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언어가 되면 슬픔은 나를 삼키지 못한다.
"슬픔이 언어가 되면 슬픔은 나를 삼키지 못한다.
그 대신 내가 슬픔을 '본다'.
쓰기 전에 슬픔은 나 자신이었지만
쓰고 난 후에는 내게서 분리된다.
손으로 공을 굴리듯,
그것은 내가 가지고 놀 수 있는 무엇이 된다."
-이윤주,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글쓰기는 치유의 기능이 있다. 글을 쓰면 얼기설기 얽혀 있는 내 머릿속이 정리된다. 내가 나의 감정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상황을 이겨내는 힘이 된다. 슬픔, 분노, 외로움 등이 나를 공격해 쓰러뜨리기 전에 내가 거리를 두고 이 감정들을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내 삶의 주인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다. 글자 하나하나가 사다리 계단이 되어 내가 감정에 매몰되기 전에 탈출할 수 있게 돕는다.
저마다 자기를 지키는 사다리가 필요하다. 사람에 따라 그것은 그림, 춤, 음악, 여행, 운동, 혹은 글쓰기일 수 있다. 슬픔이 홍수처럼 밀려와 자신을 담가 버리려고 할 때, 사다리를 타고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한다. 평소 취미도 없고 운동이나 여가를 즐기지 않고 오로지 한 가지 일에만 매진하는 사람은 실패를 하면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 몰라 허둥대거나 자신의 인생의 문이 닫힌 것처럼 좌절해 버린다.
때로는 나의 이 사다리가 예술작품이 되기를 바란다. 나를 구해 준 것처럼 다른 사람도 구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내 사다리의 가치를 남들에게 증명해 내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세상에 널린 사다리의 개수는 셀 수 없이 많은 데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와 내 사다리에 관심이 없다. 그럼 뭐 어떡하겠는가. 나는 계속 내 사다리를 고치고 다듬을 뿐이다. 슬픔이 나를 삼키지 않도록, 어수선한 마음을 정리할 수 있도록, 그리고 언젠가 다른 이들도 마음 편히 이용할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