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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만춘 Oct 22. 2021

샤워를 했습니다

샤워를 했다.

샤워는 별 일이다. 샤워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3000원짜리 방수팩의 절반을 써야 하니 1500원이 들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지난 월요일 입원을 앞두고 샤워를 하고 나서 처음 하는 샤워였다. 아.. 따뜻한 물이 주는 그 편안함과 행복이란… 비록 아무리 방수팩이라고 해도 불안해서 최대한 빨리 샤워를 마치긴 했지만 나는 샤워 전과 후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나 혼자 힘으로 내 몸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다는 것은 자존감에 큰 몫을 차지하는 것 같다.


평소 ‘소확행’이라는 말을 별로 안 좋아한다. 욜로 욜로 하면서 없는 주머니 털어서 여행상품이나 물건 팔아치운 것처럼 소확행 소확행 하는 것은 ‘없는 사람은 그냥 없는 대로 현실에 만족하며 살라는 말인가’하는 삐딱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나도 소확행을 인정해야만 하겠다. 샤워를 할 수 있다는 것, 소화가 안 돼서 고기는 못 먹어도 강냉이는 조금 집어 먹을 수 있다는 것, 횡단보도의 초록불이 켜진 시간을 오롯이 다 써야만 할 정도로 느린 걸음일지언정 집 앞에 잠깐 걸어 나갔다 올 수 있다는 것, 나 혼자 일어나 앉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내 생각을 글로 옮길 수 있다는 것,…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낮에는 걷기 운동을 하려고 따뜻하게 입고 한 발 한 발 천천히 걸어서 집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빨리 걸을 수도 없었다. 그나마도 오래 걸을 수 없어서 곧 벤치에 앉아서 쉬어야 했다. 갑자기 팍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벤치에 앉아서 사람들을 보고 주변 풍경을 보면서 마음이 여유롭기보다는 쓸쓸해졌다. 돌아오는 길에 젊은 여성 두 명이 자녀 학원 얘기를 하면서 지나치는데 낯설게 느껴졌다. 반면 걸음이 불편한 사람들은 눈에 더 많이 띄었다. 그중에서도 내 앞에서 느리게 함께 걷고 있는 노부부가 서로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함께, 느리게 걸을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어 줄까?


수술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고 내 생애 그렇게 아팠던 적이 없던 것 같다. 난 마취가 끝나면 병실에 편안하게 누워 있을 줄 알았다. 두려움에 눈물 줄줄 흘리면서 침대에 누워서 수술실에 들어가고 마취 마스크를 끼고 “호흡 크게 하세요” 말에 따른 후 깨어난 회복실에서는 세상에, 이런!! 내 뱃속을 들쑤셔 놓은 고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온몸이 아팠다. 힘이 하나도 없어서 나지막한 소리로 겨우

“너무 아파요..”

라고 할 수밖에. 회복실 여기저기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깼으니 옮기는 게 우선이었는지 난 신속하게 병실로 옮겨졌다. 덜컹거리기만 해도 너무 아팠다. 그때 내게 든 생각은 ‘언젠가 죽을 때도 이렇게 아플까?’, ‘나중에 또 이런 아픔을 겪어야 할 때가 올까’ 하는 걱정이었다. 수술받지 않고 한순간에 딱 죽어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시간 수술 후 1시간 더 회복실에 있다가 병실에 왔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보호자와는 5분 정도 간단히 인사만 하고 헤어져야 했다. 다음날까지 소변줄을 한 채 누워만 있었다.


아프기만 하고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던 시간을 지나 이제 조금씩 통증은 줄어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늘고 있다. 샤워도 별 일이고 산책도 별 일이다. 그리고 나를 걱정하고 기도해 주던 사람들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가슴 깊이 새긴다. 절대 잊지 말아야겠다. 내일 산책은 남편과 아이와 함께 나갈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나를 위해 천천히 걸어줄 것이다. 함께 앉은 벤치에서 나는 오늘보다 더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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