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환영 파티

소설 [E.V.E.]

by 이쥬니

세렌은 리오의 뒤를 따라 좁은 골목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길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생활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허름한 집 옆에는 얼어붙은 밭이 있었고, 누군가는 물동이를 이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어제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풍경이 하나하나 드러났다. 하지만 정말 리오의 말대로, 어디에도 시장이나 상점은 보이지 않았다.


“더스트니까 큰 회사는 없다 쳐도… 장사도 안 하고, 가게도 없어?”


세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자, 리오는 양손을 뒤통수에 걸고 느긋하게 대답했다.

“장사? 필요 없어. 자영업자들은 매출로 기록되는 거 알지? 성과가 나버리면 더스트에 있을 수가 없거든.”


세렌의 입에서 피식 소리가 흘렀다. 일부러 장사를 안 한다고? 더스트에 남으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곧 ‘굳이 왜 여기 있어야 하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골목 곳곳에 보이는 사람들의 행색이 눈에 들어와 입술이 다물어졌다.


추운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얇은 옷차림. 금세 무너질 듯 낡은 건물들. 그리고 아침에 억지로 삼켜낸, 건더기라곤 없는 묽은 수프. 그래, 장사를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겠지. 리오의 말을 믿는 대신, 세렌은 속으로 비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 더스트에 남고 싶을 리가 없었다. 장사를 한다 해도 손님이 없으니 결국 이곳에 묶여 있는 거라고, 그녀는 마음속으로 단정 지었다. 비웃음이 섞인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하긴, 여기서 장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위인이면 애초에 더스트에 오지도 않았겠지. 그럼 너희는 어떻게 생활해? 돈이 있어도 쓸 곳이 없는데, 물품들은 어디서 사는 거야?”


세렌의 질문에 리오는 골목 저편을 가리켰다. 아이들에게 따뜻한 빵을 나눠주는 여인. 한겨울에도 이마에 땀을 흘리며 눈을 치우는 건장한 남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손끝으로 실을 더듬으며 바느질하는 노인.


“브리즈 아줌마는 빵을 굽고, 에드는 농사꾼인데 겨울이면 마을 정비를 해. 비키 할머니는 옷을 만드시지. 네가 입고 있는 것도 할머니 손에서 나온 거야. 눈이 잘 안 보이셔서 오래 걸리지만….”


리오는 잠시 말을 멈췄다. 뿌듯하게 소개하다가, 세렌의 이해 못 한 표정이 눈에 들어오자 괜히 머쓱해진 듯했다.


“아무튼, 각자 자기 몫의 일을 하고 서로 나누면서 살아. 돈이 없어도, 부족하진 않아.”

“그럼 너는?” 세렌이 물었다.

“난 몸 불편한 사람들 돌보는 일, 그리고 마을 안에서는 해결이 안 되는 일들을 맡아. 이곳은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다른 마을로 직접 나가서 식량이나 필요한 물품을 받아오기도 하고….”


세렌은 여전히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만들 수 없는 건 어떻게 하지? 약품은? 기계는? 게다가 이들이 하는 일이 결코 쉬운 것들이 아닌데, 왜 성과로 기록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지 않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약이나, 공장에서만 나오는 물건들은 어떻게 해?”


짧은 정적이 흘렀다. 리오의 표정이 스르르 어두워졌다. 조금 전까지 사람들을 소개하던 밝은 눈빛과는 전혀 달랐다. 입술이 몇 번 열렸다가 닫히고, 겨우 떨어진 대답은 낮고 무겁게 깔려 있었다.


“… 정부에서 최소한의 생활비를 줘. 그걸로 애쉬번에 가서 생필품을 사고….”

리오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끝내 고개를 돌린 채 짧게 내뱉었다.


“비싼 건… 훔쳐와야 해.”


세렌은 고개를 저었다.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아니, 가로등 부품을 훔치는 장면을 이미 목격했으니 ‘알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아마 리오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걸 보니, 그날 17구역에서 세렌과 부딪혔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묘한 감정이 가슴에 맴돌았다. 한스 브라운에게 일침을 들었던 그날처럼, 정말로 리오가 범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세렌은 불현듯 솟아오른 믿음을 억누르려는 듯,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차갑게 말을 던졌다.


“결국 완전히 잘 굴러가진 않는다는 거네. 그럴 줄 알았어.”


리오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어딘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내 감정을 감춘 듯, 빠르게 웃음을 지으며 말을 돌렸다.


“자, 이제 마을 구경은 이 정도면 됐다. 어때, 생각보다 살 만하지? 처음엔 좀 불편하겠지만, 적어도 여기선 강등될 걱정은 안 하고 살 수 있어.”


세렌은 굳이 맞받아치지 않았다. 정말 이렇게 사는 게 좋은 걸까? 반문하는 것조차 지쳐, 그냥 고개를 돌려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골목 저편에서 맑고 힘찬 목소리가 울려왔다.


“오빠!”


리오와 똑같은 붉은 머리를 가진 소녀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아이는 목발을 짚고 한쪽 다리를 절뚝였지만, 기운만큼은 넘쳤다. 개구쟁이 같은 웃음이 얼굴 가득 번져 있었다. 누가 봐도 남매였다. 세렌은 신기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런 저출산 시대에 남매라니.


카이로시아에서는 철저히 ‘개인 성과’가 중시되었기에 아이를 낳는 일을 기피했다. 여성의 휴직은 곧 성과 손실로 이어지고, 아무리 정부가 기록 손실을 감면해도 갓난아이는 부모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결국 지역의 D-스코어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종족 번식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하나까지는 어떻게 낳는다고 하더라도, 카이로시아의 시민들은 자신의 생활과 구역 사람들의 눈치에 못 이겨 거의 둘째는 갖지 않는 추세였다.


세렌 역시 도시 개선 사업을 맡을 때, 신혼부부들에게 최소 1년은 아이를 갖지 말라고 권장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리오의 여동생을 보는 순간 자연스레 그의 가정사와 마을 점수를 추리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는 머쓱한 웃음을 흘렸다.


“얘는 내 동생, 루미야.”


리오의 소개에 세렌은 생각을 단칼에 끊어냈다. 루미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오빠 곁에 매달리며 재잘거렸다. 리오가 루미의 이야기를 한참 들어주더니 세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세렌, 널 위한 환영 파티가 다 준비됐대! 어제 주민들에게 새 사람이 왔다고 하니까 다들 엄청 신나셨어. 이렇게 건강한 젊은이는 오랜만이라면서!”

“… 처음 들어보는 미묘한 칭찬이네.”


세렌은 쓴웃음을 지었다. 리오는 소리 내 웃으며 받아쳤다.


“하하, 뭐, 공식 구역에 있었다면 네가 그리 건강한 타입은 아니었을 테니까. 어쨌든 가자. 마을 사람들 소개해줄게.”




둘은 ‘마을회관’이라 불리는 비교적 큰 건물로 들어섰다. 안은 이미 북적였다. 처음엔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만 눈에 들어왔지만, 이렇게 모여 있으니 전혀 달랐다. 다리를 절뚝이는 루미는 오히려 양호한 편이었다. 아예 거동이 불가능한 사람, 한쪽 눈이 실명된 사람, 얼굴 가득 화상 자국이 남은 사람, 노인과 아이들….


세렌은 숨이 턱 막혔다. 이곳이 왜 무기록자들의 밀집 지역인지 잠시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다가왔다.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자기소개를 하고, 회관 안을 돌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러나 가까이서 본모습은 더 충격적이었다. 공식 구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중증 장애인들, 틱장애인의 갑작스러운 발작 소리, 그리고 옆에서 나무 바닥을 짚으며 울리는 루미의 목발 소리까지 모든 게 거슬리며 신경을 긁었다.


세렌은 견디지 못해 근처 술잔을 덥석 집어 들었다. 와인도, 맥주도 아닌, 정체 모를 독한 술. 목을 태우듯 넘어가자 금세 머리가 핑 돌고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마도 직접 담근 술이겠지. 돈을 주고 사 온 건 아닐 테니까.


귀를 짓누르던 소음은 이내 웅성거림으로 변했고, 혐오로 일그러지던 시선은 서서히 흐려졌다. 세렌은 알딸딸한 기분에 몸을 맡기며, 의도치 않게 파티의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작은 불빛 아래 모여 술잔을 부딪히는 사람들, 아이들의 춤사위…. 낯설었지만 묘하게 따뜻했다.


“그래서, 세렌은 리오랑 동갑이지? 가족은?”

“원래 무슨 일 했어?”

“애인은 있니?”

“우리 리오도 아직 짝이 없는데, 둘이 잘 되는 거 아냐? 호호”


질문이 폭풍처럼 쏟아졌다. 세렌은 자기 앞으로 건네지는 술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 마셨다. 잠시 머물 곳에서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은 걸 밝히고 싶진 않았지만, 술기운에선 거짓말조차 힘들었다. 그대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무도 “어쩌다 이곳에 왔느냐”라고 묻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 질문이 나왔다면 세렌의 손가락은 주저 없이 저 붉은 머리를 가리켰을 것이다. 그러면 이 술잔이 최후의 만찬이 되겠지만.


“어휴, 얘 귀청 떨어지겠네. 이제 그만 묻고 술이나 마셔요.”


멀리서 아이들과 놀던 리오가 자연스럽게 테이블로 돌아와 분위기를 정리했다. 질문 공세에 지쳐가던 세렌은 몰래 리오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리오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들뜬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고,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게 평화롭진 않았지만, 세렌은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비록 몸은 피곤하고 낯선 곳이었지만 여기서만큼은 경쟁도, 성과도, 승급도 존재하지 않았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는 사실, 그리고 이들 중에선 자신이 가장 낫다는 묘한 우월감이, 세렌을 한결 느슨하게 만들었다. 각자의 사연은 굳이 묻지 않아도 눈에 보였고, 그녀는 더 캐묻지 않았다. 술기운과 우월감이 겹쳐지니, 마치 새해 첫날의 축제처럼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분위기는 잠시 진지해졌다. 누군가는 가족 걱정을 털어놓았고, 또 다른 이는 자신들을 돕던 그렌 주민이 애쉬번으로 추방당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세렌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에 슬쩍 하품을 했다. 그리고 곧 분위기는 다시 농담으로 바뀌었다.


“자, 슬슬 집에 가야지.”

“그러게, 벌써 11시네. 내일도 아침 일찍 눈 치워야 비키 할머니 안 넘어지시지.”
“어유, 시간이 그렇게 됐어? 가로등이 환해서 깜빡했네.”

“리오가 그렌에서 축전지 가져왔잖아. 성능이 아주 좋아.”


그 순간, 세렌의 눈이 번쩍 뜨였다. 술기운에 흐릿했던 기억 속에서, 그날의 장면이 트라우마처럼 떠올랐다. 꺼지는 가로등, 붉은 머리, 목덜미를 스친 찌릿한 감각….


“그 구역, 벨타 됐더라. 우리도 벨타 가로등 쓰니, 적어도 밤에는 다를 게 없나? 하하.”


누군가의 농담 섞인 한마디가 세렌의 신경을 정통으로 건드렸다. 피가 역류하듯 화가 치밀었다. 누구 때문에 내가 이곳에 온 건데? 남의 성과로 얻어낸 벨타의 이름을 술자리 농담에 올리다니. 그것도 훔쳐온 가로등 부품으로! 결국, 술기운에 실린 말이 튀어나왔다.


“벨타에 가본 적이나 있어요? 내가 벨타에서 살다 와서 아는데, 그곳 사람들은 가로등 부품 따위 훔치지 않아요. 뼈 빠지게 일해서 성과를 쌓는다구요.”


정적이 흘렀다. 싸늘해진 공기가 세렌의 피부에 와닿았다. 그러나 그녀는 취기에 자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더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분, 제가 괜히 이런 말 하는 게 아니에요. 저 도시 개선 사업의 여왕이라니까요? 이렇게 매일같이 빵 구워 나누고, 옷 만들어 나누는 것보다 노상이라도 펴고 장사를 해야 해요. 돈이 유통돼야 성과가…”

“그만해.”


리오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그의 손이 세렌의 팔을 움켜쥐었다. 주민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단지 취기가 잔뜩 오른 세렌의 목소리가 회관 밖으로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왜? 사실이잖아!”


세렌은 리오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입에서는 주체할 수 없이 ‘돈, 기록, 성과’가 흘러나왔다. 카이로시아의 성공 열쇠를 읊조리듯 내뱉는 동안, 리오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녀를 회관 밖으로 이끌었다. 얼굴은 화가 난 듯 보였지만 그 눈빛 속에는 분명히, 슬픔이 스며 있었다. 집 앞 골목에 세렌을 세워둔 채, 리오는 눈을 감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내가 널 데려왔다고 해도, 마을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넌 여기서 살 수 없어.”


찬바람이 식혀놓은 이성이 다시 흔들렸다. 세렌은 분노가 치밀었다.

‘그들이 뭔데 나를 인정하고 말고 해? 나라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한 주제에, 나에게 화풀이를 하는 건가? 게다가 나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어. 오히려 이 말이, 어쩌면 그들을 구원할 수도 있는데!’

머릿속에 수많은 반박이 스쳐갔지만, 술에 취한 입술은 그 모든 생각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뭐, 나가라는 거야?”


리오는 눈살을 찌푸리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럼 뭐야? 지금 굴러온 돌이 박힌 돌들 앞에서 주제도 모르고 입바른 소리 했다는 거잖아. 기껏 인심 써서 파티도 열어줬는데 죄송해서 어쩌나! 무릎 꿇고 사죄라도 해줘?”

“그런 말이 아니잖아.”


세렌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치받았고, 리오의 한숨은 점점 깊어졌다. 그는 답답하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눈앞의 작은 여자는 자신이 던지는 모든 말을 비꼬아 듣고 있었다. 대화가 더 이어져도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리오는 결국 손을 내렸다.


“들어가. 오늘은 그냥… 들어가서 쉬어.”


세렌은 더 이상 말할 힘조차 없다는 듯 집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문을 쾅 닫아버렸다. 삐걱거리는 발소리와 화난 걸음걸이가 집 밖에서도 고스란히 새어 나왔다. 리오는 그제야 깊은숨을 내쉬었다. 몸이 아닌 마음이 지쳐 있었다. 천천히 회관으로 돌아가자, 여전히 술잔이 오가는 북적임 속에서 작은 긴장감이 흘렀다.


“리오, 그 여자가 뭐래?”

“죽어도 사과는 안 하지? 하는 말 들어보니까 완전히 이브의 개던데.”

“저런 애한테 집부터 내어줬다고? 네가 너무 순진한 거야.”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가 파도처럼 덮쳐왔다. ‘쫓아내야 한다’는 의견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사실 파티는 환영식인 동시에 시험이었다. 새로 온 이를 받아들일지, 아니면 온 힘을 다해서라도 쫓아내야 할지 가늠하는 자리. 보통은 범죄자, 마약 중독자 등 마을 사람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경우에 후자의 방법을 썼지만, 간혹 이브에 완전히 잠식된 사상으로 주민들의 마음에 심한 상처를 내는 이들 또한 해당사항이었다.


그러니 세렌의 태도는 그 시험에서 치명적인 탈락일 수밖에 없었다. 리오는 술잔을 움켜쥔 채 애써 말을 골랐지만, 결국 한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녀가 오만하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브의 잣대로 자신들을 평가하는 것이 미운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작은 체구로 씩씩거리는 모습이 어쩐지 안쓰러웠다. 처음 더스트에 발을 디뎠던 자신의 모습, 그리고 아프지 않았다면 세렌처럼 당당한 어른이 되었을 루미의 미래… 그 모든 게 겹쳐 보였다.


시간이 흐르고, 마을 사람들은 “리오를 보서 한 달만 기회를 줘 보자”는 말만 남긴 채 하나둘 흩어졌다. 홀로 남은 회관에서, 리오는 술잔을 기울이며 혼란스러운 밤을 삼켰다. 그날 밤, 리오의 술잔 속에 비친 건 자신의 붉은 머리도, 더스트의 어두운 불빛도 아닌 세렌의 얼굴이었다. 리오는 그 얼굴을 애써 지워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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