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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만춘 Oct 22. 2023

어떻게 바꿀까?

교육 이야기

“궁금한 게 없으면 어떡하나요?“

수업 중 학생들에게 자주 듣는 질문이다. 이 역시 질문 형태이긴 하지만, 이는

”없으면 안 써도 돼.“

라는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이다(물론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질문 만들기를 어려워한다. 최근에 ‘몸’에 관한 짧은 설명문을 가지고 ①글을 읽기 전 알고 있던 것, ②글을 읽고 알게 된 것을 쓰고, ③더 알고 싶은 것을 질문 형식으로 쓰라고 했더니 ③번 칸을 채우지 못해 쩔쩔맸다. 스스로 질문을 만든 학생들은 챗gpt나 AskUp 등 AI 시스템이나 검색 사이트를 활용해서 답을 찾아보도록 했는데, 그때가 되도록 여전히

”뭘 물어야 하죠?“

라며 난감해하는 학생들이 꽤 있었다. 우리 몸에 대해 궁금한 점이 왜 없을까? 손톱은 왜 자라는지, 하루에 평균 얼마씩 자라는지, 트림은 왜 나오는지, 방귀를 참으면 어떻게 되는지, 야한 생각을 하면 정말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는지 등등 조금만 생각하면 질문이 무한하게 쏟아질 것이다.


단순 지식은 더 의상 의미가 없다. 금방 검색해 보거나 AI에 물어보면 정보가 쏟아진다. 그러나, 아직 AI도 스스로 질문을 만들지는 못한다고 한다. 좋은 질문이 좋은 답을 얻는다. 그러니 질문을 제대로 할 줄 아는 능력이 경쟁력이 될 것이다. 또한, 질문은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 우리 아이들이 급변하고 수많은 문제가 쏟아지는 시대 변화에 매몰되거나 수동적으로 끌려가기보다 그 변화를 이끄는 주체자가 되게 하려면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질문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질문은 생각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동안의 우리 교육이 얼마나 아이들의 생각을 키워주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수업 중 학생들의 생각을 물으면 대답이 어느 정도 예상된다.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고만고만하다. 글도 마찬가지다. 어떤 활동을 하고 난 후 학생들의 감상문 내용은 대체로,

“재미있었다. 다음에 또 이런 활동을 하고 싶다.”

인데,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왜 재미있었는지 물어보면

“그냥 다요.”

라고 답할 때가 많다. 활동할 때 아이들의 표정을 떠올려보면 이 말이 진심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그렇게 재미있어 보이는 얼굴이 아니었는데, 정말 다음에 또 하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었을까?'


독서감상문도 마찬가지다. 여러 명이 각자 다른 책을 읽은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대부분

“감동적이었다.”

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왜 감동적이었는지, 이와 관련된 자기 경험이 있는지, 등장인물이나 작가의 생각과 자기 생각이 다른 부분은 없는지 물어보면 당황하면서 그제야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나마 자기 생각을 말하거나 쓰는 학생들이 이렇고, 그마저도 거부하는 학생들도 종종 있다. '생각하기'를 보이콧boycott 한다는 느낌이 들 만큼, 그 아이들은 "몰라요", "그냥요"라는 대답으로 일관한다. 심지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가로젓는 일도 있다.


최근 수업 시간에 교과서에 수록된 단편 소설을 같이 읽고 모둠별로 '느낀 점'을 간단히 이야기 나누라고 했더니 끝까지 못 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맞고 틀리고가 없고 한 문장 정도로 짧게 말하면 되는 '느낀 점'이고, 전체 앞에서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4명으로 구성된 모둠 내에서 말하면 되는 것이었는데도 그 학생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학생들이 충분히 생각하고 대답할 때까지 기다렸지만 그들은 결국 "생각이 나지 않는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하면서 난처해했다.


영상에 많이 노출된 학생들에겐 아무리 단편 소설이어도 읽고 이해하기 힘들 만큼 긴 글일까? 그런데 시를 수업할 때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시나 소설을 읽어도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감정을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것일까?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가 부끄러운 것일 수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활동지에 적으라고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할 필요를 못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귀찮아하고, 자기 생각을 표현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생긴다.


어떤 내용에 대해

‘왜 그럴까?’

‘다르게 볼 수는 없을까? 내 생각은 다른데?’

하고 고민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기 어렵다. 그저 받아 적고, 남의 생각을 제 생각인 양 말하거나, “몰라요”, “그냥요”라고 대답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학교 교육이 아이들을 수동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회의가 든다.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이렇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거 하라고 한다. 저거 하라고 한다. 공부와 숙제의 범위와 양이 정해져 있고, 외워야 할 단어와 공식이 정해져 있다. 시키는 대로 성실하게 잘 따른 데다 타고난 능력까지 받쳐 준다면 어느새 영재고/특목고 준비반, 의대 준비반 학원 교실에 앉아서 선생님 말씀을 받아 적고 있는 자기 모습을 볼지도 모른다. 영재고나 특목고는 왜 가려고 하는지, 정말 과학자나 의사가 될 생각이 있는지 미처 깊이 고민해 볼 시간조차 갖지 못한 채 말이다. 그래도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착하다고 칭찬받는다.


이인은 「생각을 세우는 생각들」에서

“착함은 길들여진 존재로서 하란 것을 충실히 하는 ‘노예’라는 표시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고 했다. 좀 심한 표현일까? 하지만 세상의 규율에, 다른 사람의 시선에 길들어서, 스스로 구속된 삶을 택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수동적인 생활은 생각을 가둔다.


물론 요즘 아이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나 역시 학교 다닐 때 오지선다형 문제에서 맞는 답 하나를 골라야 했다. 주관식이라고 해봐도 답이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예를 들어, 영어 시험에서 제인이

“How are you?”(하우 아 유)

라고 물으면, 톰은

“I’m fine thank you, and you?” (아임 파인 땡큐, 앤드 유)

라고 답해야 했다. 사실 우리말로

"잘 지내?"

라는 인사를 건넸을 때도 대답이

“나 잘 지내. 넌 어때?”

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 피곤해.”

“그럭저럭”

“요즘 우울해.”

등 다양할 수 있는데 무조건 잘 지낸다는 대답만 외웠다.


톰의 대답으로 다른 영어 문장을 썼어도 선생님께서 정답 처리를 해 주셨을까? 교과서 대화 지문을 그대로 외웠던 우리는 미처 다른 것을 써 볼 생각조차 못 했기 때문에 선생님의 반응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한 동료 선생님은 국어 시험에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마지막에 ‘김 첨지가 문을 00 열었다’ 부분에서 00부분이 ‘왈칵’인지, ‘벌컥’인지 헷갈려서 제대로 쓰지 못했던 것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만약 현진건 작가라면 내 작품을 그런 식으로 문제 낸 것에 대해서 화를 ‘벌컥’ 냈을 것이다.


우리 세대는 자라면서 부모님, 선생님, 주위 어른들로부터 "이러이러해야 한다"라는 모범답안 같은 말씀을 자주 들으며 자랐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다. 무조건 어른들의 말씀이 삶의 진리가 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다.

“내가 다 해봐서 알아!”

라는 말은 과거에는 어른의 지혜가 됐을지 몰라도 지금은 꼰대의 아집이거나 오류를 낳는 태도로 받아들여진다.


그만큼 시대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기가 어렵고, 그 변화에 적응할 때 과거의 경험은 더 이상 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아이들은 가정, 학교, 사회로부터 정해진 길을 착실히 걸으며 모범답안을 찾으라는 요구를 받는 것 같다. 세상은 변했는데 교육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이인은 「생각을 세우는 생각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하는 일이나 믿는 바에 "왜?"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다가 누군가 왜냐고 물으면 그냥이라거나 잘 모르겠다는 말을 웅얼거린다. 이미 특정한 생각을 믿고 따르게 되는 세뇌를 당한 꼴이다. 세뇌는 언제나 세뇌당하는 사람 모르게 이뤄진다."


자신이 '신념'이라고 굳게 믿어 왔던 것이 사실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낸 생각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주입되고 세뇌당한 생각인지도 모른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일에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질문을 던져 봐야 한다.


나는 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내가 하는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들으면 더럭 겁이 난다. 나도 틀릴 수 있는데 아이들이 들으면서 점검을 안 하고, 있는 그대로 수용해 버리는 것 같아서

'이게 틀린 이론이면 어떡하지?',

'내가 잘못 설명하고 있는 건 아닌가?'

혼자 속으로 고민한다. 실제로 아이들이 마구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던 내용을 나중에 틀렸다면서 다시 바로잡아줘야 할 때는 참 곤혹스럽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쩌다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생각'을 말하는 아이들을 만나면 참 반갑다. 눈이 커지고 귀가 쫑긋해진다. 그런 아이들의 생각은 나에게도 봄바람이고 나그네이다. 그런 아이들을 통해 나 또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하루하루 내 성벽의 돌담을 하나하나 쌓아 올리며 편협해지거나 고집스러워지는 것은 아닌지, 내 생각만 옳고 상대편은 틀렸다는 생각이 점점 더 굳어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인터넷에서 나를 위한 추천 뉴스라며 자동으로 올라오는 것들의 일관된 특징들을 보면서 겁이 나기도 한다. '우리끼리' 뭉치고, 저쪽은 망하기를 은근히 바라게 된다.


‘그래도 이제까지 그렇게 해 왔으니까 남들이 하는 대로 하는 게 좋아’라고 기존 질서에 순응하기보다 ‘그러면 어떻게 바꿔 볼까?’라는 사고와 태도의 전환이 필요할 때다. 자신이 노예인 줄 모르면 주인이 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생각의 노예가 생각의 주인이 될 수 있으려면 남의 생각만 비판할 것이 아니라, 내 생각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일에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질문을 던져 봐야 한다. 익숙하고 편안한 생각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새롭고 다양한 생각을 접하고 다른 관점으로 보려고 해야 할 것이다.


낯선 말과 글은 생각의 성벽 안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 시원한 바람과 같다. 다양한 자극을 접하면 성벽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 수 있고, 그것들에 열린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성벽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유연하되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 자동반사적인 '반응'으로서의 생각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을 세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일제식(一齊式) 경쟁 교육을 받은 교사, 학부모로서 나의 경험에 비추어 우리 아이들도 같은 방식으로 가르치려 하는 것은 아닌가? 수시로 점검한다. 우리가 아이들의 미래를 빼앗는 어른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오늘의 아이들을 어제처럼 가르치면 그들의 내일을 빼앗는 것이다” -존 듀이(John Dew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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