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수상한 남자

소설 [E.V.E.]

by 이쥬니

다음 날 아침. 문 두드리는 소리에 세렌은 빙빙 도는 머리를 부여잡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마신 술이 속을 뒤집어놓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문을 열자, 문 앞에는 루미가 서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를 두 손으로 들고서.


“아침 드세요!”


해맑은 미소. 리오와 꼭 닮은 얼굴. 세렌은 본능적으로 전날의 일을 떠올렸다. 아, 이걸 건네고는… 이제 나가라는 말을 하려는 건가. 차라리 리오가 왔다면 따져 묻기라도 했을 텐데, 이 아이의 입에서 퇴거 명령이 나온다면 그 순간만큼은 저항할 힘조차 없을 것 같았다. 망연히 서 있는 세렌에게 루미가 물건을 억지로 쥐여주었다. 세렌은 절망감에 휩싸여, 애원처럼 말을 내뱉었다.


“돈 줄게. 식사랑 옷… 필요하면 집세까지 줄 테니까… 여기서 지낼 수 있게만 해줘.”


루미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천진하게 대답했다.


“음? 돈 없어도 돼요!”


세렌은 순간 멍해졌다. 어제 리오가 말한 ‘자영업도 기록된다’는 말이 스쳐 갔다.
그렇다면 집세나 생활비를 받는 것도 같은 이치였던 건가. 아니 그보다, 돈을 준다는 것까지 거절하면서 왜 굳이 이곳에 살아야 하지? 세렌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물었다.


“… 주는 돈을 안 받으면서까지 더스트에 살아야 해?”


루미는 빙긋 웃더니 절뚝이는 다리를 살며시 붙잡았다. 그 웃음 속에 비친 슬픔을 본 순간, 세렌은 질문을 후회했다. 아… 이런 사연에는 약한데.


“제가 기록하기 어려운 건… 말 안 해도 아시겠죠? 보시다시피 걸음도 느리고, 어릴 땐 폐병도 앓았어요. 그래서 공기가 탁한 공식 구역에서는 살기 힘들었어요. 오빠는… 그런 저랑 같이 살기 위해 일부러 무기록자가 된 거예요.”


세렌은 말문이 막혔다. 스스로 무기록자가 된다니…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루미의 눈망울이 어느새 촉촉해졌다. 애써 웃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지울 수 없는 서글픔이 묻어났다.


“이곳에는 아픈 사람도 많지만요, 오빠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 스스로 무기록자가 된 분들도 많아요. 우린 그들을 ‘비기록자’라고 불러요. 애쉬번에서 우리 도와주시는 분들도, 이곳에 가족이 있거나… 함께 살던 가족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승급하신 경우가 많고요.”


세렌의 입에서 거의 속삭임처럼 말이 흘러나왔다.


“… 돈이 필요 없는 게 아니라, 있으면 안 되는 거였구나.”


루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맞아요. 한 사람이라도 돈을 버는 순간, 헤어져야 하니까요.”


이제 루미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세렌은 그 작은 어깨를 안아 위로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설령 내가 도와 이 남매를 애쉬번에 보낸다 해도… 그곳에서 P-스코어를 유지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겠지. 그 사실이 더 뼈아팠다.


‘에휴, 제 코가 석자인데…’


낯선 속담이 머릿속에서 무겁게 울렸다. 우선 자신이 살아남을 방법부터 찾아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이들을 도울 수 있을 테니까. 세렌은 스스로도 낯선, 묘한 의지가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들어서 알겠지만… 내 링크는 고장 나서 돈을 벌어도 기록되지 않아. 그래서 당분간은 여기서 살아야 할 것 같아. 그럼… 난 뭘 해야 이걸 갚을 수 있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루미가 얼굴을 번쩍 들었다. 순간 전의 슬픔은 어디로 갔는지, 환한 미소가 얼굴 가득 피어났다.


“일을 하면 되죠! 마침 얼마 전에 다른 더스트로 옮겨가신 분들이 계셔서, 일손이 딱 필요했거든요!”


세렌은 답지 않게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요리도 제대로 못 하고, 옷을 지을 줄도 모르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고민을 끝내기도 전에 루미가 세렌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세렌은 그 작은 아이에게 이끌려 햇살이 쨍쨍한 거리로 나왔다. 어제 늦게까지 술자리가 계속되었음에도 이미 마을은 활기가 가득했다.


‘더스트 사람들은 다 게으름뱅이라더니.’


세렌은 속으로 세간의 말을 부정했다. 그렇게 루미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발걸음을 옮기던 길 끝에는 리오가 기다리고 있었다. 짧지만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세렌은 고개를 숙였다. 어제 술자리에서 쏟아낸 말들이 여전히 등을 짓눌렀다. ‘무기록자’가 아닌 ‘비기록자’인 리오. 그는 더 이상 한심해 보이지 않았다. 세렌은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입을 열었다.


“루미에게 얘기 들었어. 어제는 미안. 내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을 얹었어.”


리오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오히려 고개를 저었다.


“아냐. 처음부터 제대로 설명 안 한 내 잘못도 있어. … 그보다, 일하러 온 거지? 여기부턴 나랑 가면 돼.”


그는 루미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등을 돌려 앞장섰다. 며칠 새 익숙해진 붉은 머리칼이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왜인지 든든해 보였다. 세렌은 그 뒷모습을 따라 마을 가장 끝에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리오의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됐다. 장애인과 환자, 노인들을 돌보는 일. 세렌은 머리를 빗겨주거나 식사를 챙기는 비교적 쉬운 일을 맡았지만, 조금만 해도 금세 지쳐버렸다. 게다가 그들은 주에 한 번, 이틀 정도는 다른 더스트까지 다녀와야 했다. 그곳의 노약자들을 돌보고, 생필품을 구하거나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전해오기 위해서였다.




“와, 내일이면 벌써 5월이네.”


일을 시작하고, 벌써 세 달이 흘렀다. 그동안 세렌은 리오와 함께 13군데가 넘는 다른 더스트를 돌아다녔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녀는 이 ‘잊힌 도시’의 또 다른 얼굴을 하나씩 배워나갔다.


첫 번째 깨달음은 자신이 사는 제3 더스트가 의외로 ‘좋은 편’이라는 사실이었다. 다른 지역은 사정이 조금만 나아도 지도층이나 소위 말하는 조폭이 군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곳에선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일이 잦았다. 반대로 더 작은 지역은 대부분이 노약자라 관리가 엉망이었고, 돌봄 조차 없어 악취가 진동하기도 했다. 처음엔 도저히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세렌은 자신이 더 빨리 바뀌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두 번째 깨달음. 더스트 사람들은 공식 구역의 사람들보다 더 부지런했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날이면 해가 뜨기도 전에 모두 준비를 마쳤다. 밤새워 일하는 게 익숙했던 세렌도, 이곳에서 살다 보니 어느새 강제로 아침형 인간이 되어 있었다.


“후… 몇 번을 가도 이 시간은 적응이 안 되네.”

“몇십 번쯤 가면 괜찮아질걸? 조금 더 분발해야지, 세렌 베일 씨.”

“무어 아저씨! 리오 좀 혼내주세요!”


여느 때처럼 마을 입구에서 리오와 티격태격하던 세렌은, 문득 햇살을 올려다보았다. 5월의 해는 길어져서 평소보다도 더 환하게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하하, 또 싸우는구나? 너희 그러다 진짜 정든다.”


이제는 마을 사람들도 세렌을 반겼다. 처음엔 그녀를 내쫓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이들도, 특유의 꼼꼼함과 성실함에 차츰 마음을 열었다. 세렌은 여전히 서글서글하진 못했지만, 오히려 그 똑 부러지는 모습 덕에 어르신들에게 자주 불려 다녔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리오와 엮이는 건 덤이었다.


“또 그 얘기! 얘는 제 취향 아니거든요!”

“어어, 나도 마찬가지거든?”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몇 시간을 걸은 끝에, 그들은 제68 더스트에 도착했다. 건물이 거의 없어 노숙자가 많은 지역이었다. 도착하자마자 텐트를 치고 본부를 마련한 뒤, 각자 맡은 일을 시작했다. 세렌은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자, 이발할 분들은 이쪽으로 오세요!”


노숙자들이 하나둘 줄을 서자, 세렌은 익숙한 손길로 머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예쁘지는 않아도 깔끔하게 손질할 수 있게 된 건, 지난 석 달간의 성과였다. 리오가 수돗가에서 머리를 감겨주면, 세렌은 그 뒤를 이어 정성껏 이발을 했다.


“다 됐습니다. 다음 분이요!”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다가왔다. 덥수룩한 머리는 감지도 않은 듯 지저분했다.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세렌은 속으로 기겁하며 리오에게 눈빛을 보냈겠지만, 지금은 담력이 붙어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저씨, 머리 안 감으셨으면 저쪽부터 가셔야 해요.”


그러나 남자는 의자에 앉지 않고, 세렌을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했다. 세렌은 혹시 귀가 들리지 않는가 싶어 온몸을 써가며 손짓을 했지만, 남자는 미동도 없었다. 입이 오물거리는 걸 보고 가까이 귀를 기울이자, 바람에 실린 듯한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은데.”
“네? 뭐라고 하셨어요?”

“자네… 이곳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아, 네. 저는 제3 더스트에서 왔어요. 이곳 사람이 아니에요.”


세렌은 답답해져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남자는 개미 같은 목소리로 다시 중얼거렸다.


“… 당신… 링크… 고장…”


언뜻 들리는 단어가 세렌의 가슴을 후벼 팠다. 손끝이 순간 굳어버렸다. 이 단어를… 또 듣게 되다니. 그녀는 다른 생각이 파고들기 전에 황급히 다음 사람을 불렀다. 곧 다른 이가 자리에 앉자,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세렌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을 애써 삼켰다. 오랜만에 들은 단어가 마음속 깊은 상처를 긁어냈지만, 이어지는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니 결국 다시 잊히는 듯했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모두가 잠든 밤. 세렌의 눈만 말똥거렸다. 낮에 들었던 그 남자의 말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링크 고장. 일에 몰두하며 잠시 잊었던 현실이 다시 세렌을 짓눌렀다. 사실 애초에 이런 여정에 동참한 이유도, 무너진 자신의 링크를 고칠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처음엔 여정을 핑계로 애쉬번의 공식 수리점들을 몇 군데 들렀지만, 돌아온 대답은 모두 같았다. “고쳐줄 수 없다.” 해킹 흔적이 남은 링크는 중범죄 증거와 같았기에, 위험을 감수하며 복구해 주겠다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체 언제쯤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을까… 정말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잠은 도통 오지 않았다. 세렌은 결국 텐트 밖으로 나와 발걸음을 옮겼다. 고속도로처럼 넓게 뻗은 도로 위에는 노숙자들이 이불처럼 헝겊을 덮고 드문드문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들을 깨우지 않으려 살금살금 걸어 도로 옆 풀밭에 주저앉았다. 별이 쏟아질 듯한 하늘. 풀 냄새, 귀뚜라미 소리. 세렌은 숨을 고르며 잠시 사색에 잠겼다. 그때였다.


쉬익—, 찌르르—, 파지직—.

고요한 밤의 소리들에 이질적인 소리가 섞여 들었다.


“… 전기 소리?”


가로등은 이미 꺼진 지 오래였다. 이 허허벌판에서 전기 소리가 날 리 없었다. 세렌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시, 파지직—. 이번엔 맞은편 풀숲에서 파란 불꽃이 튀었다. 세렌은 본능적으로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어렴풋한 검은 실루엣. 그 순간—


“앗!”

세렌의 발목에 뭔가 날카로운 게 스쳤다. 풀인지 벌레인지도 알 수 없었다. 고개를 숙여 확인한 순간, 검은 그림자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가 황급히 그쪽으로 달려갔을 때, 남아있는 건 코를 골며 자고 있는 노숙자, 스피노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 링크가 … 타고 있어?”


스피노의 목덜미, 세렌이 낮에 이발해 준 그 짧은 머리 아래에서 희미하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누군가 방금 전까지 그의 링크에 손을 댄 것이 분명했다. 세렌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리고, 낮에 들었던 한 마디가 번개처럼 스쳤다.


“당신… 링크… 고장…”

“잠깐만… 그 남자가 내가 더스트에 온 이유를 어떻게 알았지? 대부분은 그냥… 사연이 있다고만 생각할 텐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리오를 범인이라 몰아붙였던 때와는 다른 감각이었다. 이번엔 단순한 의심이 아니라, 진짜 범죄자가 곁에 있다는 공포였다. 세렌은 황급히 텐트로 돌아왔다. 피곤에 지쳐 몸이 무거워졌지만, 그날 밤 그녀는 끝내 잠들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세렌, 얼굴이 왜 그래? 안 좋아 보여.”

“… 그냥, 잠을 좀 설쳤어요.”


걱정스러운 일행들의 말에도 세렌은 억지로 웃으며 자리를 지켰다. 텐트 안에만 있으면 오히려 더 무서운 생각이 밀려올 것 같았다. 그렇게 일에 몰두하던 중, 어제의 그 남자가 다시 세렌 앞에 섰다. 이번에는 머리가 감겨 있었고, 수염 끝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세렌은 그를 마주하기 껄끄러웠지만 미세하게 샴푸 향기가 풍겨오자 거부할 변명을 찾기를 관뒀다.


“… 앉으세요.”


세렌은 애써 담담한 척하며 남자를 의자에 앉혔다. 서걱, 서걱. 덥수룩한 머리칼이 떨어져 나갔다. 손끝에 힘이 잔뜩 들어갔지만, 그녀는 차분하게 이발을 이어갔다. 마지막으로 헝겊으로 목덜미를 털어주려는 순간, 세렌의 손이 굳었다.


“이 사람, … 링크가… 없어?”


보통의 링크 크기보다 훨씬 큰 흉터. 사고가 있었다고 해도 링크가 꺼져 있거나, 오류를 뜻하는 붉은 불빛이 반짝이는 경우는 봤지만, 도려낸 듯 살만 남은 흉터는 처음이었다. 세렌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고장이 아니라… 애초에 없는 건가? 아니면 뽑혀나간 건가…’


세렌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목덜미를 털었지만, 입안은 바짝 말라붙었다. 리오를 불러야 하나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망설이는 사이, 남자는 스스로 목 뒤를 툭 털고 가운을 벗어 세렌에게 건네며 시선을 고정했다.


세렌은 날카롭고 위협적인 눈빛을 예상하며 몸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마주한 것은 뜻밖에도 선한 얼굴이었다. 눈가의 주름마저 부드럽게 보였다. 그 순간 세렌은 이 사람도 그저 평범한 사연이 있는 무기록자일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 한 자락, 짧고 깊게 스치는 무언가가 세렌의 경계를 끝내 풀어주지 않았다.


“저기…!”


세렌이 용기를 내어 부르려는 순간,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 잔뜩 긴장했던 탓일까.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이 이상하게 공허해 보였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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