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Cocktail Blues

011 - 귀밝이 술

Cocktail Blues

by 유정

어제는 정월대보름이었다. 어린이 시절에는 -주말의 명화 녹화 담당일 정도로 어린이 시절부터 밤잠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밤에 잠들면 눈썹이고 머리카락이고 하얘진다고 해서 일찌감치 잤더랬다. 다음날 아침, 눈썹도 머리카락도 여전히 검은 것을 보고 나서부터 산타의 실존을 믿지 않게 되었다. 아무튼 어린이 시절 이후로 정월대보름을 챙긴 것은 딱 한 번, 지금 살고 있는 건물에서 이벤트를 열어 입주민들과 부럼을 나누었을 때뿐이었다. 어린이 시절 정월대보름의 추억이 좋았는지 내가 기획했던 이벤트였는데 정월대보름도, 부럼도 생소해하던 입주민들도 있었고 생소하든 말든 무언가 나눈다는 것을 즐거워하던 입주민도 있었다.


어제 아침부터 정월대보름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월대보름이라는 글자를 인지하고 있었을 뿐, 어린이 시절 기억도 가장 좋아하는 보름달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업무 시간 내에 해야 할 일을 끝내고 홀가분하게 퇴근하고 공방에 갈 생각뿐. 제 때 퇴근하고 제 때 공방에 도착하니 ㅇ선생님이 '어쩜 딱 맞춰 왔다'고 반겨 주셨다. 그리고는 귀밝이 술 마셨느냐고 물으시더니 아직 안 마셨다고 하니 그럼 한 잔 하자시며 추사40을 꺼내셨다. ㅂ선생님은 정월대보름 풀코스-나물 예닐곱 가지와 오곡밥과 소고기 고추장-를 꺼내 차리셨고 우리는 한껏 들떠 나물 안주에 귀밝이 술을 마셨다. 두 선생님은 늘 내 주량을 놀라워하시는데, 정작 두 분은 소주잔 한 잔이면 발갛고 얼근하게 취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사40은 각 1잔씩, 곁들인 나물과 오곡밥과 고추장 소고기 안주는 놀라우리만치 맛있었다. 주량이 약한 사람들과 술을 마시면 술 본연의 맛과 향과 도수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 좋다. 그러고도 아쉬움이 남았던 두 선생님은 아쉬운데 더 마실 것이 없나 뒤적이다 맥주 한 캔을 찾아내셨다. 맥주 한 캔은 나에게만 권하시고, 대신 소주잔 한 잔 분량을 요구하셨다. 기꺼이 소주잔 두 잔 분량을 내어드리고 나머지는 독차지. 디저트로 사과 두 쪽을 먹고, 구름 밖으로 나온 보름달에게 소원도 빌고, 초콜릿 포장이 마음에 안 드니까 초콜릿도 한 조각 먹고 귀밝이 술 행사는 마무리되었다.


IMG_8948.jpg 인생 나물을 찾았다. 추사40은 언제나 맛있고.


공방 선생님들은 갈 때마다 나에게 뭐든 먹이신다. 정작 본인들은 새 모이만큼 드시면서 -조금씩 여러 종류의 음식을 계속 드시긴 하지만- 자꾸 뭔가 주신다. 먹을 것을 담고 또 담아주시고 다정한 안부를 물어봐 주시고 선생님들과 다른 내 생각을 오롯이 안아주시고 내 작업 아이디어를 특별하게 여겨 주시고... 자꾸 주시는데 주실 때마다 덥석덥석 받을 수 있게 주신다. 그래서 나는 바람의 온도가 바뀔 때마다 그에 어울리는 꽃을 사가고, 달콤한 디저트를 사간다. 내가 이곳을 공방이라 쓰고 치료실이라고 읽는 이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010 - 칵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