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만춘 Aug 17. 2020

X세대 40대 아줌마가 온다


제목은 섹시해야 한다던데 '40 아줌마'라는 말은 여간해선 섹시한 느낌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40 아줌마도 한때는 지금의 90년생처럼  사회적으로 관심을 받고 연구되던 이른바, 'X 세대'이다.

임홍택은 <90년생이 온다>에서 X세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해하기 힘들다는 의미를 가진 X세대는 구속이나 관념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특성을 보였다. 그래서 이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에 비유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이들 X세대는 이전 세대에 비해 소속감이나 충성심이 약하고,  직장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특징을 보였다.”

임홍택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은 딱히 규정할  없고,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는  정체불명의 세대를 어떻게 부를지 고민했고, 기성세대와는 상당히 이질적이지만 마땅히 정의할 용어가 없다는 뜻에서 ‘X’라는 글자를 붙였다고 한다. 정체를   없는 미지수 X. (음... 좀 멋진데?) 물론 당시 미국과 우리나라의 경제적 상황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미국에서 말하는 X세대의 특징을 우리나라에 바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같다. 예를 들어, 우리 세대가 이전 세대에 비해 소속감이나 충성심이 약한지는 모르겠으나  직장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이 우리 세대를 대표하는 특징이라는 부분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내가 여태  직장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는 것은 공무원이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다양한 직종에 있는  또래 친구들을 떠올려 보더라도 아직까지 우리 세대가 그렇게 쉽게 직장을 옮기지 못했던 것은 우리나라의 문화나 경제 상황이 미국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인  같다.


정체불명의 신세대로서 떠들썩했던 X세대도 어느새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가 되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 'X세대'라 불리며 한창 관심을 받던 우리 세대도 'X세대란 제품을 팔아먹기 위해 사용한 광고 용어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하니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얄팍한 주머니를 털기 위한 수법이었나 싶어서 씁쓸하다. 그나마도 '지금은 복고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니 더 이상 소비자로서도 쓸모가 없어져서 구석으로 밀쳐지는 기분이다.


나와 비슷한 나이와 취향을 가진 작가가 쓴 책(한수희,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읽었을 때 나는 오랜 친구가 보낸 모스부호를 만난 느낌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HOT에 열광하던 X세대. 지금은 걷기와 빵과 커피를 좋아하는 40대 아줌마. 하지만 아직도 빨강 머리 앤이 가슴속에 남은 사람. 가림막이 걷히면 “반갑다, 친구야!” 하며 포옹하고 악수하고 싶다(유재석이 나왔던 이 프로그램, 지금 기억하고 있는 사람 있을까?). ‘응답하라 1998’ 드라마가 나왔을 때도 나와 같은 기억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참 반가웠다.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잔잔하게 울리는 영화 ‘건축학 개론’도 가슴을 울렸다. 이승환 콘서트에 가서 나처럼 열광하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이승환 콘서트에서는 가사를 화면에 띄워주지 않아서 가사를 모르면 노래를 따라 부르기 힘들다) 내 옆자리 여성을 보고는 그녀의 두 손을 덥석 잡고 싶었다. “너도 빠순이였니?”라고 물으며...

스물아홉 살의 12월 31일, 헛헛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명동 한복판을 휘적휘적 걸었었다. 내가 ‘서른’이 된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난 찬란한 청춘의 20대를 제대로 즐기며 보낸 건가? 홍대 클럽에서 밤새 춤추고 술 마시며 젊은이’답게’(?) 놀아보지 못했으니 시간을 잘못 보낸 게 아닌가? 첫 연애 후 결혼해 버렸으니, 미치도록 사랑하거나 가슴 절절한 이별로 인생 끝난 것처럼 아파하지도 않았으니 꼭 했어야 할 경험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낸 게 아닌가? 20대는 뭔가 ‘다이내믹’하고 ‘익사이팅’하게 보냈어야 한다는 생각에 밋밋한 것 같은 내 20대를 접으며 아쉬움이 컸다. 그런데 서른에서 마흔으로 넘어갈 때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지금은 가끔 내 나이가 헷갈릴 만큼 나이가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푸석한 머릿결과 탄력 없는 피부가 아쉽긴 하지만 뭐 어쩌겠나 싶다.

40대는 큰 병이 없어도 눈의 피로, 어깨 결림, 만성 위염 그리고 튀어나온 배가 쉽게 따라붙는 나이. 어쩌면 이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일상을 보내는 게 필요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 한창 진가를 발휘하며 전성기를 맞는 사람들 중에는 40대가 많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만하다. 아마 그동안 배우고 쌓아놓은 기량을 노련하게 펼칠 수 있는 시기인 것 같다. 뽀빠이를 모르고 서태지를 모르는(양현석은 알더라) 청소년들을 보며 세대차이를 느끼면서도 어떻게든 꼰대는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이미 그들은 나를 꼰대로 여기고 있을지 모른다는 슬픈 생각이 불현듯 든다...).


지금 우리 사회는 새로운 세대인 90년대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간단'하거나, '재미'있거나, '정직'한 것을 추구하는 세대. '세대(generation)'라는 영어 단어의 어원에는 새로이 출현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니, 이는 변화가 전제된다. “요즘 젊은 애들은”이라는 말을 듣기만 하다가 어느새 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요즘 젊은 놈들은 버릇이 없다"라는 말은 4000년 전 바빌로니아 점토판 문자를 비롯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등장하는 말이라고 한다. 유명한 소크라테스도 "젊은이들은 아무 데서나 먹을 것을 씹고 다니며, 버릇이 없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니 그 옛날에도 젊은이들에 대한 비판과 염려는 있었나 보다. “기성세대는 새로운 문화의 담당자는 그들 자신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임홍택의 말처럼 어느새 기성세대가 된 나 역시 새로운 문화의 담당자로서 등장하는 새로운 세대에게 자리를 내어줄 준비를 하고 그들이 창조해 나갈 새 문화에 대해 기대할 때가 된 것 같다.


가을이 오고 있다. 나는 지금 내 일생에서 9월이 아닐까? 한창 예쁘게 피어나는 꽃은 아니겠지만 아름답고 탐스럽게 열매 맺어 과즙이 넘쳤으면 좋겠다. 나만 먹지 않고 주위에 실컷 나눠줄 수 있는 열매였으면 좋겠다. 쓰고 비릿하기보다는 향기롭고 달콤한 열매이면 참 좋겠다. 나와 주변 사람들이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내 나무의 열매가 기대된다. 또한 나무는 나이 들수록 속을 비운다고 한다. 그래서 그 안이 다람쥐, 새 등 다른 생명체들의 아늑한 보금자리가 돼 준다. 튼튼한 뿌리로 오랫동안 자신을 키운 나무는 이렇게 안팎으로 필요하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 간다. 내 인생의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면 오래된  나무가 제 속을 비워 다른 생명체들을 품듯이, 나 역시 어리거나 젊은 세대를 위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 Atky, 출처 Pixabay




작가의 이전글 브런치 작가라는 타이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