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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만춘 Aug 13. 2020

선생님이 워라밸을 꿈꾼다고요?

장정일의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이라는 시의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나는 일에 대한 생각을 라디오 끄듯이 끄고 싶다. 온-오프 스위치가 있어서 출근했을 때는 ‘on’을, 퇴근하면서는 바로 ‘off’를 눌러 깔끔하게 전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퇴근길에 터널을 지나면서 세일러문이 되는 상상을 한다는 친구가 있다. 장소를 이동하는 순간 다른 캐릭터로 변신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직장에서 있었던 복잡 다난한 일들은 터널을 지나는 순간 다 잊어버리고 퇴근 후의 시간을 가정에 충실하거나 온전히 즐기는 것이다. 반면 나는 집에 와서도  멍하니 넋 놓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직장에서의 고민과 스트레스를 집이라는 사적인 공간까지 들이는 격이다. 그러다 보니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끊임없이 고민하느라 기진맥진해진다. 밤늦게까지 집에서  학교 업무나 수업 준비를 하기 때문에 아예 집에 업무를 가져갈 수 없는 직종(예. 국정원 직원, 군인, 농부 등)이 부럽기도 하다.

교사라는 직업이 힘든 점 중에 하나는 퇴근해서도, 심지어 밤늦은 시각에도 학부모로부터 걸려오는 전화였다. “늦은 시각에 죄송합니다”로 시작되는 전화(죄송하면 전화 안 하시면 안 될까요?^^;;)는 대부분 아이가 학원에서 귀가한 후 말하는 내용을 듣고 담임선생님께 확인을 하려는 것이다 보니 밤 10시 이후인 경우가 많았다. 얼마나 궁금하고 걱정이 됐으면 그 시각에 전화를 하실까, 만약 전화를 안 한다면 밤잠을 편히 못 주무실 테니 그분을 위해서는 그 시각에라도 내용을 확인하고 안심하시는 게 낫겠다 싶으면서도, 교사는 퇴근해도 퇴근이 아닌 현실에 씁쓸해지곤 했다.


한 번은 추석 연휴에 친정에 내려갔는데 방과 후 학교 밖에서 싸움이 난 아이들 엄마들이 수시로 전화하시는 바람에 연휴 내내 가족들 얘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일은 양측 합의가 안 되는 바람에 꽤 오래 지속되었는데, 주말에 시댁 식구들과 식사 중이라고 해도 전화를 1시간 가까이 안 끊으셔서 밥도 못 먹고 식당 앞에 쪼그려 앉아서 전화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모드 전환이 쉽지 않은 나는 저녁 시간에  ‘훅!’ 들어오는 학부모 전화를 한 통 받고 나면 내 리듬이 깨져 버리고 종종 두통을 겪기도 했다. 그래서 (내 관점에서는) 급하거나 중요한 일이 아닌데도 매일 저녁에  걸려오는 반장 어머니의 전화를 나중에는 아예 안 받아버리기도 했다(그분이 이 글을 읽지 않으시길...^^;). 그분은 학교 홈페이지 공지사항, 가정통신문, 학부모회가 있는데도 본인은 물론 학급 어머니들이 궁금한 점이 하나라도 있으면 대표로 담임인 나에게 전화해서 바로 해결하려고 하셨는데 문제는 항상 퇴근 시간 이후에 내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셨고, 거의 매번 통화 시간이 너무 길게 늘어졌다. 질문하러 전화하신 게 맞나 싶을 만큼 통화의 대부분을 본인 말씀하시는 데 쓰셨고, 나는 계속 듣고 있어야 했는데 전화를 끊고 나면 머리가 너무 아팠다. 반장 어머님이라는 대표성을 존중해서 두 달 정도 버티다가 나중에는 전화를 안 받고, 문자로 무슨 일로 전화 주셨는지 여쭤보니 그분도 점점 전화를 하지 않으셨다. 학부모와의 소통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상대하고, 퇴근 후에는 학부모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힘겨울 때가 있었다.

내가 영국에서 석사 과정을 거칠 때,  교수님들의 개인 휴대폰 번호를 학생 중 누구도 몰랐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담임선생님의 휴대폰 번호는 물론, 개인 이메일 주소도 몰랐다. 무슨 일이 있으면 학교 행정실로 전화하거나 학급 이메일 주소로 메일을 보냈다. 그다지 불편함이 없었다. 교수님도 선생님도 업무 시간에 소통하면 됐다. 이런 나의 경험에 더해 호주에서도 담임교사의 연락처는 '안물안궁'이라는 신문기사를 접하고 나서 한국에서 나도 한번 전화번호 비공개에 도전해 보았다.

학기 시작 첫날에 학부모님들께 담임교사인 나를 소개하고 학교 및 학급 운영을 안내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내 핸드폰 번호 대신  학교 직통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써넣었다. 그리고 학부모 총회 때 학부모님들을 만난 자리에서 내 핸드폰 번호를 공개하지 않는 것에 대해 정중히 양해를 구했다. 학부모님들은 안 그래도 번호 물어보려던 참이었다며 웃었다. 학기별로 있는 학부모 수업 공개, 학부모 상담 주간에 직접 뵐 수 있기를 바란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메일 확인할 것이며, 직통 전화로 연락 주시라, 수업 중에 못 받더라도 부재중 전화 기록 남으니까 확인 즉시 전화드리겠다,... 처음이다 보니 부연 설명이 붙었다. 속으로 어떤 생각들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날 총회 때 오신 어머님들께서는 표정이나 말씀으로 이해한다고 표현해 주셨다. 사실 그전까지는 계속 핸드폰 번호가 공개됐었기 때문에 필요하면 얼마든지 지난해 우리 반 학생이나 학부모로부터 내 핸드폰 번호를 알아볼 수는 있었겠지만 내 입장을 알고 있으니 아무래도 따로 핸드폰으로 연락하기는 조심스러우셨을 것이다. 죄송한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퇴근 후엔 안심하고 쉬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러다 그분의 메시지를 받았다. 보란 듯이 일반 문자도 아니고 카카*톡으로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셨다. 교사가 이기적으로 워라밸을 꿈꾸냐며...   불에 덴 것처럼 아팠다. 왜냐하면 그게 맞았기 때문에...  학생, 학부모의 편의나 필요보다 나 자신의 편안함을 추구했던 거, 맞다. 이기적으로...

  나는 그분 자녀의 2학년 담임이었는데, 3학년 담임선생님이 그 아이가 졸업한 후에도 그분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그만하길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담임 선생님이 개인 휴대폰 번호를 공개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이기적이고 별난 행동이라는 인식. 그게 현주소이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 그것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며 성장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보살피는 직업인 교사. 수업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직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다. 전문직이기 전에 서비스직이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사회적으로는 존경보다는 비판을 더 많이 받는 것 같다. 나는 절대 존경을 바라지 않는다. 내가 그만큼 훌륭한 사람이 아니고, 그럴 자신도 없다. 나는 다만 존중을 바란다. 교사도 누군가의 자녀, 배우자, 혹은 부모라는 것. 그들도 퇴근 후에 가족을 돌보고 쉴 시간이 온전히 필요하다는 것. 이것을 알아주고 존중해 주길 바란다면 여전히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것일까?


© chrislawton,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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