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V.E.]
“우스운 일이지. 사람을 기계로 평가하려고 애쓰던 사람이…”
“… 그래서, 사직서를 내고 루미아에서 추방당하신 거예요?”
“아니. 그때 날 스카우트하려는 기업은 많았다네. 다만 정식 제안이 오기 전에 내가 먼저 루미아를 떠나버렸을 뿐이지.”
몇 년 동안 루미아 밖으로 나가본 적 없던 에녹은, 마지막 퇴근길에 충동처럼 구역 경계선을 넘었다. 지도를 보지 않아도 길을 찾았다. 오래전 자신이 그려 넣었던 설계 도면 속 빈칸들을 따라 걷는 것 같았다. 표지판은 없었다. 대신 사람들의 행위가 표지판이었다. 도로 한가운데 펼쳐진 담요, 아무도 세지 않는 하품의 횟수, 혼잣말과 친절과 욕설, 손수 만든 낡은 죽 그릇의 온기. 그는 그 모든 것을 처음 보는 풍경처럼 오래 바라보았다.
그곳은 이상한 세계였다. 이상적이라는 뜻도, 이상하다는 뜻도 모두 포함한. 체제 밖의 삶, 정해진 기준 밖의 가치가 살아 움직이는 장소.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기록하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가 사라지는 건 아니군.”
그 문장에 도달하고서야 그는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이 앞으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고. 그는 망설임 없이 목 뒤에 달라붙어 있던 e-링크를 직접 뜯어냈다. 고통도, 공포도 상상보다 덜했다. 불꽃이 작게 튀었고 살이 조금 탔다. 그는 그 상처를 손바닥으로 한참 누른 채 앉아 있었다. ‘나는 이제 이브의 시야에서 떨어져 나간 인간이구나.’ 그 생각이 밀려오자 허망함이 함께 들이쳤다. 에녹은 미친 사람처럼 며칠을 걸었다. 초라한 행색과 슬픈 눈빛을 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꾸만 자기 자신을 보았다. 그것이 에녹에겐 굶주림과 피로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다.
최소한만 먹고 마시며 버티던 에녹이 나흘째 밤이 되던 때에 탈진해 길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리오가 세렌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처럼, 누군가 에녹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은 분명한 구원의 손길이었지만, 에녹은 속으로 ‘이제 에녹이라는 사람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 더스트에 입성한 그는 스스로를 죽은 사람이라 여기며 자의로 말을 하지 않았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이브의 정반대 편에 서기로 했다. 누구도 기록해주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듣는 것. 그것이 그의 새로운 사명이었다. 사람들은 곧 그런 그에게 이름을 붙였다. 말도, 표정도 없는 사내. 테시안.
그는 묵묵히, 그러나 꾸준히 더스트의 일원으로 시간을 보냈다. 아픈 노인을 업어 진료소까지 옮기고, 다리를 저는 아이의 목발을 손봐주고, 밭을 갈 힘없는 이들을 대신해 흙을 갈았다. 어린아이들은 말없는 그에게 장난처럼 그림을 건네곤 했다. 그는 대답 대신 오래 바라봐주었고,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은 기뻐했다.
하지만 그렇게 산다고 해서, 더스트의 모든 삶이 곧바로 이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가족을 그리워하며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 이들이 있었고, 누군가는 자책 속에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또 어떤 이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며, 몸이 부서져라 일에 매달렸다.
에녹은 그 광경을 볼 때마다 숨이 막혔다. 이 끔찍한 상황을 만들어낸 과거의 자신은 정작 두 발 뻗고 잠들며, 아무런 죄책감 없이 일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지친 손끝과 꺾이지 않는 눈빛에서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진정한 ‘영웅’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가끔, 아주 가끔, 영웅들의 링크를 고쳐주었다. 그것이 이 평화로운 전쟁터의 장병들을 다시 수용소로 보내는 일 같아 썩 달갑진 않았지만, 그 ‘수용소’가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천국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이 카이로시아를 천국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에녹은 카이로시아로 돌아간 그들의 빈자리를, 자신의 죄를 새겨 넣는 문신처럼 묵묵히 받아들였다.
좁은 텐트 안, 기운이 다해 구부정하게 앉아 있으면서도 눈빛만은 또렷한 노인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세렌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아침에 이불을 개어두지 않았다면, 그것을 목까지 끌어올려 입을 가리고 싶을 정도였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쌓인 긴장과 피로가 한꺼번에 턱으로 내려앉았다. 왜인지 모르게 그녀는 루미를 떠올렸다. 절뚝거리는 다리와, 맑은 눈동자가 테시안—아니, 에녹과 겹쳐 보였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양의 고요가 천천히 그들 사이에 가라앉았다. 먼 데서 불어온 바람이 텐트 모서리를 건드리며, 어둠 위에 얇은 주름을 만들었다.
“결국 바꾸지 못할 세상을 피해 여기까지 오신 거네요.”
세렌의 말에 에녹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곧장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변명도 자책도 없었다. 오직 확인. 그가 이미 자신에게 한 질문을, 다른 사람의 입으로 다시 듣는 기묘한 안도.
“그래. 내가 만든 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도망쳤지.” 그는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내가 지웠던 사람들에게, 조금은 기록을 돌려주려고.”
세렌의 입술이 바짝 말라붙었다. 지워진 것들. 그녀는 그 기록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리오가 새벽마다 어둠 속에서 일어나 준비하던 걸음. 루미가 남몰래 굳힌 결심의 표정. 무어 아저씨의 소박한 농담 하나. 이발하러 줄을 선 사람들의 그을린 얼굴. 빵을 나눠줄 때 가장 늦게 손을 드는 사람. 이름 붙이지 않으면 사라져 버리는 것들. 한때는 그녀 자신도 쓸모없다고 여겼던 모든 순간들이었다.
그때, 그녀 안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사전이 찢겨 나가는 듯한 감각. 효율, 성과, 기준 같은 단어들이 물에 젖은 종잇장처럼 제 모양을 잃어갔다. 두려웠다. 그러나 그 빈자리에 낯선 해방감이 스며들었다. 이제부터는 다른 걸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 그것은 고장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조정이었다.
“테시안…” 세렌이 무의식적으로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래도 그 이름이 나를 꽤나 편하게 만들었네. 침묵으로 쌓은 것은 말로 쌓은 것보다 견고한 법이니까. 참 마음에 드는 이름이야.” 에녹이 옅게 웃었다.
“그럼… 저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신 건, 이제는 그 침묵이 필요 없다고 느끼신 건가요? 이미 들켰으니까?”
에녹은 닿을 수 없는 허공을 오래 바라보았다. 마치 텐트 위로 겹쳐진 또 다른 세계를 들여다보는 듯. 설계도. 회의실. 깜박이는 불빛. 구조화된 폭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나 이곳까지 걸어온 발자국.
“아니, 침묵은 언제나 필요하지… 하지만 자네가 이곳 사람답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는 게, 내 지난날과 겹쳐 보였어. 그래서 내가 감히 입을 열게 되었다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다시 텐트 안으로 번졌다. 세렌은 고개를 숙였다. 이곳 사람 같지 않다는 말은 곧, 네 안에 여전히 카이로시아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더스트의 방식에 아직 물들지 못한 채, 여전히 성과와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
그러나 세렌의 귀에는 그 말이 꾸짖음으로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 변할 수 있다’는 희미한 바람처럼, 오래된 기도처럼 들렸다. 더스트 사람이라면 이미 잃어버린 카이로시아의 감각을, 너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녀는 그것을 기원으로 받아들였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가리키는 동시에, 아직 새로운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뜻으로.
“그래서 말인데, 내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네.”
그때,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묵묵한 걸음. 리오였다. 에녹의 제안이 어렴풋이 예상되어서일까, 이상하게도 세렌은 그 소리만으로도 눈물이 차올랐다.
“충격적인 이야기를 한꺼번에 듣는 건 건강에 안 좋잖아요. … 다음에 들을게요.”
세렌은 눈시울이 붉어진 걸 감추려 장난스러운 말투로 넘기며 텐트 문을 열었다. 하지만 에녹은 끝내, 기어이 한마디를 얹었다. 역시 나이 든 사람들은 제멋대로였다. 세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물 한 방울을 훔치고, 등을 돌려 텐트를 나섰다.
텐트 밖에는 리오가 서 있었다. 텐트 안에서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을 만큼 거리를 두고. 세렌이 모습을 보이자, 그는 언제나처럼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무슨 비밀 이야기가 그렇게 길어?”
익숙한 농담이었다. 방금까지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이야기들이 눈 녹듯 사라졌다. 세렌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한동안 평소처럼 투닥거리며 짧은 말다툼을 이어갔다. 그러다 나란히 앉아 노을이 물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빛이 천천히 저물어가고, 정적이 길게 이어졌다. 오래전 회의실에서 시들어버린 단어들 대신, 이곳에는 다른 언어가 자라고 있었다. 말로는 표현되지 않아도 서로의 침묵이 그 언어를 지켜내고 있었다.
“리오.” 세렌이 낮게 불렀다.
“응?”
“루미의 병을 고칠 수 있다면… 카이로시아로 돌아갈 거야?”
리오는 순간 멈칫했다. 짧은 침묵 끝에, 그는 눈가가 환해지도록 웃었다. 대답 대신 번지는 그 웃음을 보며, 세렌은 이미 답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목구멍 어딘가에서 매듭이 풀리는 것처럼 마음이 느슨해졌다. 세렌은 잠시 숨을 고르고, 결심하듯 말했다.
“에녹, 아니… 테시안이 나한테 제안을 했어.”
리오가 눈을 크게 뜨며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
“응, 내일 아침엔 고기반찬 달라고 했다며?”
푸흡—.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한동안 잦아들지 않았다. 하지만 세렌의 눈빛에 묘한 그림자가 스치자, 리오는 웃음을 거두었다. 세렌은 애꿎은 손톱만 만지작거리며 속삭이듯 내뱉었다.
“내 링크를… 고쳐준대.”
순간 바람이 멎은 듯 고요해졌다. 리오는 대답 대신 정면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깊게 들이마신 숨이 크게 울렸다. 그 숨결만으로도 그의 마음이 썩 달갑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세렌도 괜히 싱숭생숭해져 덩달아 눈을 감았다. 한참 뒤, 리오가 낮게 말했다.
“잘됐다. 그럼 이번 출장이 마지막이 되겠네.”
세렌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화들짝 눈을 떴다. 활짝 웃고 있는 리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 눈시울은 붉게 젖어 있었다. 웃고 있지만 울고 있는 얼굴. 세렌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 리오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내일 봐.”
“응 내일 보자:”
그 질문을 차마 묻지 못한 채, 두 사람은 어색한 인사를 남기고 각자 텐트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세렌은 끝내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몸을 뒤척이다가 이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밤은 완전히 내려와 있었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수많은 별들이 하나하나 불을 밝히듯 선명하게 떠 있었다. 카이로시아에서라면 대형 스크린의 광고 빛과 네온사인에 묻혀 보지 못했을 풍경. 세렌은 숨을 고르며, 이 어둠 속에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러나 고요함 속에서 떠오른 것은 별빛의 위안만은 아니었다. 링크를 고쳐주겠다는 에녹의 제안. 그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눈물이 차오른 채 애써 웃어 보였던 리오의 얼굴. 정말 미련 없이 헤어질 수 있을까? 세렌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동시에 또 다른 유혹도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편안하고, 안전하고, 명성과 재력이 뒤따르던 공식 구역의 삶. 정해진 규칙 속에서 움직이면 모든 것이 보장되던 세계. 세렌은 그곳으로 돌아가 다시 도시 개선 사업을 추진하는 자신을 상상했다. 젊은 부부들에게 아이를 미루라고 권하고, 아픈 노인들을 거리로 끌어내 환경운동을 벌이며, 아이들을 책상 앞에 묶어 서로를 경쟁 상대로만 바라보게 만들던 자신. 한때는 성과라는 이름으로 자부심을 느끼던 일이 이제는 되려 피로와 허무로만 다가왔다.
세렌은 눈을 감았다가 뜨며 자신을 돌아봤다. 늘 잠 못 이루며, 협조하지 않는 몇몇 사람들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공식 구역에서의 과거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달랐다. 누구든 손을 내밀면 발 벗고 나서 도와주는 분위기.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힘. “사소한 것들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듭니다.” 젊은 에녹의 말이 이제야 완전히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그때 세렌의 머릿속에 번뜩임이 스쳤다.
“이 허허벌판에 앉아 고작 두 갈래 길만 고민하다니. 멍청한 짓이야. “
하나는 링크를 고쳐 카이로시아로 돌아가는 길, 다른 하나는 고장 난 채 이곳에 남아 순응하는 길. 그러나 반드시 그 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스트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길을, 이곳의 가치를 공식 구역에까지 울려 퍼지게 할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에녹의 기술과 나의 경험이 만난다면 이브의 시스템을 거슬러, 더스트를 지워진 땅이 아니라 끌어올려야 할 미래로 바꿀 수도 있어.”
세렌은 숨을 고르고, 내일의 얼굴들을 떠올렸다. 루미의 웃음, 리오의 눈빛, 그리고 에녹. 그제야 세렌은 몸을 돌려 천천히 텐트로 들어갔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아주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일 봐, 리오.”
그 말은 더 이상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다.