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세렌 베일

소설 [E.V.E.]

by 이쥬니

2200년대 초, 심각한 인구 붕괴와 재정 위기에 직면한 기존의 국가들은 세계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나라, 카이로시아. 이름 그대로 ‘결정적 순간의 땅’을 표방한 카이로시아의 슬로건은 단순했다.


“증명된 존재에, 더 많은 혜택을.”


열심히 일한 만큼 벌고, 형평성 있게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사회. 반대로, 사회에 해를 끼치는 자에게는 세금 한 푼도 허비하지 않는 국가. 이러한 운영 방침은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꿈꾸어 온 이상에 가까웠고, 카이로시아의 이민 신청소 앞은 늘 긴 줄로 붐볐다.


정부는 그 열망에 응답하듯, 국가 재정을 투명하고 객관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모든 세금 운용을 인공지능 ‘E.V.E.’에 일임한다고 발표했다. ‘Evaluation for Verified Existence’, 즉 ‘존재 증명을 위한 평가 시스템’. 이브라 불리는 이 시스템은 개인의 모든 기록을 토대로 그들의 사회적 가치를 수치화하고, 그 점수에 따라 복지 혜택을 차등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완벽한 기록을 위해 카이로시아의 모든 국민은 목 뒤에 ‘E-링크’라 불리는 장치를 의무적으로 이식해야 했다.


물론 처음에는 피 같은 세금을 한낱 인공지능이 관리한다는 사실에 격렬한 반발이 일었다. 그러나 이브는 도입과 동시에 노동 의지가 없는 무직자와 범죄자를 가려내고, 그동안 소외되었던 ‘성실한’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돌려주었다. 국민들은 환호했고, 반대 시위는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브의 기록과 분석은 더욱 정교해졌으며, 작은 국가로 출발한 카이로시아는 경제뿐 아니라 치안과 환경 면에서도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그러나 정작 카이로시아의 국민들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성과를 전혀 쌓지 못하는 사람들과, 하루도 빠짐없이 일하는 이들의 복지 혜택은 더욱 극명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결국 이브 도입 10년 만에, 반대 시위를 벌이던 국민들은 오히려 이브 강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로 바뀌었다. 시위가 거세지자 정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브 시스템의 확장을 본격화했다.


개인 성과 점수인 P-스코어에는 경제 기여도를 포함한 환경 보호, 사회 공헌, 국제 명성 등 세분화된 기준이 추가되었고, 치안 위협이나 사회 불안 조성과 같은 행위에 불이익을 주는 리스크 점수는 더욱 엄격해졌다. 여기에 지역 단위의 성과를 평가해 차등을 두는 D-스코어 제도까지 도입되었다.


이제 단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주민등록증을 받던 시대는 완전히 사라졌다. 카이로시아의 국민들은 아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성적, 매출, 명성, 사회공헌—모든 지표를 위해 밤낮없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철저히 수치화된 세상에서 '노력'은 당연히도 기록되지 않았기에, 결과가 없는 이들은 사회에서 빠르게 지워졌다.


지워진 사람들은 대부분 취약계층이었다. 장애인, 정신질환자, 고령자 등 지속적으로 성과를 쌓을 수 없는 이들은 모두 ‘무기록자’로 전락했다. 과거에 명성을 누렸던 인물들조차 예외가 없었다. 무기록자들은 모든 복지 혜택에서 철저히 배제된 채, 공식 구역에서 밀려나 도시의 경계와 경계를 잇는 비공식 구역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사람들은 무기록자들이 모여 사는 그곳을 사회에 불필요한 먼지 더미에 비유하며 ‘더스트’라 불렀다. 카이로시아가 세계적 강대국으로 우뚝 섰을지라도, 더스트만큼은 빈민국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이를 두고 ‘비인도적’이라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시민들은 체제가 보장하는 안정성과 혜택에 만족하며, 이브를 절대선으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취약한 처지임에도 재택 형태의 경제 활동이나 환경 보호 활동으로 기록을 쌓아 살아가는 사례들이 있었기에, 무기록자들은 점점 게으름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어느새 이브는 단순한 기록 장치를 넘어, 존재 자체의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무기록자들이 평생 더스트에서 썩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성과를 쌓아 존재를 증명하기만 한다면, 누구든 다시 구제받을 수 있었다. 방법은 두 가지였다. 개인 성과 점수인 P-스코어를 쌓아 상급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혹은 1년 동안 해당 지역의 평균 성과 점수인 D-스코어를 올려 구역의 등급 자체를 끌어올리거나.


실제로 간혹 입원이나 사고 같은 불가피한 이유로 더스트에 온 사람들은 전자의 방법으로 다시 공식 구역에 복귀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자의 길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구역 거주민 전체의 P-스코어 평균을 끌어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방치된 비공식 구역인 데다, 도시 환경은 최악이고 노약자의 비율까지 압도적으로 높은 더스트에서는 애초에 실현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무기록자가 없는 모든 지역에서는 D-스코어의 의미가 절대적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구역의 등급은 곧 한 해 동안 제공될 복지 수준, 인프라, 공공 지원의 총량과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년 1월 1일, 지난해의 D-스코어 결과가 발표되는 날이면 더스트를 제외한 카이로시아 전역은 하나의 거대한 축제의 장으로 변했다.




[2315년 1월 1일, 카이로시아 17구역]


3, 2, 1—펑!

화려한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자, 광장 전광판의 숫자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내 커다란 글씨가 번쩍였다.


[17구역의 '벨타' 승급을 축하합니다.]


"드디어 벨타야! 우리도 이제 벨타 주민이라고!"


광장을 가득 메운 주민들이 서로를 끌어안으며 환호했다.


카이로시아의 도시 등급은 [루미아 – 벨타 – 그렌 – 애쉬번] 순으로 나뉘며, 그 격차는 단순한 행정 구분을 넘어 삶의 질 전체를 가르는 절대적 기준이었다. 도시 정비에 배정되는 자본은 물론, 의료 보험의 범위, 문화생활의 수준, 심지어 공급되는 전기의 양까지 등급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니 주민들 입장에서는, 단 한 해라도 상위 구역의 삶을 누려보는 것이 일생일대의 소원일 수밖에 없었다.


두 번의 승급 실패를 겪은 17구역 사람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환희를 터뜨렸다. 모두가 열광하는 그때, 한 여자의 등장은 장내의 분위기를 단숨에 바꾸어놓았다.


"세렌,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올해도 실패했을 거야!"
"맞아, 네 덕분에 우리가 벨타로 올라온 거야!"
"네가 없었으면 아마 평생 그렌 주민으로 살았을걸!"


순식간에 주민들이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감사를 전하려는 손길이 이어졌지만, 어둡고 긴 생머리에 차가운 인상을 가진 여자는 그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목례했다. 그리고는 곧장 광장의 구석으로 물러섰다.


‘휴… 피곤하네. 이래서 시작 시간에 맞춰 오고 싶었던 건데.’


세렌 베일.
도시 개선 사업을 총괄한 그녀는 17구역의 승급을 가능케 한 일등 공신이었다.


세렌은 도시 개선 사업을 추진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P-스코어를 끌어올렸고, 그 공로는 벨타 승급으로 이어졌다. 사회 공헌으로까지 인정받은 그녀는 막대한 성과를 쌓을 수 있었고, 이미 여러 구역에서 추가 의뢰가 밀려들고 있었다.


'P-스코어 3개월 연속 상위 1% 이내, 거기에 우리 구역이 벨타가 되었으니…'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을 마친 순간, 세렌의 입가에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번졌다.

‘다음 공석만 나면, 드디어 루미아야…!’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루미아, 다른 도시들과 달리 숫자로 표기되지 않는 카이로시아 최고의 도시. 어릴 적, 애쉬번의 낡은 집에서 바라보던 밤하늘과 저 멀리 눈부시게 빛나던 도시를 부모님은 늘 가리키며 말했다.


"우린 아마 절대 갈 수 없겠지만… 루미아는 정말 세상의 빛이야."


그 말은 어린 세렌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전기가 끊긴 암흑 속에서도, 달빛보다 밝게 빛나던 루미아는 그녀에게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구원의 상징’이었다. 그래서였다. 밤을 지새운 기획안, 밥 대신 삼킨 커피, 끝없이 반복되는 검토와 수정. 그 고된 날들이 모두 버틸 만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주하면 제일 먼저 부모님께 택배를 보내야지. 주소에 '루미아'라고 찍혀 있는 걸 보시면 얼마나 놀라실까?"


세렌의 눈가가 뜨겁게 젖어들었다. 화려하게 터지는 새해 불꽃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두 손을 모아 간절히 빌었다.

‘부디… 어서 그곳에 공석이 생기기를.’





세렌의 간절한 기도는 멀리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에 가로막혔다. 고성이 오가는 걸 보니, 새해 행사로 경비가 느슨해진 틈을 타 근처 더스트에서 무기록자가 넘어온 듯했다. 곧 소란의 중심에서 가로등 하나가 ‘툭’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은 그곳을 향해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전기 공급용 부품 하나쯤을 훔쳐간 게 분명했다.


‘그래, 오늘이 마지막이니 마음껏 훔쳐라.’

이제 벨타로 승급했으니, 새벽 해가 뜨는 순간부터는 경비가 한층 강화될 터였다. 어차피 금세 해결될 문제라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세렌은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잔을 입에 대기도 전에, 이상한 기운이 등을 스쳤다.


'이쯤 되면 소란이 가라앉아야 하는데…?'

웅성거림이 묘하게 자신을 향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세렌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순간—


“으악!”


인파가 순식간에 갈라지며, 누군가 세렌을 세차게 밀쳐냈다. 그녀는 그대로 뒤의 가로등에 부딪혔고, 손에 들린 와인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동시에 찌릿하고 목 뒤가 저려왔다. 세렌은 반사적으로 밀친 자를 눈으로 좇았다.


그는 눈에 띄는 붉은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계절에 맞지 않는 얇은 점퍼, 낡아빠진 슬리퍼 속으로 드러난 꽁꽁 언 발가락, 그리고 입가에는 반쯤 씹다 만 빵 조각이 매달려 있었다. 품에는 가로등 부품으로 보이는 쇳조각들을 움켜쥔 채, 처절하게도 사람들 사이를 헤집으며 도망치고 있었다. 세렌의 앞에 있던 한 주민이 그 남자의 뒤통수를 가리키며 고함쳤다.


"그럴 시간에 나가서 일이나 해라, 이 게으름뱅이야!"


세렌도 한마디 해주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나 그 순간, 옆에 있던 주민의 동료가 황급히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만둬, 자네 리스크 점수 오르겠어."
"겨우 이 정도로? … 그래도 이번 달은 근무 시간을 더 늘려봐야겠네."


세렌은 그제야 입술을 꼭 다물었다. 방금 쏟아내려던 욕설이 목구멍에서 씁쓸하게 가라앉았다. 목덜미는 여전히 얼얼했고, 불쾌감이 치밀었지만 리스크 점수 상승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세렌의 시선이 저 멀리로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꺼진 링크, 초라한 걸음, 남루한 차림새. 그 모든 게 더스트의 낙인을 증명하고 있었다.


‘으휴, 저 나이 먹도록 일은커녕 가로등이나 파헤쳐? 더스트에 있는 이유가 다 있군.’


잠깐의 소동이 가라앉자 광장은 다시 환희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불꽃을 올려다보며 함성을 지르고, 축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이어졌다. 그러나 세렌은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아직 처리해야 할 업무가 남아 있었기에, 그녀는 조용히 발걸음을 집으로 돌렸다.


그렇게 그날의 일은 사소한 해프닝처럼 그녀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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