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실마리

소설 [E.V.E.]

by 이쥬니

일이 끝난 뒤,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는 자리. 다른 이들이 허겁지겁 먹는 사이, 세렌은 수저만 맴돌렸다. 머릿속을 차지한 건 단 하나, 그 남자의 흉터, 그리고 낮게 흘러나온 말. “링크 고장.”


그건 단순한 무기록자의 흔적이 아니었다. 분명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증거는 없었다. 섣불리 의심하다 리오와의 관계가 틀어졌던 기억이 떠올라, 세렌은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 듣고 있어?”


리오의 목소리가 생각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어? 뭐라고 했어?”

“이렇게 깨작거려도 괜찮겠냐고.”


세렌은 멍하니 앞을 내려다봤다. 수프는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고, 풀잎 몇 개만이 건드려진 채 흔적도 없이 떠다니고 있었다. 리오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너 이따가 배고프다고 징징대지 마라~”

“어… 어.”


얼버무리는 대답. 리오는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반응이 영 시원찮네. 무슨 일 있어?”


세렌은 말문이 막혔다. 원래도 생각에 잠기면 식사를 대충 넘기곤 했지만, 오늘은 정도가 심했다. 대답 없는 태도에 리오는 점점 초조해졌다.


“왜 그래? 여기 사람들이 괴롭혔어? 아니면… 집에 가고 싶어? 무어 아저씨께 얘기해 둘 테니까, 오늘 저녁에 출발해도 돼.”


‘집.’ 리오의 말이 세렌의 가슴에 파문처럼 번졌다. 제3 더스트가 이제는 자연스레 ‘집’이라 불릴 만큼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럼 언제까지? 더스트의 생활이 전부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공식 구역의 삶이 그리웠다. 끊기지 않는 전기. 필요할 때 바로 달려갈 수 있는 상점가. 고기가 듬뿍 들어간 스튜와 산해진미들. 심지어, 불편할 때마다 찾을 수 있던 깨끗한 화장실마저. 그리움과 현실 사이에서 세렌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주 위험한 도박일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궁금한 건 못 참아.


“아니.”

세렌이 고개를 들어 리오를 보았다.

“오히려 하루 더 머물고 싶은걸.”

“뭐? 왜?”


진심으로 궁금한 듯 연이어 물음을 던지는 리오를 바라보며, 세렌은 잠시 망설였다. 모든 것을 털어놓을까? 3개월 동안 함께 다니며 신뢰는 충분히 쌓였지만, 한때 리오를 범인으로 의심했던 기억이 아직도 부끄럽게 마음에 남아 있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결국 세렌은 자신의 이야기는 덮어둔 채, 그 수상한 남자에 대한 부분만 조심스레 꺼냈다. 리오의 표정은 곧 굳어졌다. 원래도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답게, 그는 곧장 심각한 얼굴로 세렌의 말을 곱씹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


리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순했지만, 동시에 천재적이었다. 세렌조차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찌른 것이었다. 뜻밖에 의견이 잘 맞아떨어진 두 사람은 오랜만에 티격태격 없이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작전 회의가 끝난 뒤, 두 사람은 일행에게 도로 정비를 이유로 하루 더 남겠다고 했다. 노숙자들의 잠자리인 도로에 잡초랑 균열 좀 손봐주자는 핑계였다. 식량도 얼마 남지 않았던 터라, 일행들은 오히려 이 둘을 엮고 싶다는 듯 기꺼이 자리를 내주며 서둘러 짐을 챙겼다.


남겨진 리오와 세렌은 짧게 작전을 정리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세렌은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지만, 이번만큼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두려움을 누그러뜨려주었다. 어쩌면… 조금은 설레는 기분까지 드는 걸까? 리오 또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해킹범을 잡아내는 영웅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어린아이처럼 흥분하며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일행들을 배웅한 두 사람은 곧바로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그들의 계획은 단순했다. 도로를 정비하는 척하며 수상한 남자의 잠자리를 살피고, 주변에서 단서를 찾는다. 만약 흔적을 발견하면 피해자의 링크 손상과 대조해 일치 여부를 확인한 뒤, 범인을 체포한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그러나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계획이었다.


“준비됐지, 리오? 난 이쪽, 넌 저쪽.”

“응. 뭔가 발견하면 바로 신호 보내.”


두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도로의 균열을 메우며 수색을 시작했다. 잡초를 뽑고 시멘트를 발라가며 두어 시간을 뒤졌을까.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 같던 순간, 리오의 손끝이 멈췄다. 틈새 속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확실해. 이거… 회로 조각이야.”

“여기, 이브 마크가 새겨져 있는 걸 보니 링크에서 떨어져 나온 게 분명해.”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긴장과 흥분이 동시에 스쳤다. 마치 스파이 영화 속 콤비가 된 듯,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렌은 곧장 스피노를 찾아 텐트로 데려왔다. 텐트 앞은 리오가 지키기로 했다.


“스피노 씨, 혹시… 링크 고장 나셨죠?”

“응? 맞아. 근데… 네가 그걸 어떻게—”

“며칠 전 아저씨 목에서 연기가 나는 걸 봤어요. 그런데 오늘 이 회로 조각을 주웠거든요. 혹시 아저씨 링크에서 떨어진 게 아닐까 싶어서…”


스피노가 대답을 이어가려던 순간, 텐트 밖에서 소란이 터졌다. 리오가 어떤 남자와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렸다. 세렌은 순간적으로 텐트를 젖히고 밖을 확인했다. 바로 그 남자였다. 유력한 용의자인, 수상한 남자.

그는 리오의 팔을 뿌리치며 안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세렌은 피가 끓는 듯 당당히 앞으로 나섰다.


“여기까지예요. 다 알아냈거든요. 스피노 씨 링크가 고장 난 것도 확인했고, 증거 조각도 있어요. 대조만 해보면..”

“아니, 잠깐만!”


세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스피노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 얼굴에는 설명할 수 없는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그리고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빛으로 세렌을 바라보며 한 발 물러섰다.


“내 링크는 고장 난 지 오래야. 더스트에 온 것도… 도둑질하다가 실수로 떨어져서, 그 충격에 링크가 나가버렸거든. 범죄자의 링크는 고쳐주지 않는다길래 그냥 방치했어. 지금은 물론 손 씻고 열심히 농사지으며 살고 있어. 아마 테시안이 워낙 말이 없으니 수상하게 본 모양인데… 그도 그냥 농부일 뿐이야.”


스피노는 양손을 들며 결백을 호소했다. 세렌과 리오는 순간 벙쪘다. 그렇다면 어제 우리가 본 건 뭐지? 링크가 어제 망가진 게 아니라면… 그 시간에 그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때, 침묵을 깨듯 테시안이 한숨을 짧게 쉬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 거기 들고 계신 호미, 저에게 파시겠습니까? 돈으로 드리죠.”

“네?”


세렌과 리오는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테시안은 태연하게 주머니에서 구겨진 지폐 몇 장을 꺼내 들었다. 노숙자에게 돈이라니. 그것도 링크가 고장 난 사람에게 금전 거래는 조롱이나 모욕에 가까운 행위라, 사실상 금기에 해당했다. 스피노의 얼굴에도 당혹이 그대로 드러났다. 갑작스레 끌려와 심문당하던 와중에, 지금껏 한마디 말 없던 사람이 불쑥 돈을 내밀다니. 그는 리오와 세렌, 그리고 테시안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결국 세렌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마지못한 듯 호미를 내밀었다.


“어…?”


스피노의 몸이 굳더니, 전신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떨렸다.


“스피노 씨!”

“뭐야, 왜 그래요!”


세렌과 리오가 다급히 붙들며 등을 두드렸지만, 스피노는 제어할 수 없는 듯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니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테시안의 표정은 달랐다. 놀람도 걱정도 아닌, 마치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미묘한 여유.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말없이 구경할 뿐이었다.


“기록이… 생겼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스피노가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세렌과 리오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기록? 스피노는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두 사람의 손을 붙잡으며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새도 없이, 오열하며 감사를 전하는 그를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스피노는 무언가에 홀린 듯 벌떡 일어나 주민들에게로 달려갔다. 남은 건,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렌과 리오, 그리고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테시안뿐.


세렌은 정신을 추스르고 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설명… 해주셔야겠네요.”


테시안은 입꼬리를 올리며 짧게 대꾸했다.


“싫다면… 어쩔 거지?”


처음으로, 그가 말을 더듬지 않았다. 오히려 또렷하고 당당한 목소리였다. 리오는 화들짝 놀라, 지금껏 벙어리인 줄 알았던 그에게 연신 말을 할 수 있었냐며 몰아붙였다. 하지만 세렌은 리오의 목소리를 등지고, 테시안과 눈을 맞춘 채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세렌이 비릿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되받아쳤다.


“방법은 두 가지죠. 이 회로를 가지고 관할 센터에 가서 링크 해킹범을 잡았다고 소란을 피우거나, 아니면 제68 더스트에 어떤 링크도 고쳐주는 전설의 수리공이 있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거예요.”


테시안은 잠시 세렌을 바라보다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세렌은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리오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망칠지 몰라. 뒤를 막아.”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먹잇감을 탐하는 맹수처럼 느릿하게 움직였다. 눈빛만은 전혀 풀리지 않은 채였다.


“어느 쪽이든 확실히 곤란하겠군.”


테시안이 어깨에 잔뜩 들어 있던 힘을 풀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는 중얼거렸다. 순간, 움직임을 감지한 리오가 본능적으로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세렌은 예상치 못한 우스꽝스러운 광경에 잠시 긴장이 풀렸지만, 눈빛은 여전히 예리했다.


“할 얘기가 많으실 테니, 안에서 계속하시죠.”

“허허, 그런데 나를 붙잡고 있는 이 청년도 함께 들어와야 하지 않겠나? 보아하니 자네 역시 숨길 얘기가 많은 것 같은데.”


세렌은 걱정스레 리오를 바라봤다. 다행히 리오는 눈치껏 상황을 읽고, 두 사람에게 텐트 안으로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세렌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움을 표하곤, 테시안과 함께 천천히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자세히 보니 그는 60대 중반은 족히 넘어 보이는 노신사였다. 나이로 치면 한스 브라운과 비슷했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세렌은 그 나잇대의 남자들을 다루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선 돌려 말하지 않는 것.


“스피노 씨에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링크가 고쳐진 건 알겠는데.”

“말 그대로, 그 자의 링크를 내가 수리했지.”

“그러니까… 왜, 어떻게요.”


세렌의 눈빛이 오랜만에 도시 개선 사업을 추진하던 때처럼 번뜩였다. 그녀는 테시안의 표정을, 손가락 끝을, 호흡마저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샅샅이 훑었다.


“그 자는 애쉬번에 가족이 있었네. 하지만 회사 부도로 실직한 지 보름째 되던 날, 아이를 굶길 수 없어 결국 도둑질을 했지. 그러다 창문에서 추락해 목이 부러졌어. 시간이 지나면서 뼈는 붙었지만, 카이로시아에선 범죄자의 링크는 절대 고쳐주지 않아. 속죄하든 말든 상관없이 말이야. 결국 그는 가족을 떠나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지. 여기선 도둑질도 하지 않고 성실히 농사만 짓더군. 반성하며 가족을 보고 싶어 하길래… 내가 슬쩍 손을 봐준 거야.”

“‘왜’는 알겠는데, ‘어떻게’가 빠졌네요.”

“사실 별거 아니네. 수리를 거부당했을 뿐이지, 기술적으로는 간단한 문제였어. 부서진 회로를 들어내고 새 회로를 붙여 넣으면 되는 일이지.”


세렌은 숨을 들이켰다. 놀란 이유는 많았다. 무엇보다 그의 말투. 이곳 사람 같지 않았다. 단정하고 조리 있는 설명, 배운 사람 특유의 억양. 게다가 링크 구조를 이해하고 직접 수리까지 한다니, 분명 관련된 일을 하던 사람이 틀림없었다. 세렌의 눈빛이 경계에서 호기심으로 미묘하게 바뀌는 순간, 테시안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혹할 만한 미끼를 던졌다.


“보아하니 자네의 링크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군. … 내가 한 번 봐도 되겠나?”

“… 잠깐.”

세렌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어떻게 제 링크가 고장 났다는 걸 알았던 거죠? 게다가 어제 저한테 ‘여기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셨던 건 또 무슨 뜻이고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남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피식 웃었다.


“말 그대로야. 자네는 더스트에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처럼 보였거든. 일을 다 끝내고도 다른 이들을 돕지 않는 태도… 그건 딱 카이로시아 사람 같았지.”


순간, 세렌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내가… 그랬던 건가?’

17구역을 비롯한 다른 구역에서는 오직 자신의 성과만이 중요했다. 남을 돕는 일은 어리석은 짓 취급을 받았고, 괜히 나섰다가 일이 잘못되면 싸움으로 번지기 일쑤였다.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밴 습관이 이제 와서 드러난 것이다. 세렌은 움찔하며 되레 발끈했다. 그러나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이런 일을 오래 하다 보니, 사람들의 링크를 관찰하는 게 습관이 되었네. 대부분은 오래 기록하지 않아 꺼진 흔적뿐이었지만… 자네는 달랐어. 링크에 미세한 그을음이 남아 있었지. 스스로 해킹을 한 건 아닌 듯한데 나를 해킹범으로 몰아간 걸 보면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군. 누군가 들을까 봐 목소리를 낮췄을 뿐인데, 괜한 불신을 만들었다면 미안하네.”


고개 숙여 사과하는 그의 태도는 진심 같았다. 세렌은 또다시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닫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상대가 모르는 일이니 모른 척하기로 했다. 조금 고민하다가, 세렌은 새침한 얼굴을 가장하며 팔짱을 꼈다.


“저도 오해한 부분이 있으니 사과는 받아들일게요. 하지만 그전에 당신이 누구인지부터 알아야겠어요. 왜 정체를 숨기면서 이런 일을 하는 건지, 링크를 고칠 만큼 기술이 있는 사람이 왜 더스트에 있는 건지. 만약 범죄자라면 제 링크를 맡길 수는 없으니까.”


남자의 눈빛이 한층 진지해졌다. 세렌은 본능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마침내 결심한 듯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선 ‘말이 없는 자’라는 뜻으로 나를 테시안이라 부르지만… 내 진짜 이름은 에녹이라네. 에녹 리븐. 40년 전, 이브의 기술자였지.”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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