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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에 열 두 번째, 열 세 번째 기록을 써두었는데 보이고 싶지 않아졌다. 너무 오랜 기억이라 다시 가다듬는 것도 어렵거니와 그 후로 얼마 전까지, 어쩌면 지금까지도 마음 한 구석이 아리다. 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고 그 때마다 마셔댔기 때문에, 그러니까 거의 매일 술을 마시다 보니 개학 일주일 전 밀린 서른 날 분량의 일기를 써야 하는 기분이 되어버리고, 숙제 안 했다고 야단칠 선생도 없으니 ‘나 안해’. 그렇게 중국요리와 술을 마셨던 열 두 번째, 참치와 소주를 마셨던 열 세 번째는 마음속에 저장, 폴더 닫고, 닫은 폴더를 숨김 폴더로 설정하는 것으로 묻어버렸다.
묻을 것은 묻고 새로 쓰게 된 것은, 아니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은 틴케이스 사고 맥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한 두어달 전부터 눈에 띄던 틴케이스가 있었다.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거듭하는 동안 파는 곳이 점점 줄더들더니 아주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러다 2주 전, 파는 곳을 발견했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내내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틴케이스를 사버렸고, 맥주를 덤으로 받았다. 틴케이스를 사야 하는 이유를 열 가지쯤 만들어 내느라 고민한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덤으로 받은 맥주는 미지근했고, 소주도 아니고 ‘미지근한’ 맥주를 마실 수 없는 노릇이라 하는 수 없이 냉장고에 있던 맥주를 꺼내 마셨다.
버스에서는 금붙이라도 들어 있는 것처럼 품에 안고, 내려서는 행여 어디 부딪혀 패이기라도 할까 조심스레 걸었다. 버스 안에서 틴케이스를 끌어안고 있다가 조금 서글퍼졌는데, 쇠붙이가 아니라 금붙이를 갈망했다면 지금 품에 안고 있는 것이 틴케이스가 아니라 골드 케이스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쇠나 금이나 한자로 치면 매한가지인데 한글은 어째서 천지차이인지 궁금해졌고, 나는 어쩌다 금붙이보다 쇠붙이를 그리도 좋아하게 된 것인지도 궁금해졌다. 그러니까 버스 안에서부터 맥주가 마시고 싶었다는 얘기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창문을 열다가 손가락을 찧었다. 욕이 나올만큼 아팠는데 꽤 피가 많이 났고, 촬영 중에 다치면 쓰려고 사 두었던 바르는 상처보호제를 발랐다. 마치 틴케이스 샀더니 맥주가 따라온 것처럼 새 제품의 효능을 테스트하려고 다친 것 같아 조금 우스워졌다. 그러다 문득 쌍욕을 했으면 피가 나지 않았을지 궁금해졌다. 무심코 레고 조각을 밟았을 때 알고 있는 모든 쌍욕이 다 쏟아져 나와도 피는 안 나니까, 애매한 욕이 나올만큼만 아프면 피가 나는구나 싶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꼭 맥주를 마셔야만 했다는 얘기다.
맥주를 마시면서 <쌍갑포자>를 보면서 틴케이스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스티커와 사투를 벌였다. 진즉에 WD-40을 뿌렸으면 스티커는 진즉 다 떼어내고 맥주에 좀더 집중할 수 있었을텐데 양 엄지 끝이 아릴 때까지 미련하게 밀어내며 떼어내느라 어느 것에도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맥주 한 캔 더 마셨다는 얘기다.
맥주 한 모금에 갈증이 풀리는 것을 보니 여름이 시작됐다. 좋아하는 밤이 짧아졌고, 좋아하는 봄은 끝났다. 그래도 맥주가 있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