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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만춘 Sep 20. 2020

내가 나를 기억하다

김광섭, <마음>

초빙교사 모집에 지원할 때였다. 지원서에 그동안의 성과와 실적을 쓰라고 하는데 하얀 모니터에 깜빡이는 커서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렇게도 쓸 말이 없을까?


성과(成果): 이루어 낸 결실.

실적(實績): 실제로 이룬 업적이나 공적.


 돌이켜보면 나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왔다. 열정과 소명의식이 있었고, 책임감과 성실함도 잃지 않으려 했다. 어느덧 조직에서 ‘허리’ 부분이 되는 중간 관리자가 되었지만, 막상 성과와 실적을 쓰려고 하자 마땅히 쓸 내용이 없었다. 교육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수치화되거나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기 어려운 분야이기도 하지만, 항상 현재 당면한 과제와 대상에 충실한다는 생각으로 외부 활동이나 대회 참여 등에 무관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면이 부족하면 다음 장에 이어서 작성 가능’하다는 친절한 안내에도 불구하고 빈 화면을 채우기 어려웠다. 이제껏 나름 열심히 노력한 것에 비해 남는 것, 누군가에게 증명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놀랍고 허무했다. 어둠 속에서 학교의 문을 마지막으로 닫고 나갔던 수많은 날들, 일거리를 잔뜩 집으로 들고 가서 밤을 새우며 일하던 날들, 아이들과 다양하게 수업했던 모습이 생생하지만 손가락 틈으로 새 나가는 모래처럼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헛살았던 것일까?

이왕이면 남에게 인정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 유능한 데다 성품까지 좋아서 완벽해 보이는 사람은 어딜 가나 환영받고 필요한 존재가 된다. 좋은 평가와 인정은 본인에게도 동력이 되고, 보람으로 남는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본보기로서 선망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남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걸까? 나로 인해 인생이 바뀌었다고 편지를 보내오는 제자가 있고, 고등학교 보충수업이 있던 시절, 신청 10분 만에 마감된 내 수업을 교실 뒤에서 서서라도 듣겠다고 교무실에 찾아와서 간절하게 부탁하는 학생들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아이들과 때로는 진지하게 토론하고, 때로는 실컷 웃으며 즐겁게 수업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국어 수업이 제일 재미있어요!"

하는 말을 들으면 밤에 자면서도 행복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기억하고 있다면 그 역시 가치가 있다. 사실 남들과 상관없이 내가 스스로 수업을 잘 못했다고 생각되는 날에는 퇴근길 발걸음이 하염없이 무겁곤 했다. 다른 동료나 관리자가 보고 평가하지 않아도 많은 아이들이 매일같이 내 수업에 참여하며 나를 보고 있다. 그런 아이들이 커서 어렴풋하게나마 좋은(?) 선생님으로 나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 수도 있지만, 굳이 기억해 주지 않더라도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그로써 충분하지 않나? 누구보다 내가 그런 나의 모습을 기억해 주고 있으니 괜찮지 않나?

‘나’에게 스스로 너무 엄격하거나 가혹할 필요는 없다. 그만하면 잘했다고, 애썼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토닥토닥... 그렇게 살아도 될 성싶다. 남은 시간도 열심히, 무엇보다 아름답게 잘 살아보자고 스스로 격려하면서....  그러면 나는 그런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더 행복할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처럼...


마음

- 김광섭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느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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