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V.E.]
이후, 마치 축제가 언제 있었냐는 듯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특히 세렌에게 연초는 가장 숨가쁜 시기였다. 국가 예산과 정책이 발표되는 달이었기에, 한 달 내내 야근에 시달리며 축제의 기억조차 저편에 묻어버릴 정도였다.
"하… 드디어 마지막 주네. 이번 일만 끝나면, 휴가를 낼 수 있으려나."
피곤에 젖은 목소리가 공허한 방에 흘러나왔다. 이미 깊은 밤이었지만, 세렌은 습관처럼 커피를 한 잔 더 내렸다. 쓴내가 입안을 스치자, 흐릿했던 정신이 조금은 맑아졌다. 그녀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지난 일정들을 차분히 되짚었다.
"32구역의 교육기관들이 P-스코어 중심으로 커리큘럼을 바꿨지. 이번엔 승급, 어렵지 않겠어."
"25구역 환경 개선 운동은 결과가 미흡해… 다음 달엔 플로깅 시간을 두 배로 늘리라고 해야겠군."
"그리고… 연재 중인 글도 꾸준히 조회수가 오르고 있으니, 이번 달도 P-스코어는 문제없어. 이 정도면 상위 0.1%도 무난하겠는데?"
말은 차분했지만, 그 속엔 자신감과 기대가 묻어 있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세렌의 직업은 D-스코어 분석가였다. 안정적인 공무직이라 굶을 걱정은 없었으나, 얼마 되지 않는 연봉과 기술 발전 속도에선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정도로는 루미아에 입성할 만큼의 P-스코어를 결코 쌓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새로운 길을 택했다. 도시 개선 사업 디렉터. 세렌은 D-스코어가 부진한 구역들을 찾아가, 맞춤형 프로젝트를 기획해주기 시작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문제를 꿰뚫는 통찰력, 그리고 차갑게 현실을 직시하는 사고력 덕분에 불과 몇 해 만에 7개의 도시를 승급시켰다. 그 과정은 글로 기록되어 유료 연재까지 이어졌고, 조회수는 매달 상승 곡선을 그렸다. 새벽의 모니터 불빛 아래, 피곤에 잠긴 눈동자 너머로 미소가 번졌다. 세렌은 지금, 누구보다 빠르게 자신의 이상향에 다가가고 있었다. 세렌은 돌아오는 금요일에 정산될 P-스코어를 대강 계산해보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번 달 수치라면, 상위권은 확실했다. 그녀는 언젠가 닿게 될 루미아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며, 마치 그날을 확정짓듯 다시 책상으로 몸을 기울였다.
다음 날. 밤새 일하다 책상에 엎드려 잠들었던 세렌은,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눈을 떴다.
쿵! 쿵! 쿵!
"세렌 베일 씨! 집행관입니다!"
격정적인 노크 소리에 세렌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 집행관이라니. 가능한 이유는 몇 가지뿐이었다.
‘루미아에… 공석이 났나봐! 드디어… 내가 루미아에!’
몸은 지쳐 있었지만, 발걸음은 너무도 가벼웠다. 세렌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평소보다 두 톤은 높아진 목소리로 문 밖에 대답했다.
"네, 잠시만요! 곧 나갑니다!"
루미아의 화려한 풍경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웃으실 얼굴, 달빛보다 환하던 도시의 불빛. 그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라 믿으며 세렌은 현관 문을 열었다.
그러나.
"세렌 베일 씨, 무기록자로 분류되어 17구역 추방 명단에 올랐습니다. 일주일 후 집행 예정이니 집을 비워주시고, 이의사항이 있으면 관할 센터로 문의하세요."
집행관의 말은 칼처럼 짧고 냉혹했다. 세렌은 순간 얼어붙었다. 숨조차 멎은 듯했다. 태어난 이후 이렇게 어이없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네…? 제가 왜 무기록자예요?"
멍청할 만큼 당황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집행관은 불쾌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야 한 달 동안 이브에 어떤 기록도 올라오지 않았으니까 그렇죠. 몰라서 묻습니까?"
"그러니까!" 세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왜 아무런 기록도 안 된 거냐구요! 이건 링크 오류예요. 복구 요청을 하겠어요!"
"그럼, 돌아보시죠."
세렌이 멍하니 서 있자, 그는 거칠게 그녀의 어깨를 돌려 세웠다. 차갑게 다가오는 손길이 목덜미의 링크를 잡아챘다. 딸깍. 미세한 금속음과 함께 메모리 모듈이 뽑혀나갔다. 그 순간까지도 세렌은 꿈을 꾸는 듯 꼼짝할 수 없었다.
"자, 데이터 가져가겠습니다. 3일 후에 결과 나오니 관할 센터에 방문하세요. 뭐… 이런다고 결과가 달라진 사람은 아직 한 번도 없었지만."
"이봐요!"
세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신을 이미 무기록자로 단정하는 그의 태도에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집행관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서류를 정리하더니, 무심하게 다음 행선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세렌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유리잔이 깨진 것처럼 산산이 부서진 마음. 절망도, 분노도 아직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갑작스러워 감정조차 따라잡지 못했다. 남은 것은 황망함뿐이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싸늘해진 바닥에 앉아 있던 그녀는 마침내 이를 악물었다.
‘주저앉아 있다고 달라질 건 없어. 반드시,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해.’
그날 이후 세렌은 모든 일정을 밀어냈다. 성과 없는 하루는 존재하지 않는 하루와 같았기에, 다른 건 모두 부차적이었다. 그녀는 단 하나, 기록의 진실을 찾는 데 집착하기 시작했다.
"혹시 링크가 고장 난 적 없나요? 누락된 기록이 복구된 사례가 있다고 들었는데…"
세렌은 원래도 몸을 혹사시키는 데 익숙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사흘 동안 거의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눈 밑에 파인 그림자는 점점 짙어졌고, 손끝은 끊임없이 떨렸다. 인터넷 게시판을 수십, 수백 번 들락거리고, 댓글이 달리는 즉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하나같았다.
“일주일동안 이브에 기록이 올라가지 않으면 알림이 옵니다. 보통은 그 때 바로 복구 신청을 하죠. 링크 수리 기간에는 어느정도 정상 참작이 되니까요.”
세렌은 멍하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머릿속에서 단 하나의 질문만 맴돌았다.
‘정말… 내가 놓친 걸까?’
새해 축제 이후 숨 돌릴 틈조차 없었지만, 알림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종류였다. 목 뒤의 전기 신호가 곧장 귓속을 때려오는 통증에 가까운 진동. 그걸 못 느낀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아니야.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
세렌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침내 복구 결과가 나왔다는 연락을 받은 참이었다. 그녀는 서류를 움켜쥐듯 가방을 챙기고, 곧장 관할 센터로 향했다.
"세렌 베일입니다. 링크 복구 결과를 확인하려고 하는데요."
"네, 잠시만요."
세렌은 무심코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생각이 많거나 불안할 때마다 나오는 습관이었다.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에겐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드디어 직원이 서류를 들고 나왔다.
"세렌 베일 씨, 잠시 안쪽으로 들어오시겠습니까?"
묘하게 굳은 표정. 그 낯빛에 세렌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혹시 정말 문제가 있는 걸까? 아니, 아마 단순한 오류일 거야. 이브의 시스템도 완벽할 수는 없지. 혹은,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을 몰아쳤으니 복구에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다. 수많은 가정이 머릿속을 질주하며 그녀는 정신없이 대비책을 세웠다.
"베일 씨, 듣고 계신 거죠?"
"큼… 죄송해요. 잠시 다른 생각을 했네요. 뭐라고 하셨죠?"
애써 태연한 척 목을 가다듬고 답했지만, 다음 순간 직원의 입술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모든 희망을 무너뜨렸다.
"세렌 베일 씨, 무기록자 문제가 아니라… 수사 대상이 될 수도 있겠네요. 링크를 임의로 조작한 적 있으신가요?"
“…네?”
말이 채 굴러가지 않았다. 수사 대상.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수사 대상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지난 며칠 동안 황당하다는 감정은 지겹도록 맛보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세렌은 울분에 차서 직원의 말을 가로질렀다. 꽤 큰 소란이었지만, 야속하게도 고장난 링크는 리스크 점수조차 올려주지 않았다.
"말도 안 돼요. 제대로 설명하세요! 지금 당장!"
세렌과 달리, 직원은 여전히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기록지를 보시죠. 1월 1일 새벽, 링크에 직접 미세 전류를 흘려 해킹을 시도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링크가 손상돼, 그 이후로는 어떤 기록도 올라오지 않았어요. 그날, 어디에 계셨습니까?"
"1월 1일이라면… 집이었어요! 새해 축제에만 잠깐 나갔고, 나머진 하루 종일 기획안 작성에 매달렸다고요! 해킹 따위 할 시간도, 이유도 없었다구요!"
세렌의 언성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사흘간 먹지도, 자지도 않은 피로가 겹쳐, 이젠 예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초췌한 얼굴은 붉게 상기됐고, 마침내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그녀의 모습을 안쓰럽게 여겼는지, 직원은 한숨을 내쉬며 조금 부드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함께 있었던 사람은 없습니까? 베일 씨의 결백을 증명해 줄 사람 말입니다."
"없어요! 없다구요!" 세렌은 거의 울부짖었다. "저는 혼자 살아요. 일할 때 빼고는 나가지도 않고… 친구도 없어요!"
"그렇다면 해킹을 하지 않았다는 걸 입증할 방법이 없겠군요."
그 말에 세렌의 몸이 덜덜 떨렸다. 마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평생을 루미아를 향해 달려온 자신이, 단 한 줄의 기록에 의해 범죄자로 몰리다니.
"아니… 왜 그렇게 단정하세요?"
그녀는 절규하듯 외쳤다. "이브의 기록 오류일 수도 있잖아요!"
그 순간, 직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차가운 시선이 세렌을 꿰뚫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이브의 오류는 23세기 중반을 넘어가면서 단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건 하찮은 상상따위로 피해갈 문제가 아니에요, 베일 씨."
세렌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이브가 오류를 일으킨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숨이 턱 막힌 듯 세렌은 씩씩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내 억지로 숨을 고르며, 머릿속을 하나하나 되짚기 시작했다.
‘아니야… 무언가 잘못된 게 있을 거야. 분명 그날… 무슨 일이…’
순간, 세렌의 머릿속을 스쳐간 장면이 있었다. 빵을 물고 도망치던 남자. 붉은 머리칼, 남루한 차림,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밀치던 그 무기록자. 세렌은 이를 악물었다.
‘그놈이다. 분명히 그놈 짓이야.’
잠깐, 가로등 부품을 훔칠 만큼 기술력이 없는 무기록자가 어떻게 미세 전류 장치를 다룰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스쳤다. 그러나 세렌은 곧 고개를 저었다. 중요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필요한 건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날, 새해 행사에서 무기록자 하나와 부딪혔습니다. 그때 그 남자가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어요!"
직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어서 잇따라 쏟아지는 질문들.
"그 남자와 연고는 있습니까? 행색은 확실히 기억나나요? 전류 장치를 들고 있었다는 증거라도 있나요? 당시 상황을 입증할 방법은요?"
세렌은 숨을 고르며 하나씩 또박또박 대답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빨간 머리였던 것 같아요. 체격은 다소 좋았고요. 가로등 부품을 들고 있었으니, 그 안에 전류 장치가 있었을지도 몰라요. 저는 그 사람과 부딪혀 넘어졌고…"
목소리는 떨렸지만, 말은 논리적이었다. 세렌은 점점 자신감을 되찾았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도 이제는 출구가 보이는 듯했다. 여전히 눈가엔 눈물 자국이 선명했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직원도 그녀의 태도에 잠시 누그러진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CCTV 기록이 없다면, 최소한 3일 뒤까지 증인 세 명 이상을 데리고 오셔야 합니다. 그 남자의 신원이 확인되면 더 좋겠네요. 이브 기록 열람을 요청해보세요. 물론 링크가 오래 꺼져 있었다면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할게요! 뭐든지 할게요! 걱정 마세요!"
세렌의 목소리는 결연했다. 이제는 길이 보였다.
‘이웃집 그웬 아주머니와 그렉 아저씨… 아, 한스 씨도 근처에 있었지! 증인 확보 정도는 어렵지 않아.’
세렌의 두 눈은 다시금 불타올랐다. 꺼져가던 희망의 불꽃이, 그 순간만큼은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