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V.E.]
관할 센터에서 나온 세렌은 곧장 휴대폰을 들어 이브 어플에서 기록 열람을 신청했다. 그리고 지체 없이 월트 부부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1월 끝자락의 바람은 칼처럼 매서웠다. 달리다시피 걷는 세렌의 얼굴이 새빨갛게 얼어붙었지만, 그녀는 추위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이제 증인만 확보하면 돼. 이 황당한 상황을 끝낼 수 있어…!’
순식간에 자신의 집을 지나친 세렌은 옆집 현관 앞에 멈춰 섰다. [그웬과 그렉의 집]이라 적힌 아기자기한 문패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가슴 깊은 곳에서 설렘과 닮은 떨림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설렘’이라는 단어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았지만, 세렌은 지금 간절한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떨림을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세렌은 문 앞에서 잠시 옷매무새를 다듬고, 차가운 손바닥으로 부은 눈가를 눌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그웬 아주머니! 집에 계세요?”
최대한 밝고 힘 있는 목소리였다. 늘 그녀를 만나면 "젊은 아가씨가 이렇게 대단하다니!"라며 호들갑스럽게 칭찬하던 그웬을 떠올리며, 세렌은 곧장 따뜻한 환영을 상상했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의아함에 그녀는 문을 한 번 더 두드렸다.
“아주머니! 저 세렌이에요!”
평소라면 무겁게 발걸음을 끌며,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으로 달려 나왔을 그녀였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했다. 집 안은 불이 환히 켜져 있는데,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주무시나?’
그웬은 원래 몇 번의 짧은 낮잠을 즐기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 세렌에게는 그 느긋한 습관조차 절망처럼 다가왔다. 오늘만큼은, 그녀의 목소리와 존재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때였다. 길 건너편에서 낯익은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은발에 호리호리한 체형, 단정하게 다린 양복에 페도라까지. 한스 브라운.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지막 퍼즐 조각처럼, 그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손을 높이 흔들며 그를 불렀다.
“한스 씨!”
그러나 한스는 세렌의 부름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귀가 어두워져서 못 들은 걸까, 아니면… 세렌의 심장이 불길하게 뛰었다. 결국 그녀는 그를 붙잡기 위해 급히 길을 건넜다. 거리가 좁혀지자 세렌은 다시 소리쳤다.
“한스 씨! 잠깐만 서보세요!”
그러나 이상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커진 만큼, 오히려 한스의 발걸음은 더 빨라졌다. 세렌은 낯선 기분을 느꼈다. 마치 모두가 자신을 외면하는 듯한 섬뜩한 감각.
‘설마… 내가 무기록자로 찍혔다는 소문이 퍼진 건 아니겠지? 왜 다들…’
세렌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지 말자.’
그녀는 남은 힘을 쥐어짜 내어 달렸다. 이 의문을 풀 방법은 단 하나, 직접 붙잡고 묻는 것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렌은 결국 한스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그제야 그들의 발걸음이 멎었다. 세렌은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무릎을 짚고 호흡을 고르며, 주저앉은 한스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모자 끝에서 맺힌 땀방울이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60대 중반의 몸으로 세렌의 속도를 따라왔으니 지칠 만도 했다. 세렌은 튀어나오려는 질문을 억지로 삼키고는 그의 거친 숨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는 차분히 첫마디를 꺼냈다.
“한스 씨, 제가 아까부터 불렀는데… 못 들으셨어요?”
그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주민들과 성과 기록을 확인할 때 자주 쓰던 방식. 날카로운 시선은 상대방의 거짓을 꿰뚫어내곤 했다. 한스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세렌은 그가 일부러 못 들은 척했다는 걸 단박에 알았다. 하지만 모른 체하기로 했다. 원래도 그는 목표량을 못 채우면 슬쩍 피해 다니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지금은 캐묻는 게 우선이 아니었다. 세렌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 링크가 고장 나서 1월 기록이 전부 누락됐어요. 구제 신청을 하려면 당시를 증언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데… 내일 관할 센터에 가서 1월 1일 축제에 나타났던 무기록자 얘기를 해주실 수 있겠어요?”
그녀는 교묘히 말끝을 다듬었다. 명성에 흠이 될 내용은 빼고, 최대한 불쌍해 보이는 얼굴까지 더했다.
한스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을 보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세렌은 속이 타들어갔지만 재촉하지 않았다. 곧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소년처럼 그녀를 놀리고는 결국 선심 쓰듯 돕겠다고 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세렌은 평소 유머에 약했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장난에도 기꺼이 맞장구쳐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곧, 한스가 입을 열었다.
“어쩜 이렇게 염치가 없어?”
세렌은 순간 얼어붙었다. 눈앞의 남자가 내뱉은 뜻밖의 말에 숨이 막혔다. 이제 그의 얼굴에는 화가 어려 있었다.
‘설마 단순 구제 신청에는 증인이 필요 없나?’
심장이 귀까지 튀어나올 듯 쿵쾅거렸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사실대로 ‘자신이 해킹 용의자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세렌은 겨우 눈동자를 고정시키고,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을 짓는 데 집중했다. 그게 지금의 최선이었다. 한스의 목소리는 점점 날카로워졌다.
“세렌 씨, 링크 해킹 용의자라며. 그런 위험한 짓을 하는 사람 밑에서 우리가 디렉팅을 받았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 근데 이제는 당신을 위해 거짓 증언까지 하라고? 하, 참 어이가 없네.”
세렌의 눈이 커졌다. 뒤늦게 기억이 스쳤다. 한스의 아내, 브라운 부인이 관할 센터에서 근무한다는 사실. 며칠 전 자신이 센터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장면이 떠올랐다. 말하기 좋아하는 그녀가 남편에게 바로 전화를 걸지 않았을 리 없었다.
‘… 끝났어. 일이 완전히 꼬였어.’
세렌은 변명조차 삼켰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이 떨렸다. 결국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맞아요. 저, 링크 해킹 용의자로 몰렸어요. 하지만 그건… 그건 제가 한 일이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그날 무기록자가…”
“무기록자가 뭐!”
한스가 세렌의 말을 잘랐다. 순간적으로 노신사의 고함이 대로변에 울렸다.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그놈은 당신 앞으로 지나갔어. 밀치긴 했어도 링크엔 손도 대지 않았다고! 그런데도 끝까지 뻔뻔하게 거짓말을 해?”
세렌의 입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스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본 장면조차 왜곡하고 싶었던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세렌은 고개를 떨구었다. 한스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그 소리는 마치 세렌의 꿈, 존재,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을 무너뜨리는 망치질 같았다.
‘이제 곧 온 구역에 소문이 퍼지겠지.’
그럼에도 세렌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더스트에 내몰린 자신의 모습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아니,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멈춰버린 사고를 억지로 굴렸다. 그 순간, 떠오른 건 아직 찾아가지 않았던 그렉의 얼굴이었다.
‘월트 부부 귀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먼저 증언을 받아낸다면?’
가능성은 있었다. 한스는 부인에게서 전해 들은 것뿐이었고, 아까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걸로 보아 낮잠을 자고 있는 그웬이나, 사무실에 있을 그렉은 만나지 못했을 터였다. 소문이 번지기 전에 증언을 확보한다면 충분히 뒤집을 수 있었다. 증인이 셋이어야 한다는 조건도, 혼란스러웠던 축제를 떠올리면 담당 직원만 어떻게든 설득하면 될 일이라 여겨졌다.
세렌은 더 이상 한스와 시간을 끌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고, 몰려든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곧, 수많은 눈동자가 동시에 자신을 조준하듯 따라붙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동물원의 우리 안에 갇힌 원숭이. 지금의 세렌이 딱 그랬다. 그 시선들에 잠시 멈칫했지만, 곧 이를 악물고 몸을 밀어냈다. 겨우 무리에서 빠져나온 순간, 그녀는 이상한 이질감을 느꼈다. 불과 몇 분 전과는 달라진 풍경. 어딘가 어긋난 정적이 골목에 드리워져 있었다.
‘… 불이 꺼졌어. 그웬 아주머니네 집 불이.’
섬뜩한 미시감은 곧 불안으로 바뀌었다. 세렌은 온몸이 떨리며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얼굴이 낯선 눈빛을 띠고 군중 사이에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웬이었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세렌은 그 통화 내용이 무엇인지 듣지 못했다. 하지만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모르는 편이 더 나았다.
세렌의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도망쳐야 한다. 사실 그녀는 처음 불이 켜진 집을 확인했을 때부터 이런 결말을 예감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상상이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 그 고통은 상상보다 훨씬 더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새로운 계획으로 가득 차 있던 머릿속은, 이제 단 하나의 생각으로만 뒤덮였다.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집으로 도망쳐 문을 걸어 잠근 세렌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바탕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속은 전혀 시원해지지 않았다. 분노와 수치, 절망이 엉켜 가슴을 옥죄었다. 그녀는 그대로 꼬박 이틀을 침대에서 버텼다. 울다가 지쳐 잠드는 것만 반복하다, 이제는 눈물이 말라 더 이상 나오지도 않았다. 잠도 오지 않자 세렌은 입술을 깨물며 헛웃음을 흘렸다.
‘몇 년 동안 꿈만 꿔왔던 휴가를 이런 식으로 받게 될 줄이야.’
바닥에 나뒹구는 휴대폰을 더듬어 잡아 들었다. 새벽 4시. 잠금화면 속 눈부시게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언제 저렇게 환하게 웃었더라. 하지만 알림 창은 텅 비어 있었다. 월말마다 무수히 쌓이던 인사치레조차 사라졌다. 이제 세렌 베일에게 감사를 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 하나의 메시지를 제외하면.
[이브 기록실에 접속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렌 베일님께서 예약하신 기록 열람일이 내일로 다가왔습니다.]
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증인도 구하지 못했고, 그 남자에 대한 기억조차 희미해졌다. 무엇보다 그녀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 남자가 목 뒤의 링크에 손을 대지도 않았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를 의심했다는 사실이 치명적으로 부끄러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부끄러움이 그녀를 기록실로 끌어당겼다. 그 남자가 범인이라야, 자신이 구제받을 수 있으니까.
“… 가보자.”
기록실의 문을 열자, 먼지 섞인 냉기가 뺨을 스쳤다. 벽을 가득 메운 모니터마다 끝없이 흘러가는 기록들. 세렌은 눈동자를 쉼 없이 움직이며 불꽃같은 머리카락을 찾았다.
“큰 키, 까무잡잡한 피부, 붉은 머리…”
“아냐, 이 사람은 키가 작아.”
“이 사람은 머리색이 탁해. 그날 본 건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던 붉은빛이었어.”
중얼거림이 메아리처럼 번졌다. 그러다, 세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면 속, 천진난만하게 웃는 남자. 그날보다 앳된 얼굴이었지만, 분명 그 붉은 머리였다.
“이 남자야.”
확신은 근거보다 빨랐다. 세렌은 곧장 키보드를 두드렸다. 화면에 뜬 이름. 리오 아셀. 23세. 그녀와 같은 나이. 숨이 멎을 듯한 순간, 기쁨과 절망이 동시에 밀려왔다.
[장기 무기록자. 3일 후 데이터 삭제 예정]
정체를 알아냈지만 이름과 나이 외에는 아무런 기록도 없었다. 무력감이 가슴을 덮쳤지만, 오히려 감정이 정리되는 듯했다. 광풍처럼 몰아치던 일주일이, 무언가 정돈된 잿더미처럼 가라앉았다. 곧 문이 열리고, 붉은 문양의 완장을 찬 직원이 말했다.
“세렌 베일 씨, 시간 종료되었습니다. 나가시죠.”
아침 해가 낮게 비추는 거리로 걸어 나온 세렌은 벤치에 앉았다. 센터 직원과의 기한 3일은 이미 지나 있었다. 가든 가지 않든 무기록자가 되는 건 같았다. 굳이 제 발로 그곳에 가서 브라운 부인의 눈총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세렌은 계산했고, 결론 내렸다.
'센터로 돌아가도 달라지는 건 없어.'
그녀는 벤치에 앉아 한참을 쉬었다. 울지 않았고, 화내지 않았다. 대신 멀리서 하나둘씩 꺼지는 가로등을 오래 보았다. 꺼짐은 조용하고, 조용함은 잔인했다. 집, 일, 루미아로의 꿈이 가로등 불빛처럼 차례차례 사라졌다.
해가 서서히 지평선 너머로 저물 무렵, 그녀는 평소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늘 그렇듯 조용히 커피를 내리고, 하루의 스케줄을 정리했다. 선고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녀의 루틴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몇 년간 반복되어 온 일상이 마지막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녀는 몇 편의 기획안과 보고서를 반복해 검토했다. 어느덧 시계는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루의 끝이자 그녀의 일상에 종지부를 찍는 알림이 귓가를 울렸다.
[세렌 베일, 한 달간 기록 없음. 오늘부로 17구역에서 추방되었음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