는다. 이어폰을 꽂았던 귀에 새소리를 흘린다. 인적 없이 조용한 거리에서 잠시 마스크를 벗고 신선한 아침 공기를 온전히 들이마신다.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듯하다. 고요하고 여유로운 주말 아침. 살랑이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새소리를 들으며, 마스크를 벗고 마음껏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자유가 벅찬다.


오늘 저녁엔 아이와 함께 걸었다. 예전처럼 자유롭게 친구들을 만나 신나게 뛰어놀지 못하고 주로 집에 머물며 원격수업을 듣는 아이의 건강이 걱정돼서 종종 내 걷기의 동행자로 초대한다(? 끌고 간다). 아이는 내게 스리랑카의 수도, ‘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코테’와 러시아의 도시,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캄차츠키’를 외우게 했는데 내 기억력이 워낙 안 좋다 보니 그 두 지명을 외우느라 30분도 넘게 걸린 것 같다. 오늘 집에 돌아왔을 때 아이가 “엄마에겐 두 개의 자아가 있는 것 같은데 밖에서 같이 걸을 때는 잘 웃고 착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함께 걷는 시간이 나쁘진 않았던 것 같아서 다행이다.


고민이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방에 누워 있는 것보다, 운동화 신고 밖으로 나가 걷는 것이 훨씬 낫다. 집안에 있으면 점점 생각이 커지고 커져서 마침내 머리가 도라에몽처럼 부풀어 오르다가 터질 것 같다. 생각하지 말자고 생각할수록 역으로 그 생각이 더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조지 레이코프도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5분 동안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를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할수록, 머릿속은 오히려 코끼리 수백 마리로 가득 찬다고 말했다. 우리가 어떤 단어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우리 뇌의 신경 회로망이 증가하고 활성화돼 그와 관계한 일정한 사고 패턴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짜증 나고 힘든 일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하는 일은 몽땅 허사가 되기 일쑤다. 차라리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가 씩씩하게 걸으면서 주변 풍경이나 구경하다 보면 머리가 비워진다. 그리고 어떤 때는 그 ‘큰일’이 사실은 ‘별 것 아닌 일’로 생각이 전환되기도 한다. ‘에잇! 뭐 어쩌라고!' 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빠르게 걸어보라. 3시간 고민보다 30분 걷기가 더 효과 빠른 치료제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걷는 동안에 구름을 자주 본다. 

가만히 구름을 쳐다보고 있으면 건우가 생각난다. 지금 저 구름을 건우도 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건우는 중학교 1학년 우리 반 학생이었다. 1학년 수련회를 다녀와서 쓴 소감문에 건우는 하루하루의 구름 모양을 적어 놓았다. 수련회 장소로 갈 때의 구름 모양,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올 때 보았던 구름 모양까지...  독특하다 싶어서 나중에 얘기를 나눠보니 건우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구름 모양을 관찰한다고 한다. 천문학자가 되겠다거나 어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냥, 좋아서 보는 거였다. 벌써 몇 년째 꾸준히. 선생님도 구름 보는 거 좋아한다고 했더니 표정이 밝아졌다. 그 말이 거짓이 되지 않기 위해 그 후로 구름을 더 자주 보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그 아이는 벌써 청년이 되었겠지만 내 기억 속에 건우는 매일매일 구름을 바라보는 맑은 소년으로 남아 있다. 구름을 볼 때마다 건우 생각이 나서 미소를 짓곤 한다.


내 발바닥이 땅바닥에 닿는 느낌.

나 여기 서 있고, 이 길을 걷고 있다.

걷는 사람, 만춘이.

하정우처럼 하와이에서 걷진 않지만 동네를 걸어도 다.


"내가 가는 곳이 길이 된다."

-<걷는 사람, 하정우>에서


© introspectivedsgn,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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