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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Cocktail Blues

007 - 쓰다

Cocktail Blues

by 유정

안식월 기간 동안 무척 다행스럽게도 오래 끌어온 장편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두 명의 요원들에게 수정 원고를 보내고 두 근 반 세 근 반 기다리면서 수정 원고를 애써 외면하는 중이다. 수정을 시작할 때는 의기양양했던 마음은 퇴고가 끝나자 의기소침해져서, 또 한 번의 수정을 위해 일껏 수작업까지 해 놓고선 들여다볼 용기가 나질 않는 것이다. 그래서 묵혀뒀던 단편 소설을 꺼내 들었다. 다시 쓴다. 하루에 한 줄밖에 못 쓰더라도 써둔 문장들을 곱씹어보고, 단어를 바꿔보고, 마음도 바꿔본다. 오랜 시간이 걸려 돌아온, 어떻게든 쓰고 싶다는 마음을 붙들어두고 싶다. 계속 쓸 수 있게 해주고 싶다. 쓰지 못하는 동안에도 나는 ‘쓰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래서 돈을 쓴다. 먹이고 재우고 이것저것 보고 듣고 생각하게 하려고 돈을 쓴다. 그러자니 쓸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려면 시간을 써야 하고 그러다 보면 글 쓸 시간은 부족해진다. 못마땅한 도돌이표를 기꺼운 도돌이표로 바꿀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14년 전 그때처럼 무모하고 과감한 결정이 필요하고, 또 그걸 하겠지만 그때보다는 좀 더 안정적으로 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그러자면 나를 잘 먹이고 잘 재워서 이것저것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도록 꾸준히 돈을 써야 한다.


나를 키우는 데 쓰는 돈이 더 이상 낭비도 사치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기까지 참, 오래도 걸렸다.


뜬 눈으로 밤 지샐 때마다 곁에서 다독여주는 가을도 돈 벌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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