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이브의 기술자

소설 [E.V.E.]

by 이쥬니

단 한 문장에, 풍경 전체가 다른 결을 띠었다. 낮임에도 어두워 랜턴을 켜둔 텐트 속, 얇은 천 너머로는 가로수들의 흐릿한 윤곽이 그림자처럼 겹쳐 있었고, 멀리서는 일하는 사람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이브의… 기술자.” 세렌이 낮게 되뇌었다. “그럼, 루미아 출신이었다는 말이군요.”


에녹은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세렌은 보이지 않는 그의 목 뒤 흉터가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불결한 낙인 같았던 그것은, 지금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것은 단절일까, 회피일까… 아니면 결심의 흔적일까.


“미리 말해두겠는데, 나는 범죄자가 아니야.”


에녹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오래된 피로가 배어 있었다. 세렌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글쎄.” 에녹은 잠시 숨을 고르듯 웃음을 흘렸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던 철없는 시절이었어.”


그의 시선이 천 너머 어딘가, 오래된 어둠의 한 지점을 붙든 듯 머물렀다. 마치 그곳에, 과거로 이어지는 문고리가 매달려 있기라도 한 듯. 곧, 그의 목소리가 천천히 어둠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2276년, 루미아 중앙청 회의실]


“최종 보정자의 개입을 완전히 없애야 합니다.”


순간, 회의실 안 공기가 뻣뻣하게 굳었다. 프로그램 테이블 위가 차트와 그래프의 파란빛으로 물들었다. 각료들과 연구원들이 서로의 얼굴을 훑다가, 이내 시선을 발언자의 얼굴에 꽂았다. 수많은 시선에도 흔들림 하나 없이 당당한 눈빛의 사내는 에녹 리븐, 당시 스물을 갓 넘긴 기술자였다.


“리븐 씨, 그건… 너무 급진적이오.”

한 연구원이 중얼거렸다.

“아직은 인간의 보정이 필요합니다. 예외와 다양성은 계산으로 잡히지 않아요.”


“아니요.” 에녹은 곧장 잘라 말했다. “잡힐 수 있습니다. 예외란 결국 규칙의 허점입니다. 직감으로 넘겨짚을 사항이 아니라, 더 정교한 수학이 필요하다는 중요한 ‘증거’죠.”


순간, 웅성거림이 퍼졌다.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는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니냐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동료 연구원들은 아무도 그를 말릴 수 없다는 듯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책임자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리븐.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시오.”




에녹 리븐. 그 이름이 처음 세간에 등장하던 때는 2270년대 초반, 이브는 이미 반세기 넘게 도시를 지배하고 있던 시기였다. 누구나 점수를 받았고, 점수는 권리가 되었으며, 기록은 정확했다. 그러나 마지막 문턱에는 여전히 사람이 있었다. 보정자. 시스템이 과부하로 멈추거나, 오류로 기록되지 않은 행동들을 인간의 감으로 구원하는 존재. 카이로시아 사람들은 보정자의 존재를 대부분 몰랐지만, ㅡ인간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구원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안이므로ㅡ 이브와 정부의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매 회의마다 논란의 중심이 되는 존재였다. 누군가는 그들을 기계의 판단에 맞서는 안전장치라 불렀고, 또 누군가는 각종 비리나 불평등의 원인이 되는 시스템의 노이즈라 불렀다. 그리고 정부는 고심 끝에 두 번째 단어를 선택했다.


“더 빠르게, 더 효율적으로, 더 완전하게.”


결국 새 구호와 함께 ‘차세대 e-링크 개편 프로젝트’가 출범했고, 루미아는 최고의 인재들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프로젝트의 수석 기술자 에녹 리븐은 언제나 그 중심에 있었다.




“신호 패킷 손실률이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동료 연구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좋아요, 전자장 교란 내성은 어떤가요?”

“거의 두 배로 안정됐습니다. 더 이상 주변 기기 간섭은 문제 되지 않을 겁니다.”


실험실 모니터에 곡선 그래프가 부드럽게 이어졌다. 동료들이 서로 하이파이브를 나누었지만, 에녹만은 고개를 숙인 채 새로운 연산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이 정도론 부족합니다. 더 깊은 층위의 계산을 설계해야 해요.”

“아직도요? 이미 충분히 개선됐잖아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보정자들이 쓰는 규칙과 직관을 데이터로 옮겨야 합니다. 그들의 손길조차 필요 없게. 그게 진짜 완성입니다.”


사람들은 혀를 찼다. 모두가 눈 밑에 다크서클을 드리우고 지겹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에녹은 꿈쩍도 하지 않고 결의에 찬 눈빛을 보냈다. 결국 이 젊은 패기를 이기지 못한 기술자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에녹은 밤과 낮이 뒤섞이는 것도 모른 채 홀로 연구실에 남아 새로운 경계를 설계했다.


“사람을 닮은 계산.”

“그러나 사람보다 일관된 판단.”

“한 사람의 기분과 편견이, 타인의 삶을 흔들지 않게 한다.”


그는 늘 그렇게 중얼거리며 코드와 납땜에 손끝을 묻었다. 손등에는 자잘한 상처가 남았고, 눈 밑엔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그러나 모든 흔적이 가리키는 것은 단 하나였다. 완성.


업데이트 첫날, 샘플 모니터의 곡선은 놀라울 만큼 매끈했다. 지연은 줄었고, 오류는 사라졌다. 점수는 안정화되었고, 도시 지도는 한층 더 선명한 색조로 칠해졌다.


“이브는 진화했다!”


환호가 터졌고, 회의실엔 박수소리가 쏟아졌다. 몇 주 동안, 카이로시아는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 턱끝까지 내려온 에녹의 다크서클도 점차 제자리를 찾았다. 이제, 그의 일과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래프를 지켜보는 것이 다였다. 이대로만 산다 해도 루미아에서의 생활이 보장된 노후. 게다가 덤으로 명성과 재력까지 딸려올 테니 모두가 부러워할 삶이었다. 완벽주의인 그의 눈에 단 한 가지가 거슬리기 전까지는.


에녹은 여느 때와 같이 로그를 검토하다가 이상한 군집을 발견했다. 분명히 행동은 감지되는데, 결과로 환산되는 값이 0에 수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이를 돌보고, 노인을 부축하고, 설거지대에서 그릇을 닦는 사람들. 분명히 손목이 움직이고, 심박이 흔들리는데, ‘기록 없음’으로 기록된 사람들.


“미치겠네. 이건 왜 또 안 잡혀?”


에녹은 또다시 수많은 밤을 새웠다. 그러나 새로운 기준에 맞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카이로시아의 국고만큼이나 기록되지 않는 인원수는 점점 늘어났다. 어떠한 코드를 넣어보아도, 혹여 회로의 문제는 아닐까 몇백 번이나 설계를 수정해 보아도 결과는 같았다. 이브는 이제 객관적인 ‘성과’를 일으키지 못하는 행동은 취급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경위서를 썼다. 이브를 원래의 버전으로 되돌리고,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자들은 에녹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아, 그냥 모른 척 넘어갈까? 곧 보너스도 나올 텐데 굳이 사서 고생할 필요가…’


에녹은 머릿속에 떠오른 달콤한 생각에 깜짝 놀라 자신의 뺨을 때렸다. 내가 미쳤나 봐. 그는 얼얼한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연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경위서를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단어 하나에도 손이 멈추기 일쑤였다. ‘형평성’은 너무 정치적일까. ‘정의’는 감정적으로 보일까. 결국 다음 날 오전 회의를 한 시간 남겨둘 때까지도 한 글자를 못쓴 그는 말을 내려놓고 수치와 패턴만 남겼다.


오전 회의에서 책임자 스미스는 에녹의 그래프를 들여다보는 척하다가, 손가락으로 한 점을 툭 건드렸다. 턱선과 머리칼까지 매끈히 다듬어진 얼굴이 기계처럼 미소를 지었다.


“리븐 씨. 이브의 판단은 오류가 아닙니다.”

“오류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돌려놓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에녹은 숨을 골랐다.


“어떠한 코드로도 기록되지 않는 행동들이 있습니다. 취미, 청소, 돌봄… 생활 전반에 해당하는 일상적인 것들이요. 지금은 어떤 이유로든 그것이 성과로 환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요?”


스미스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짐과 동시에 에녹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무언가 언짢은 듯 한껏 찌푸려진 스미스의 미간만큼이나 압박감을 느낀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제발, 그 말만은. 에녹은 아무도 듣지 못할 애원을 연신 되풀이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스미스는 에녹의 간절한 목소리를 들을 생각이 없었다.


“이브가 기록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과가 아니라는 뜻이죠. 제가 보기에도 그렇네요. 만원에도 팔지 못할 그림 실력을 가지고 취미랍시고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청소? 돈을 주고 가정부를 고용하면 그 시간에 본인도 성과를 창출하고, 가정부도 경제활동을 할 수 있잖아요. 얼마나 좋습니까? 나머지는 말하고 싶지도 않네요. 하… 가족도 아닌 이들을 돌보는 건 자기만족인데 왜 국가차원에서 성과로 취급해주어야 하죠?”


올게 왔구나. 주변을 둘러보니 관계자들은 모두 스미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새로운 버전의 이브가 출범하면서 성과의 빈부격차가 더욱 심해진 덕에, 입지가 한층 더 공고해진 이들이었다. 에녹은 마치 중범죄를 저지른 피고인의 변호사가 된 기분을 느꼈다. 모두가 그를 엄벌에 처하길 원하는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지만, 그는 최후의 변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등 뒤에 있는 수천 명의 억울한 피고인들을 위하여.


“하지만… 그런 일들이야말로 우리를 사람답게 만듭니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아이를 안고, 노인을 부축하며, 스스로를 돌보는 마음이 바로 인간의 존엄 아닙니까? 비록 숫자로 환산되진 않아도, 그 모든 행동엔 분명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이브는 잘못되었어요. 원래 목적에 맞게 사람을 위한 시스템으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세상은 늘 의미 없는 걸 지우고, 남길 가치를 골라왔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들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시간보다, 학원에 보내는 것이 효율적이라 생각했죠. 그래서 사교육 산업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또, 어른들 스스로는 어땠나요? 직접 겪은 실패에서의 성장보다 남의 후기를 읽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더 빠르고 정확하다고 여겼죠. 그래서 SNS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길을 터득하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실패를 겪는 것은 가치 없는 일이었기에 선택하지 않은 건가요?”


"... 모두가 같은 길을 선택하진 않습니다. 어떤 부모는 여전히 학원보다 책을 읽어주고, 어떤 이는 여전히 실패를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됩니다."


"네 그렇죠. 근데,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죠? 그 길이 많은 이들이 선택한 효율적인 길보다 우수했다면, 카이로시아의 중심인 지금 이곳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손에 땀을 쥐며 말을 고른 에녹의 노력이 무색하게 스미스는 단숨에 그의 말을 반박했다. 에녹은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그 자신도 부딪히는 삶보단 검색과 AI의 판단을 통해 빠른 길을 골라 이 자리에 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회의는 끝이 났다. 문이 닫히기 직전, 누군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좋은 발표였어요”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그것이 칭찬이었는지, 애도의 인사였는지 알 수 없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에녹은 생각에 잠겼다. 머리로는 스미스의 말이 이해되었으나, 찜찜한 느낌은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AI를 붙잡고 절충안을 찾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다. 반복되는 행동, 장기적인 유지, 타인의 성과를 가능하게 하는 보조 행동. 이름 붙이기 어려운 일들을 이름 붙여보려 했다. 이브를 속이는 행위를 꾀한 것이다. 처음엔 작은 승리들이 있었다. 일부 값이 약간 올라갔다. 몇몇 노인의 점수가 0.1쯤 움직였다.


그러나 곧 전체 시스템이 그 상승을 ‘예외’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이브는 스스로의 기준을 방어하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에녹의 말에서 비롯된 방법이었다. "예외는 규칙의 허점이죠." 그가 뱉었던 말이 다시 그에게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에녹이 예외를 만들려고 할수록 이브의 경계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에녹은 반복되는 작업에 지쳐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봤다. 내가 고작 이런 걸 만들려고 이브에서 일했나? 아니 그것보다 내가 왜 이브에 오게 되었더라. 그는 까마득한 일상들을 헤집고 이브에 지원한 날을 떠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거창한 이유는 없었던 것 같다. 카이로시아 국민 모두가 그러하듯 이브는 꿈의 직장이었으므로. 또, 이브의 도입 전과 비교해 월등히 안정화된 현재의 시스템을 동경했으므로. 그리하여 자신도 새로운 역사 속 영웅의 반열에 오르고 싶었으므로. 그게 전부였다.


“영웅은 무슨”


과거에 상상했던 미래와 정 반대의 현실에 놓인 에녹은 절망에 빠졌다. 자신이 만든 건 비리를 타개하고, 억울한 노동자의 편에 서서 싸우는 히어로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미개한 것이라 여기며 사람들을 가지치기하려던 B급 영화 속 악당이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후벼 팠다. 그리고 에녹 자신은 악당이 가진 무기를 더 정밀하게 개조함으로써, 더 잔혹하도록 부추긴 미치광이 박사쯤 된다는 생각은 그를 완전히 무너트렸다.


완전히 체념한 채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도, 상부와의 타협점도 찾지 못한 에녹은 결국 사직서를 썼다. 경위서와 달리 사직서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써 내려갔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는 컴퓨터를 끄고 모니터 위를 손으로 훑었다. 프로젝트에 매진하느라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먼지들이 에녹의 마음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에녹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는 누구와도 작별인사를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사무실을 나섰다. 마지막 퇴근길이 될 루미아의 밤은 유난히 조용했다. 밝다 못해 눈부신 가로등 아래, 사람들은 말없이 걸었고, 표정 없이 앞만 보았다. 하나같이 제시간에 움직이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정확하고 빠르고,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그 모든 질서가 에녹에게는 갑자기 너무 낯설고, 서늘하게 느껴졌다. 누구도 누굴 바라보지 않았고,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 에녹은 그 틈에 서 있는 자신이, 더 이상 사람이라 불릴 수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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